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기회를 줄 수 있나요
이안 노팅엄을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색할까? 이상할까? 슬플까, 아니면 기쁠까.
어떤 감정이 들지 알 수 없었다.
매들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옛날보다 말랐다. 젖살이 내리고 전체적으로 쓸쓸한 분위기가 풍겼다. 지난 생과는 다른 분위기가 제 얼굴에 풍기는 것 같아 스스로가 낯설었다.
매들린은 늘 하던 대로 머리를 질끈 묶어 올렸다. 묶어 올리는 손이 자꾸만 떨려서 핀을 몇 번이고 놓쳤다. 미세하게 경련하는 손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보다 오래 준비를 한 뒤 방을 나섰다. 빳빳하게 다린 순백의 간호복을 입었다. 환자들을 둘러본 뒤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저택의 사용인들과 병원 직원들이 일제히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집사장 세바스천이 병실을 둘러보던 매들린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손발을 휘적이며 갈피를 못 잡았다.
“아가씨, 저… 그게…”
“저도 걱정돼요.”
매들린의 차분한 표정을 바라본 세바스천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그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십니다.”
“내려가야겠네요. 그렇죠?”
“저… 그…”
매들린이 남자의 표정을 자세히 응시했다. 파리한 얼굴, 덜덜 떨리는 손끝.
“무서워요. 저도 무서워요.”
“…아가씨.”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바로 그분일 거예요.”
“…….”
세바스천이 고개를 떨궜다. 무릇 평생을 백작가에 헌신을 다한 남자는 동요하고 있었다. 매들린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녀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지었다.
“같이 마중하러 나가요.”
* * *
양옆으로 늘어선 사용인들과 추가된 병원 고용인들 그리고 객식구들까지 모두 백작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숨소리도 나지 않는 적요 속에서 얼마 후, 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들린의 옆에서 이사벨이 숨을 멈췄다. 에릭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느덧 자동차가 가까이서 멈췄다. 운전사는 군인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내려오더니 경례했다.
그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자동차의 뒷문으로 거무스름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것이 군복을 입은 남자라는 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비척이는 형체가 갑자기 쓰러지자 운전병이 그것을 부축하느라 휘청였다.
보다 못한 에릭이 달려나가려 하자, 이사벨이 한쪽 팔을 들어 막았다. 정적이 모두를 감싸는 동안 뒷좌석에서 남자는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그 모습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이안 노팅엄이 있었다. 장교복을 입은 남자는, 한쪽 다리가 없었다. 매들린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얼굴의 반쪽은 화상 흉터가 나 있었으며 얼굴은 몹시도 창백했다. 쇠꼬챙이 같은 몸은 장대 같았다. 사람 같지 않은, 음울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섰다. 매들린도, 식구들도, 사용인들도, 다른 사람들도 침묵한 채로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오래간만의 해후.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이 왔음을 직감하는 사람들의 분위기. 숨 막히는 정적.
이안이 비척거리며 사람들에게로 다가왔다. 자신을 부축하려는 운전병을 뿌리치고 안간힘을 쓰며 다가왔다.
이사벨과 에릭이, 선대 백작부인이 뛰쳐나갔고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고통스러운 눈물로 가득한 해후가 끝났다. 이안이 비틀거리며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바들바들 떠는 세바스천에게 인사를 하고 찰스와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목례했다.
그리고 그가 매들린을 바라봤다.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지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오랜만이에요. 이안.”
한참을 마른 입술을 달싹이는 이안 대신 매들린이 먼저 말했다. 그녀가 들썩이는 속을 숨긴 채로 단정하게 말했다.
“…매들린.”
이안이 고개를 떨궜다. 남자의 속에서 들끓을 감정을 어찌 알까. 열패감, 낙오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온갖 끔찍한 감정들이 그 안에서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남자가 살짝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듯 몸을 숙였다. 에릭이 재빨리 형을 부축했으나 이안이 그보다 먼저 몸을 곧추세웠다. 구부정하게 있어도 원체 큰 몸이었다.
그가 결국에는 조금씩 매들린에게 다가왔다. 매들린은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나에게 와요. 이안. 기다렸어요. 당신이 이렇게 내 앞에 있기를 바랐어요. 이제서야 왜인지 알았어요. 이리 와요. 내 몫의 죄책감.’
어느덧 둘이 거리를 좁히자 매들린이 목발을 붙잡은 이안의 거친 손등을 쓰다듬었다.
매들린이 눈을 찌푸렸다. 사실은 울음을 참기 위해서. 남자보다 먼저 울기 싫었으니까. 그녀가 남자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제야 그녀는 편안했다.
* * *
남자가 짐을 풀고 식구들과 회포를 푸는 사이 매들린은 여느 때와 같이 일을 했다. 환자들은 살짝 동요한 눈치였다. 가주가 돌아왔으니 병원도 다시 그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다른 병원으로 옮기는 건 싫다며 훌쩍이는 환자도 있을 정도였다. 매들린은 거기에 대고 뭐라 확답할 수 없었다. 이안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그녀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
부디, 조금만 더 시간을 내어주기를. 그녀는 바랐다.
그녀가 이안 노팅엄을 다시 만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여행으로 몸이 지친 모양인지 이안은 자신의 방 밖에서 나오지 않았다. 매들린 역시 그를 부러 찾아가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다. 집이 병원으로 바뀐 것도 어색할 테고 보기 싫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보기 싫을 수도 있지.’
입이 썼으나 딱히 충격적인 진술은 아니었다. 자신은 이안의 그 무엇도 아니었으니까.
둘이 다시 만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밤에 환자들의 동태를 체크하던 매들린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그와 마주친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인기척이 워낙 없어서 유령인 줄 알았다. 그녀가 등불을 높게 올리자 남자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안?”
“…….”
매들린이 황급히 등불을 다시 내렸다.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이안이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산,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밤에 불도 없이 돌아다녔다가는 떨어질 수 있어요.”
낙상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요.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요. 병원 물건들도 있어서 좀 어수선하다구요. 같이 가요.”
그 말을 들은 이안이 침묵했다. 둘 사이를 침침한 등불과 침묵만이 감싸 안았다.
“솔직히 말해…”
등불에 비친 이안의 모습은 무척 야위고 지쳐 보여서, 매들린의 가슴이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당신이 밉군.”
그의 건조한 목소리에 매들린이 몸을 떨었다.
“나는….”
이안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그 역시 몸을 떨고 있었다. 매들린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등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가 이안의 어깨를 잡았다.
“미워해도 괜찮아요. 마음껏 나를 미워해도 괜찮아요.”
그녀가 남자의 품 안에 조심스럽게 안겼다. 아니, 그보다는 몸을 포갰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감싸 안은 남자의 몸이 간헐적으로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다쳤을지언정 여전히 강건하고 큰 몸이었다. 매들린이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박동과 남자의 박동이 어긋났다. 어쩌면 자신과 그는 전생에서도 이곳의 생에서도 영원히 이처럼 어긋날 운명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라니.
그러나 이대로 엇갈린 채로 계속할 수 있다면….
* * *
이안은 거의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저택이 병원으로 운영되는 것을 당분간 허용할 모양이었다.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병원 사람들은 이를 약소하게나마 축하했으나 매들린은 덤덤했다. 어쩐지 축하할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안을 먼저 찾아갔다. 지난 생에서는 먼저 다가가지 못했으니까 이번에라도 먼저 손을 내밀고 싶었다.
‘급작스럽게는 안 돼. 천천히….’
매들린이 살풋 미소 지으며 이안의 서재로 들어왔다. 온종일 강도 높은 노동을 한 터라 몸이 욱신거렸지만 피곤하기보다는 정신이 또렷했다.
그녀가 서재 문을 열자, 흠칫, 이안의 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괜히 심장이 덜그럭거렸다.
매들린이 천천히 문을 열고 다가오자 이안이 앉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서 그녀를 바라봤다.
“안심해요. 나예요.”
“…하…”
이안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렸지만 보기 나쁘지는 않았다. 보기 나쁘다, 좋다, 판단할 이유도 없었다.
왜일까. 왜 이전에는 저 모습이 그렇게 보기 싫었을까. 어쩌면 뒤틀린 것은 매들린의 내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서서히 남자에게로 바투 다가온 그녀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이안이 청혼할 때 취했던 포즈 같았다.
그녀가 속삭였다.
“내가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언제라도 나갈게요.”
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무언의 아니, 라는 대답이 들려오는 것 같아 매들린이 미소를 지었다.
극도의 열에 의해 녹은 한쪽 얼굴이었다. 매들린은 그 방향을 향해 앉아있었다. 그녀는 이안의 얼굴을 오롯이 자신의 눈에 담았다.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내게 너무 잔인하게 구는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마른 땅처럼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은 걸 비웃으려고 여기 남은 건지. 나를 찾아오는 건지….”
그 말을 하는 이안의 표정은 알기 어려웠다. 슬픈 걸까, 냉소하는 걸까.
그가 하. 단발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애써 미운 말을 내뱉는 남자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매들린이 이안의 손 한쪽을 잡았다. 굳은살과 흉터가 이리저리 난 손이었다.
남자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포개자 남자가 굳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나요?”
한때는 무섭게만 보였던 얼굴인데. 매들린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