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신문기사
사람들이 읽을 각종 신문을 다리던 세바스천이 혀를 찼다. 가만히 다리미를 대고 있는 통에 신문의 일부분이 거무스름하게 탔다. 그가 가까스로 다리미를 치우고 신문의 내용을 눈에 담았다.
{ 백만장자 전쟁 영웅의 비참한 결말 – 그러나 그를 구원한 것은 사랑? }
사진 한구석에는 어리버리한 표정의 매들린과 이안이 서 있었다. 마치 작정하고 포즈를 잡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었다. 이안의 의족은 티가 나지 않았으나 목발이 눈에 띄었고 저화질의 사진에도 한쪽 얼굴이 상했음은 훤히 보였다.
“이걸 어쩌나.”
지역신문도 아니고 영국 유수 일간지에서 이런 유언비어성 기사를 내보낸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이건 노팅엄 가문에 대한 모욕이야.”
오래된 가문에 대한 예의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말세였다. 바야흐로 타블로이드의 보편화였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바뀐 것을 어찌 돌이킬 수 있을까.
귀족도, 부자도, 연예인도 전부 가십의 소용돌이 속에 소모될 뿐인, 그리고 타인을 소모할 뿐인 신세계의 출현이었다.
신문기사는 소소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기사의 내용인즉슨 이랬다.
장애를 가지고 폐인이 된 백작가의 장남이, 미모의 천사 같은 여성의 헌신으로 인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삼류소설이나 다름없는 내용이었으나 사람들은 꽤 감동한 모양이었다. 전보들이 쉴 틈 없이 쏟아졌다.
매들린 로엔필드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으나 이 여성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이야기 반, 병원에 기부하고 싶다는 이야기 사분지 일, 그리고 나머지 사분지 일…
선대 백작부인은 충격을 받아 잠시 앓아누웠고 이사벨은 길길이 화를 내며 날뛰었다. 에릭은 이리저리 도처에서 쏟아지는 연락을 받아내며 진땀을 흘렸다.
이안 노팅엄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택했다.
그는 침묵하다가 그날 저녁 가족들 앞에서 처음으로 문제를 거론했다. 그것은 질문이었다.
“로엔필드 양은?”
“됐고 일단 소송부터 이야기하자고-.”
“로엔필드 양에 대해서 물었어.”
이안이 묵묵히 질문을 고수하자 이사벨의 어깨에 잔뜩 든 힘이 풀렸다.
“평소랑 똑같아. 오빠. 어차피 신문기사엔 매들린의 이름은 안 쓰여있어.”
“…….”
그래도 신문을 받아본 병원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돌고 있을 것이다. 남자는 매들린 로엔필드의 모습이, 그녀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광분의 살의를 느꼈다.
물론 그 어두운 감정들은 남자의 화상 흉터와 오랫동안 귀족으로서 단련된 얼굴 근육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안의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에릭이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뭐. 애초에 간호사가 환자와 산책을 하는 게 이상한 거야?”
가족 구성원들의 시선이 에릭에게 향했다. 이안은 에릭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에릭이 헛기침을 했다.
“간호사로서 환자의 요양에 도움을 주고 있을 뿐이잖아. 자자. 지금은 형님의 회복에 집중할 때이지 이런 소모적인 데에 에너지 쓸 때가 아니라고.”
“오빠는 동생이 되어서 그런 게 말이 돼? 우리 가족이 모욕을 당했으면 배로 갚아줘야 하는 거 아냐!”
이사벨이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백작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에릭 말이 맞다.”
이안이 느릿느릿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굳이 이런 데에 힘 뺄 필요 없다. 의혹만 가중시킬 뿐이니까.”
“오라버니.”
이사벨은 여전히 이 모욕을 갚지 못한 채로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한 모양이었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로엔필드 양이 순전한 동정심에서 산책을 자처했다는 사실을 알겠지.”
간호사로서 응당 가져야 할 소명의식. 동정심. 그 정도였다. 이안의 분노는 자기 객관화로 인해 가라앉았다.
“동정심이라니…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리고 그게 문제의 요점이 아니잖아. 부상을 당했다고 해서 비참한 결말이니 뭐니 지껄이는 치들이 문제지!”
이안이 이사벨을 흘깃 지켜보더니 조금 태운 담배를 트레이에 비벼 껐다.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그가 서류철을 다시 꺼내 들었다.
“모임에서 논의할 병원 재정에 대한 이야기나 하지.”
서류에는 냉혹한 현실과 손익계산이 담겨있었다. 이안이 가장 평온함을 느끼는 세상이 그곳에 담겨있었다.
* * *
“매들린.”
“아버지, 말씀하세요.”
인근 마을의 2층 주택에서 세 들어 사는 양반이 병원까지 행차한 것은 무슨 요량인가 싶었다. 매들린은 한숨을 쉬었다. 돈은 꾸준히 부쳐드리고 있는데. 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로엔필드 남작은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병원 응접실에 앉아 이리저리 훈수를 뒀다. 한때 무척이나 미남으로 불렸던 얼굴은, 세월이 흘러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이 아름다운 저택도 이렇게 흉측한 장소가 되다니. 말세로군.”
소독약 냄새가 싫은지 남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글쎄요. 지금이 더 낫지 않나요? 적어도 사회에 기여를 하고 있으니까요.”
매들린의 말에 남작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말씀하세요. 어떤 용건 때문에 방문하신 것 같은데.”
매들린의 선 긋는 듯한 말에 남작이 혀를 찼다. 참하던 딸이 어찌 저리 독살스럽게 되었는지 한탄하는 것 같았다. 그가 품에서 신문 한 부를 꺼내어 보였다.
“이 신문의 내용이 사실이니?”
매들린이 남작의 손아귀에서 재빨리 신문을 뺏어 들었다. 어제 날짜의 신문에는 휴전 협상을 둘러싼 각국 정상들의 다툼이 헤드라인으로 실려있었고 귀퉁이에는 사진이 있었다.
사진에는 두 사람의 형체가.
“…….”
매들린의 표정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본 남작이 머리를 짚었다.
“백작 각하와 잘해볼 마음은 있는 거냐?”
“……무슨 소리-.”
“뭐 사진에서 본 바에 의하면 그다지 몸 성히 돌아온 것은 아니다만, 결혼 생활에는… 외적인 게 다가 아니다. 물론 생긴 게 중요한 요소긴 하지. 하지만 어차피 잘된 일이다.”
“아버지.”
지긋지긋하다. 이번에는 매들린이 머리를 짚을 차례였다. 어쩜 이리 속물적이실까.
“…지금이라도 정신 차린 거라면 다행이구나. 작위도 작위거니와 이 저택과 영지…, 미국의 온갖 부까지…. 너는 노팅엄 가문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모른다.”
그런 가문들의 위세는 총리와 대통령을 넘어서지. 로엔필드 남작의 표정에 공포 어린 경외심이 어렸다.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노팅엄 씨가 비록 잘생긴 얼굴이라는 큰 장점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본판은 괜찮은 남자였잖니. 너와 그 둘 사이의 자식도 볼 만할 거다. 아니. 자. 매들린, 네가 한시라도 미모를 유지할 때-.”
“그만 하세요.”
매들린이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안과 자신에 대한 모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신문기사에 따르면 말이다-.”
“바보 같은 기사예요.”
분노로 인한 울분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인생의 종말이라느니, 내리막길이라느니. 개소리 집어치우라 그래. 비참한 결말이라고? 누구 마음대로.
이번 생의 그는 다르다. 근거가 있든 없든 주장하고 싶었다.
매들린의 볼이 분노와 짜증으로 인해 장미처럼 붉게 물들었다. 완력만 있으면 제 아버지를 끌어내 쫓아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뒤에서 아버지가 뭐라 말하건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 막다른 그림자와 마주했다. 그림자의 정체는….
“이안.”
매들린의 심장이 무저갱으로 추락했다. 설마….
그는 응접실로 들어오려고 하다가 둘의 대화 때문에 계속 서 있었던 것 같았다.
‘다 들었어…?’
“엿들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렸군요.”
이안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뒤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사업 이야기를 하러 온 게 분명했다.
매들린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조금 전의 대화를 지금 저 사람들이 다 들었다니 뛰어내릴 곳이 있다면 뛰어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다른 길이었다.
이안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애써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건지, 뼛속 깊이 그녀를 경멸하고 있는 건지.
경멸해도 할 말이 없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작게 목례한 뒤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달려나가면서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어쩌면 자신의 청혼을 오해하지 않을까. 재산과 작위를 노린 행위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매들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추궁과 맞닥뜨리면 항변할 도리가 없었다.
전생에서는 실제로 사랑 없이 재산만을 위해 그와 결혼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제안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게 보이겠나 싶었다.
“내 탓이야.”
거절당한다 해도. 결국, 그가 나를 못 믿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 노력할 각오가 있었다. 전생의 전철을 피하고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늦었다. 시간을 되돌아가서도 그녀는 언제나 이안에게 해만 되는 존재일 터였다.
결국, 떠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병원 밖을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 옆에 한 인영이 드리워졌다. 흠칫 놀라 몸을 돌리니, 그곳에는 알링턴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