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소식
매들린은 창밖 지평선으로 녹아드는 노을을 바라봤다. 자연의 무심할 정도의 평온함이 도리어 그녀의 가슴을 옥죄는듯했다.
오늘 그녀는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한번은 위험할 뻔했는데 알링턴이 막아줬다. 그는 냉정한 얼굴로 매들린을 일별한 후, 한숨을 쉬었다.
“지친 것 같은데, 쉬시죠.”
“그럴 순 없어요.”
“쉬세요. 로엔필드 양. 무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하필이면 걱정해주는 게 알링턴이어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이안이 편지를 쓰지 않아서, 그가 다쳤을 것 같아서 불안한 건지도.
게다가 솜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매들린이 화가 잔뜩 나 응수하자 알링턴이 한숨을 쉬었다.
“요 며칠, 이상하게 굴고 계시는군요.”
“그럴 리가요.”
“단적으로 말해서 방해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알링턴이 처음으로 얼굴을 붉혔다. 적잖이 성이 난 모양이었다.
“그래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자 알링턴이 다급하게 매들린을 붙잡았다.
“내가 한 말,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나는 그저 당신이 무리하지 않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매들린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방해가 되는 게 사실이라면 물러나야겠죠.”
그녀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알링턴의 말이 맞았다. 잔 실수가 늘어나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마음의 평정을 되찾지 않으면 안 돼. 그녀가 그렇게 결심하고 병실을 빠져나오는 때였다. 창백한 얼굴의 이사벨이 그녀 쪽으로 뛰어왔다.
“매들린, 매들린….”
“이사벨, 무슨 일이에요?”
“오빠가, 이안 오빠가…”
그녀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
무엇인가를 예감한 듯 매들린의 얼굴 역시 파리해졌다. 그녀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이사벨이 든 쪽지를 받아들었다. 이안 노팅엄이 중상을 입고 지금 입원해있다는 짤막한 단신이었다.
중상. 그 단어 하나에 담긴 여러 가지 함의들에 매들린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째서. 결국에는.
그녀가 보낸 편지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것만으로는 한 남자의 불운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무력한 편지쪼가리, 글줄로 무엇을 달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였다.
* * *
1918.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다가왔다. 병원은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속속들이 귀환하는 병사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이 영영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왔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비단 돌아오는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기다린 사람들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서로 변해버린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하지만 믿어야 해. 매들린은 기다렸다. 이안 노팅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병원에서 일하다 창문 밖으로 대로를 보며 기다렸다. 적어도 살아있다.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머니.”
돌아온 것은 에릭이었다.
후방에서 또 전방에서 두루 작전을 수행하고 돌아온 그는 부쩍 어른스러운 태가 났다. 키도 컸고 젖살도 빠졌으며 완연한 어른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병원으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용인들이 귀환한 차남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에릭은 자신의 어머니인 선대 백작부인을 꼭 안아준 다음, 이사벨에게 미소지었다.
“어른스러워졌네, 오빠.”
이사벨이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
에릭의 시선이 방황했다.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릭이 갑자기 이사벨을 와락, 힘주어 안았다.
“동생아. 보고 싶었다.”
“빨리도 말한다.”
노팅엄 일가 간의 감동적인 해후를 끝내고 난 뒤였다. 에릭이 사용인들에게도 하나하나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그 뒤에 병원 직원들에게도 인사하며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하더니 매들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에릭 노팅엄은 이안과 같은 흑발이지만 어쩐지 부드러운 인상의 미청년이었다. 비슷하게 생겼으나 안광과 얼굴선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좀 더 반듯하고 정돈된 느낌. 혈기왕성한 청년의 에너지 역시 완연했다.
매들린은 에릭을 향해 마주 웃었다. 속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으나 반가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전생에서는 유명을 달리했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매들린 자신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전 삶이 반복되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로엔필드 양. 오랜만입니다.”
에릭이 얼굴을 붉히며 인사했다. 매들린이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그려 보였다. 그것에 쓸쓸함이 녹아있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 * *
에릭이 돌아온 뒤로 저택에는 활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에릭은 백작부인을 열심히 도왔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가업이 정상화되면 케임브리지에 돌아가 학업을 마칠 예정이라 했다.
그런 에릭을 보는 매들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너무나 죄스러운 일이지만 자꾸 다른 남자를 겹쳐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안은 괜찮을까.
이안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얼마나 다쳤을까.
언제, 언제쯤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으면서도 쉬이 티를 낼 수 없었다. 매들린 자신에게는 이안 노팅엄을 걱정할 어떤 권리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돌아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릴 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느덧 뉘엿뉘엿 노을이 지고, 매들린은 존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근래에 존은 퍽 외로워했고 그의 말 상대를 해줄 사람은 매들린뿐이었다. 그녀 역시 그 역할이 싫진 않았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매들린은 자신의 이야기를 약간의 각색(계단에서 떨어졌는데 과거였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빼고)을 곁들어 풀어놓았다.
존 역시 제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부분 단편적인 기억에 불과했지만, 매들린은 그의 진술을 토대로 밤잠을 아껴가며 기록하고 자료를 찾아가며 그의 집을 수소문했다.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 법했다. 미국에 있는 인명 편람을 토대로 일일이 일치되는 집안을 찾고 있었다. 동부부터 서부까지 국토가 참 넓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짚단에서 바늘 찾기란 생각이 들었다.
전보를 쳐도 답장이 오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존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그가 알아서 부담스러울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그날도 한참 존이 이야기하는 것을 받아적고 있었다. 매들린이 열심히 노트에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을 본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만 해도 될 것 같군요. 굳이 적지 마세요.”
“존.”
“어차피 내 가족들은 나를 잊은 것 같아요.”
그가 색색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매들린이 정색했다.
“아니에요. 잊은 게 틀림없어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존. 걱정 말고….”
위로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듯 존이 눈을 감았다. 그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매들린. 새로 온 젊은 친구 말입니다.”
“젊은 친구…? 에릭이요?”
어느덧 매들린은 에릭을 이름으로 부를 만큼의 친분이 생겼다. 에릭은 원체 붙임성이 좋았고 밝았다. 수심에 빠진 매들린마저 살짝 미소짓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이가 퍽 당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더군요.”
“네?”
그만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숨길 생각 말아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흣…”
“정말 아니에요. 그리고 존. 안정을 더 취하세요.”
매들린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존의 자세를 바꿔준 뒤 자리를 털고 나갔다.
에릭이 자신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굳이 따지자면 막 전쟁에서 돌아온 터라 오랜만에 보는 이성에게 호감을 느낄 수는 있었으나 그것 역시 일시적일 터였다.
게다가 매들린은 이안의 청혼을 거절한 위인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관심을 둘 리가. 매들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일은 내일의 일을 해야 한다.
* * *
매들린이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빗고 틀어올려 묶었다. 찬물로 세수하고 난 다음 아침을 먹고, 그다음부터 정신없이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환자들을 돌보다 보면 점심시간,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먹었다.
전쟁이 끝나간다. 몇 개의 지리한 협상과 행정절차를 마치고 나면 완전히 끝이었다. 물론 재활병원은 계속 운영될 것이다. 군인들의 상처는 그보다 더디게 나으니까.
매들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매들린이 설거지를 할 차례가 아니었다. 그녀는 접시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식사 자리를 벗어났다. 얼마간의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일까 싶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쟁그랑거리는 소리와 목청을 높이는 소리, 달뜬 사람들의 얼굴들. 매들린이 눈썹을 찡그리며 사태를 파악하려는 때, 이사벨이 그녀에게 바투 다가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매들린, 이안이 돌아온대.”
“…어?”
“이안이 돌아온다고!”
이사벨이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그녀가 목이 메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가녀린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매들린이 그런 여자를 꼭 안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옅은 소독약 냄새. 매들린의 눈물이 이사벨의 옷깃을 축축하게 물들였다.
이번에도 그녀는 눈물을 부인할 터였다. 그냥, 소독약 때문에 눈이 매워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