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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바뀐 상황들 (30/121)

29화. 바뀐 상황들

분명히 들었을 텐데. 남자는 미동하나 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 침묵했다.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은 조금 난폭했다. 

“동정심 때문에 미치기라도 한 거요?”

“…아니요.”

그가 고개를 푹, 떨궜다. 

“모르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거둔 적이 없어.”

그 말을 들은 매들린이 입꼬리를 당겨 따뜻하게 웃었다. 혹자가 보면 누구라도 마음을 녹일 만한 따뜻한 미소였다. 

이윽고 그녀 역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이마를 이안의 손등 위에 살풋 갖다 댔다. 

“그러면 한마디만 더 해도 돼요?”

“…….”

한없는 정적 속에서 둘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만이 났다. 

“나와 결혼할래요?”

책임지고 싶어요. 당신을. 

매들린은 그 말을 남자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했다. 뺨은 남자의 거친 손 등에 대고 눈은 감은 상태였다. 남자의 손목에서 정맥이 흐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나는 망가졌어.”

“그래도 살아갈 수 있어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남자가 망가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상처를 안고, 앞으로 나아간다. 

매들린은 남자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시야를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안 노팅엄이 채웠다.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눈가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 가엾게 훅 팬 볼. 남자다운 얼굴선.

그녀가 남자의 흉진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 위에 남자가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나를 사랑해서 청혼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도록 하지.”

지금의 나는 당신의 연민 한 부스러기라도 걸신들린 짐승처럼 먹어치울 수 있으니까. 이안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계속해서 나를 동정해주기만 한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줘. 연민해줘. 남자의 작은 목소리가 매들린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옥죄었다. 

* * *

청혼에 대한 답은 결국 유예되었다. 

또다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는 걸지도 몰라. 매들린은 채신머리없이 충동적으로 군 자신을 스스로 탓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답을 들려줄 때까지…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 차례야.’ 

그렇게 그녀가 서재를 빠져나오는 때였다. 갑자기 그녀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흠칫 놀라 뒤로 몸을 뺐지만, 그보다 눈앞의 남자가 더 빨랐다. 

에릭이 넘어지려는 매들린을 부축했다. 그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매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들린.”

“에릭.”

매들린이 조심스럽게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이거 참 우연이네요. 형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올라왔는데….”

그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아… 전… 그러니까…”

매들린이 으슥한 밤중에 제 형의 방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에릭은 딱히 괘념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형님의 상태를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아요. 매들린.” 

에릭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말을 내뱉는 남자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다.

매들린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릭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 잘못은 없어요. 과한 부채의식…”

그가 갑자기 문을 힐끔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까 형님에 대해서 죄의식 같은 건 느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전쟁을 어찌하겠습니까. 더더군다나 당신은 그의 뭣도 아니었잖습니까. 약혼자도, 결혼 상대도.”

매들린의 올라간 입꼬리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차가운 물이 전신에 쏟아진 기분이었다. 

“…네.”

매들린이 고개를 연신 끄덕인 뒤 자리를 떴다. 에릭 노팅엄이 서재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형님. 접니다.”

* * *

에릭은 살면서 한 번도 큰형을 넘어서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좋은 것이 장남의 몫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딱히 부당함을 느끼거나 불편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의 장자상속법은 엉터리지만 말이다. 실로, 그동안 곁에서 지켜본 이안 노팅엄은 훌륭한 신사의 전형이었으니까.

여유로움, 남자다움, 비상한 사업적 두뇌까지. 협잡마저 유능하고 우아하게 해내는 형을 보노라면, 자신은 차라리 광대 역할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사람 새끼가 아닌가. 나.” 

에릭이 담배를 태웠다. 병원에서 멀리 나간 곳이었다. 구릉지와 황야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형을 다시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지금까지 영원히 강대할 줄 알았던 산 하나가 반파가 되어 나타난 것 같았다. 절뚝이며 사람들 손길 하나에도 벌벌 떠는 이안 노팅엄이라니.

이상했다. 납득하기 어려웠다.

부정하고 싶었다. 내 형은 저렇지 않다고. 저렇게. 저렇게….

“뒈지는 것보다는 사는 게 언제나 나아. 형님이 돌아온 건 좋은 일이었어.” 

그는 짐짓 소리 내어 말해봤으나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 * *

매들린이 환자의 붕대를 갈았다.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지는 환자를 바라보며 심장이 작게 두근거리는 것은, 왜일까. 알 수 없었다. 그녀도 드디어 나이팅게일 선언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일까. 

“흠흠.”

뒤에서 알링턴이 헛기침하는 바람에 재빨리 처치를 마무리했다. 하긴 넋 놓고 생각에 빠질 시간도 없었다. 

조금 후에는 병원에서 주최하는 테니스 경기도 있을 예정이었다.

환자들이 쉬는 시간 때마다 가능한 운동을 하게 하는 건 병원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언제나 주위에서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환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분위기를 돋울 겸 소정의 상금을 내걸고 대회를 연 것이다. 

“의사 양반, 간호사 양반. 이따 시합 때 날 응원하는 겁니다?”

붕대를 갈아준 환자가 큰소리로 떵떵거렸다. 

“안 돼요. 선생님은 출전금지입니다.”

알링턴이 냉랭하게 잘라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약간의 애정 어린 잔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니. 봐달라니까? 내가 왕년에, 연대 격투기 챔피언이었는데!”

“격투기랑 테니스랑 같은 건 아니잖아요.”

매들린이 피식 비집어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알링턴이 환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출.전.금.지.입니다. 테니스 라켓 금지라고요.”

알링턴이 곧바로 몸을 돌리고 다음 환자에게로 갔다. 매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 환자는 존이었다. 그는 부쩍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가족들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은 점점 우울증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오늘의 그는 활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가 알링턴과 매들린을 보며 농을 던졌다. 

“선남선녀로군.”

“…….”

매들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무언으로 나무랐다. 여자랑 남자랑 같이 일한다고 둘을 엮는 건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알링턴은 딱히 뭐라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존의 몸 이곳저곳을 먼저 살폈다. 

“기억은 어떻습니까.”

“글쎄. ‘불탄 남자’가 기억을 찾아서 뭐할까 싶소.”

“그렇지 않아요.”

매들린이 더더욱 인상을 썼다. 

‘불탄 남자’는 환자들 사이에서 도는 존의 별명이었다. 비행기 조종사였다더라. 비행기를 몰다가 엔진에 불이 나서 탔다더라. 자살하려고 총구를 당겼는데 총을 놓쳤고 그대로 비행기에 불이 붙었다더라.

소문은 점점 정교해지고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으나 존은 딱히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 보니 아주 무심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선생님. 떠오른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에게 말씀해주세요.”

알링턴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가 수첩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으아아악!” 

병실에서 큰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방향에는 칼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칼을 든 남자. 매들린의 사고가 정지했다. 칼은 어디에서 왔으며 남자는 누구인가.

아. 기억이 났다. 매들린은 그의 이름을 안다. 데이비드 크레이머 상병. 웨섹스 출신이고…. 그러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일이 일어났다.

“으악!!”

별안간 남자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자기 자신을 찌르려고 팔을 치켜들었다. 매들린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남자를 막아야 한다는 본능이 이성보다 앞섰다. 그녀가 달려들자 데이비드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알링턴이 재빨리 매들린을 밀친 후, 남자의 팔을 가공할 만한 악력으로 내려쳤다. 날아간 칼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탁탁탁.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칼을 놓친 남자가 벌벌 떠는 사이에 알링턴이 그를 제압했다.

“칼은 어디에서 구했나.” 

알링턴이 서늘하게 읊조렸다. 남자가 덜덜 떨며 중언부언했다. 알링턴이 미간을 좁혔다.

“술 냄새도 나는군.”

“…나는…나는…, 여기서… 나갈 거야….”

뒤늦게 달려온 다른 직원들이 남자를 데려갔다. 알링턴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웠다.

매들린이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칼 든 사람한테 그렇게 달려들지 마세요.”

그가 단언했다. 매들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위를 정리했다. 웅성거리는 환자들을 돌아보며 알링턴이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젠장. 병원에 누가 술을 들여온 거야.

“…멋지구만. 의사 선생. 군대에서 배웠나.”

병상에 누워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본 존만이 너스레를 떨었다. 알링턴이 그를 쏘아보았다.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는 눈초리였다.

알링턴이 화난 발걸음으로 사라지자 홀로 남은 매들린이 환자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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