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이럴 건가요
매들린이 한참 환자들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불규칙한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이안 노팅엄이 서 있었다.
“이안.”
환자들, 병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남자에게로 꽂혔다. 셔츠와 바지만을 입은 남자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면서 매들린에게 다가갔다.
병상에 누워만 있는 이들은 그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일 터였다. 베일에 둘러싸인 백작. 병원의 주인이자, 전쟁영웅, 상이군인. 여러 타이틀을 지닌 남자였다.
“매들린.”
그의 목소리에는 채 갈무리하지 못한 다급함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 아까 그 소동이 벌써 귀에 들어간 모양이네요. 별건 아니었어요.”
“…….”
남자가 말없이 장갑을 낀 손으로 매들린의 손목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목덜미와 얼굴을 치밀하게 확인했다. 침윤된 한쪽 초록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렇게 그는 한참을 집중하며 살폈다.
“…….”
“저…나 괜찮대도요.”
주위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매들린이 고개를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
그제야 좌중의 시선을 눈치챈 이안의 볼 역시 뒤늦게 붉어졌다. 추태를 부렸다는 자각 때문인지, 그가 고개를 떨궜다.
“다행이군.”
“…네….”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비척거리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매들린은 그 자취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 병원을 계속 운영해나가는 건 무리예요.”
에릭이 차를 홀짝이며 투정 섞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직 환자들이 있어!”
이사벨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제대로 된 병원에 보내야 할 때지 않겠어? 이곳은 어디까지나 ‘임시’ 병원이잖아. 이건 모두에게 못 할 짓이라고.”
에릭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일을 할 기회는 많아. 재산의 일부를 보훈병원과 상이군인협회에 기부하는 편이 더 생산적일 수도 있어.”
선대 백작부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고민에 깊이 빠진 표정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구나.”
이사벨이 이안을 돌아봤다. 뭐라고 말 좀 해줘. 오빠. 이 병원은 이사벨과 선대 백작부인의 피와 땀이 어린 결과였다. 그녀로서는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
이안이 이마를 쓸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란 어려웠다. 저택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말수가 적어진 데다가 몹시 불안정했다.
“에릭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이안이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이사벨이 뭐라 항변을 위해 입을 벌리기 전에 남자가 다음 문장을 내뱉었다.
“너무 성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다.”
그가 협탁 위에 서류들을 툭툭 던져놓았다.
“그보다는 미국에서의 사업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게 좋겠군. 곧 ‘모임’도 열리니까.”
에릭의 표정이 일순 밝아졌다. 독단적인 편인 이안이 저에게 사업 이야기를 같이 논의한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게다가 ‘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역시 좋은 징조였다.
반면 이사벨의 표정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딩딩했다.
“그 늙은이들, 허세 섞인 작자들은 여자들이 하던 일을 가로채려고 할 거야.”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지금 돌아가는 게 소꿉놀이 수준이니까 그렇지. 제대로 된 병원은 아니잖니.”
“소꿉놀이라고? 이걸 소꿉놀이라고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말이나 제대로 하자. 칼 든 부랑자가 제멋대로 설치는 게 제대로 된 병원이야?”
“그만.”
이사벨과 에릭의 언쟁은 선대 백작부인의 노기등등한 발언으로 중단되었다.
“이사벨. 분란을 일으키지 마라. 시대가 바뀌었어도 너는 노팅엄 가문의 숙녀다.”
“어머니…”
“그리고 에릭. 내 아들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녀가 한 일을 폄하하는 발언은 삼가길 바란다.”
노부인의 눈에는 위엄있는 분노가 어려있었다. 에릭이 제 혈기를 반성하며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존속에 대한 건은 어른들께 맡기자꾸나. 우리의 사재로 꾸려왔지만…일이 이렇게 커졌으니 우리의 일만은 아니니 말이다.”
“그 사람들 뜻에 따르라고요? 싫어요.”
“이사벨. 말조심해라. 거기 홀츠먼도 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누가 오건 나랑 관계없는 일이라고.”
이사벨은 굉장히 화가 났는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이안은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전쟁은 남자들을 바꾼 것 이상으로 여자들 역시 바꾼 모양이었다. 이사벨의 혈기는 이제 진정으로 제 것을 지키려는 전투력으로 변해있었다. 그녀도 가만히 당하고 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잠시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고 한 여자를 생각했다.
재밌었지만, 알기 어렵던 매들린 로엔필드는, 완연한 성숙함으로 온유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이 변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전에 예쁜 소녀였다면, 지금은…
아름다운 여자.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팍의 흉터 깊숙한 곳에서 고통이 솟구쳤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고통이었다. 지금의 그가 추했기 때문에.
* * *
“이렇게 산책을 나가니까 좋네요.”
매들린이 이안과 같이 걸었다. 처음에 남자는 새로 맞춘 의족이 거추장스러운 듯 비틀거렸다. 그러나 차차 익숙해진 듯 제법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유럽 최고의 이탈리아인 의족 제작가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했으나 노팅엄 백작의 의족이라면 만드는 쪽이 영광이라며 빠르게도 만들어 보냈다.
좋은 의족이기도 하거니와 이안 노팅엄이 원래 운동신경이 좋아서였을 거다. 그는 빠르게 적응했다.
바쁜 일상이었지만 이렇게 느릿느릿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다.
둘은 들판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남자가 의족을 빼며 숨을 골랐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구릉 지대를 바라보고 작게 우는 새소리를 들었다.
“앞으로는 무엇을 하며 살겁니까.”
저 멀리 들꽃을 바라보던 이안이 나직이 질문했다. 매들린으로서는 솔직히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으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야죠.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으로.”
“…….”
남자는 그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고정되어있었다.
“로엔필드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별로요.”
매들린이 무릎을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그곳이 그립지는 않았다. 그때의 권태로운 삶보다 지금이 훨씬 보람차고 즐거운걸.
“확실히 지금이 더 즐거워 보이긴 하는군요.”
그가 살풋 웃자 흉터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름이 잡혔다.
“그래요? 일이 힘들긴 한데. 뭐 있는 게 젊음인데요. 아쉽지는 않아요.”
“그렇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자못 쓸쓸하게 들린 탓일까. 매들린이 고개를 그쪽으로 기울였다.
그나저나….
“아직 대답 안 했어요.”
프로포즈 말이에요. 매들린이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푸스스 웃었다. 이제 웃음도 제법 나올 정도로 남자는 회복해가고 있었다.
“…날씨가 좋군.”
“이럴 건가요, 정말?”
말 돌리는 게 너무 뻔해요! 매들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더 크게 입을 삐죽였다. 그런 매들린을 흘깃흘깃 쳐다보는 이안의 입꼬리가 완만한 호선을 그렸다.
둘은 가만히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했다.
* * *
잠시 바깥에서 바람을 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병원 앞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을 세바스천과 찰스 및 남자 사용인들이 필사적으로 막는 중이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신사분들.”
매들린이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들은 커다란 무언가를 이고 있었다. 그것이 카메라라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무슨 일인가 하여 앞서 나가는 매들린을 이안이 붙잡았다.
조명을 든 남자가 이안과 매들린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앗. 저기 있다!”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둘을 향해 달려오더니 예고도 없이 플래시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점멸하는 빛에 눈이 아파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솜 전선의 영웅 노팅엄 씨가 아니십니까?!”
“콜하스 중위 말고도 10명이 넘는 사람들을 무인 지대에서 데려왔다지요?”
“백작 가문의 후계자로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옆에 계신 숙녀는 약혼녀십니까?”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받기 시작하자 이안이 당황한 듯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매들린이 이안 앞에 나섰다.
“뭐 하는 짓이에요!”
뒤에서 세바스천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정말, 예의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펑.
-펑.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몇 개의 사진을 더 찍은 다음, 쏜살같이 다음 특종을 향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창백한 얼굴의 이안 노팅엄과 매들린이었다.
“…괜찮아요?”
매들린이 이안을 향해 물었다. 그녀가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플래시 때문인지 손이 차가웠고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미약한 쇼크 상태였다.
“정말 무례한 인간들이에요. 어느 신문사 소속이죠? 편집장한테 전화해야겠어요.”
매들린이 과장하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
“이안. 이안.”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매들린은 불안해졌다. 예배당에서의 발작을 떠올렸다. 그녀가 남자의 손을 꾹 잡았다.
“당신은 안전해요. 호흡에 집중해요.”
“…괜찮소.”
남자가 한참 뒤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등으로 식은땀을 닦았다. 그가 목발에 의지한 채로 안에 들어갈 때까지, 매들린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느꼈을 수치심까지, 그녀가 짊어질 순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