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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알링턴의 제안 (33/121)

32화. 알링턴의 제안

언제나 냉랭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였으나 오늘은 유독 더 짜증스러워 보였다. 그가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여기는 내가 담배를 피우는 곳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약을 올리는 듯한 남자의 말에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링턴이 매들린 쪽을 곁눈질했다. 

“속이 상했나 보군요. 로엔필드 양. 평소의 그 긍정적이고 의지 넘치는 모습이 아니네.”

그가 담배 한 대를 꺼내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별로 속상한 일은 없는데요.”

울먹이는 목소리 때문에 별로 설득력은 없었다. 알링턴이 작은 담배 구름을 만들어냈다. 

“그 사진 때문에 그런 겁니까.”

“……!”

흠칫 놀라 옆을 돌아봤으나 알링턴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환멸이 가득한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런 가십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걱정 마세요. 누구나 젊은 남녀를 이리저리 엮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누가 신경이나 쓴다구요.”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노팅엄 백작께는 폐를 끼쳤죠.”

“…생각은 자유지만, 저는 꽤 반대로 생각하는 편이긴 합니다.” 

알링턴이 담배를 태워대고, 불편해진 매들린이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걸음을 뗄 때였다. 그가 돌을 던지듯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거 아십니까.”

“네?”

“곧 환자들을 전부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모양이군요.”

“…….”

“병원은 다시 저택이 될 모양입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저도 다시 직장을 구해봐야겠습니다.”

그가 피다만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껐다. 

놀라워해야 했을까. 아니. 놀랍거나 충격적이거나 배신감을 느낄만한 일은 아니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그걸 이렇게 알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는데. 

한참 얼어붙어 있던 매들린이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링턴은 백옥같이 차갑게 얼어붙은 매들린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겁니까.”

“…어떻게 하다니요.”

“갈 곳은 있습니까?”

“어디든 갈 수 있죠. 두 손과 두 발만 있다면.” 

“계속 간호사로 일할 겁니까?”

어쩐지 남자와의 대화가 빙빙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의 저의를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병원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죠.”

재능까지는 아니었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자신이 나이팅게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환자들을 좋아하는 재주는 있었다. 환자들 역시 대체로 그녀를 좋아했고. 노동 강도만 아니라면 좋은 직업이었다. 그러니까 틀린 대답은 아니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남자의 눈썹 한쪽이 살짝 올라갔다. 흥미로운 표본을 발견한 나비학자처럼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같이 일해보지 않겠습니까?”

알링턴이 제안했다.

노을이 매들린의 뒤통수를 붉게 물들였다. 여자의 금발이 금실처럼 타올랐다. 매들린의 청명한 눈동자는 숨죽인 저녁의 빛을 흡수했다. 

그녀는 연이은 충격에 얼이 제대로 빠진 상태였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이안에게 들킨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알링턴이 폭탄 제안을 날렸다. 

지금 그의 제안 속 동기는 순수할지도 몰랐다. 지난 생을 토대로 남자를 재단하는 건 불공평한 처사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매들린에게는 뱀 같은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는 알면 알수록 낯선 얼굴을 자꾸만 드러냈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낯선 얼굴로 그녀에게 뜻밖의 제안을 건네왔다. 

노을 속에 파묻힌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노을빛 때문에 눈이 부신 알링턴은 가늘게 눈을 떴다. 

“말씀이라도 고마워요. 하지만 선생님은…”

“저는 정신병원 출신이죠. 매들린.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지 압니다. 정신병원이 그렇게 좋은 이미지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남자는 매들린이 다른 이유로 거절한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나름의 항변을 늘어놓았다. 

“치료는 성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황이 나빠지기도 하죠.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보람은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의 진일보에 함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같이 일하게 된다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매들린이 거절의 변을 생각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알링턴은 두 번째 개비를 담뱃갑에서 꺼냈다. 성급한 손놀림이었다. 

매들린은 눈을 감았다.

분명 이안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하지만 거기에 매들린의 잘못은 없었을까. 

[그때의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흐릿하고 뿌연 심상들이었다. 먼지 더께가 켜켜이 내려앉은 오래된 사진첩처럼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기억들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고통스러운 과거의 잘잘못을 가르는 일은 힘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모든 잘못의 원인을 눈앞의 남자에게 돌려봤자 소용없다는 거였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알링턴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 * *

알링턴은 매들린의 노을빛으로 얼룩지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보여주는 다채로운 빛깔들이 있었다. 

지금은 조금 슬퍼하고 있는 빛깔. 알링턴이 썩 마음에 들어하는 빛은 아니지만,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매들린이 근 몇 년간 간호사로서 보여준 성장은 놀라웠다. 그러나 더 놀라운 건, 자신의 제안이 순전히 충동적이었다는 거였다. 

솔직히 말해 매들린은 간호사로 적합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무른 성정의 소유자였다. 

연민이 지나치면 좋지 못하다. 환자와는 언제나 일정 거리를 둬야 하는데, 매들린 로엔필드에게는 그런 거리감이 부족했다.

전선에서 족히 수십의 다리와 팔을 잘라냈다. 그런 수술을 집도하면서 환자를 지나치게 연민하면 일을 그르칠 뿐이란 걸 알았다. 정신과적인 진료도 마찬가지였다. 환부를 도려내듯, 옳지 못한 사고방식을 도려낼 뿐이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백작을 정말 동정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보이는 것처럼 순진한 사람입니다.”

“역시… 그 기사로 저를 놀리고 싶으신 거죠?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니까요.”

매들린의 일견 부들부들한 외연이 바늘을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변모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알링턴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두 손바닥을 내보였다. 항복.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살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 제안은 진심이니, 재고해주시죠.” 

“…….”

매들린이 찬찬히 알링턴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얼굴에서 잔 술수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매들린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호의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노을은 붉은빛을 넘어 자줏빛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알링턴의 냉정한 파충류 같은 푸른 눈이 어두워져갔다.

여기서 남자와 더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매들린이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그녀가 살짝 목례한 뒤 발걸음을 서둘렀다. 병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매들린을 바라보던 남자가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내뱉었다. 

“저 여자는 끝까지 나를 싫어하는 티를 못 숨기는군.”

좀 억울한데. 

* * *

‘그나저나 병원이 문을 닫는다니.’

일이 도통 손에 잡히질 않았다. 결국, 동료들이 매들린의 상태를 눈치채고야 말았다. 수간호사인 오츠 부인이 그녀를 따로 부르는 지경까지 왔다. 

“무슨 일이에요. 미스 로엔필드.”

“죄송해요. 실수가 너무 잦아서….”

그녀가 거즈를 접으며 쩔쩔맸다. 

“실수는 상관하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오츠의 얼굴을 보자 안 그래도 침울한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걱정까지 끼치고 있구나 싶어 자괴감이 내려앉았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정말 괜찮아요. 열심히 할 수 있어요.”

“매들린. 늘 생각하지만…”

늘 엄격하던 오츠 부인이 ‘매들린’이라고 친숙하게 부르는 건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그녀의 주름진 엄격한 얼굴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로는 매들린을 더 슬퍼지게 할 뿐이었다. 눈앞의 스승과, 또 동료들과 곧 헤어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홧홧해졌다.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요. 지나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어요. 이제 다 끝났잖아요.”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일 테다. 매들린은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억지로… 그러니까 역량 이상으로 활달하게 굴 필요도 없어요.”

오츠 부인의 말이 맞았다. 매들린의 잦은 실수는 다 그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힘들수록 더욱 노력하고 유머를 잃지 않으려 했다. 

쫓기듯이 살아왔다. 지난 삶의 비참함으로부터,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그러느라 점차 소진되어 가는 것도 몰랐던 거다. 

‘이제 그렇게 안 해도 괜찮은 걸까. 전쟁도 끝났고 병원도 없어지니까.’

매들린이 제멋대로 퐁퐁 솟아 나오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했다. 오츠가 품에서 깨끗하고 부드러운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를 닦아줬다. 

“우리 착한 매들린. 말없이 묵묵히 인내만 하지 말아요.”

“오츠 선생님….”

“다 잘될 거예요. 매들린.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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