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저갱 속으로
노팅엄 재활병원은 어느덧 환자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재활병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으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간단한 병들이었다. 손과 발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영양 상태를 회복시키면 낫는 병에 걸린 병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면서 갈수록 심각한 경우들이 생겨났다.
사지가 없거나 전신에 화상을 입거나, 정신적으로 큰 외상을 입은 병사들이 늘어났다. 더 심각한 것은,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처치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의학 기술의 한계는 여실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사람들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활달하던 이사벨까지 말수가 적어질 정도였다. 알링턴은 차분했으나 그 역시 동요감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매들린이 가장 침착한 편이었다. 이안의 편지로 적잖이 흔들린 상태였으나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죽였다. 숨겼다.
그러나 밤에는 그녀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이게 되었다. 마음속에서부터 격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정말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앞으로의 일들, 아버지까지. 마지막에는 항상 사고가 이안으로 돌아왔다.
잡념을 품으면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라운딩을 마치려던 차였다.
“간호사…, 간호사…”
갑자기 구석에서 한 환자가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매들린이 고개를 돌리자 목소리가 나온 곳은 환자 X, 아니, 존의 쪽이었다. 매들린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에는 끙끙거리고 있는 존이 있었다.
“존. 괜찮아요?”
“…물…물 좀 주시오.”
매들린이 재빨리 컵에다 물을 채웠다. 그녀가 깔때기를 통해 남자의 목을 축여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존이 끙끙거리자, 매들린이 그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요?”
걱정되는 마음에 재차 물었다.
온몸이 녹은 남자가 눈을 깜빡이더니 읊조렸다.
“꿈을… 꿈을 꿨소.”
“……!”
설마. 매들린이 더 가까이 남자에게로 몸을 숙였다. 존이 떠듬떠듬 말을 이어나갔다.
“…열차…에 탄… 어머니와 내가…”
“더 말씀해보세요.”
매들린이 침착하게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허스트…. 허스트란 이름이 기억나오….”
허스트. 이름인가? 당연히 매들린이 알지 못하는 성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하게 계속해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는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상 한 사람의 삶 이야기나 다름없이 장황했다.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탄 이야기, 아버지가 사준 사탕, 사랑하던 연인과의 한때,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전우들…. 하나의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의 일생이 회전목마에 탄 사람들의 모습처럼 빙글빙글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다 꿈일지도 모르지.”
남자가 다시 목이 마른 듯 끙끙거렸다. 매들린이 다시 목을 축여주었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어둠 속에서 기억을 잃은 남자와, 아무도 모르는 기억을 가진 여자가 단둘이 앉아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난 당신 말을 믿어요.”
매들린이 천천히 답했다. 남자의 녹아버린 얼굴이 희미한 미소로 변했다.
“당신…이름이…매들린…이었나.”
“네.”
매들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물어왔다.
“내 꿈 이야기를 들려줬으니, 이제 당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
무엇에 홀린 것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마음과 감정이 솟아올랐다.
매들린이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남자와 결혼했었노라고. 넓고 슬픈 저택에서 장미를 키우고, 영화를 보고, 개를 돌보고… 남자를 미워했었다고. 남자는 남몰래 자신의 장미를 꺾는 취미가 있었다고. 그 역시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는 잘 모르겠다고.
배신도 했고, 증오도 했고, 연민도 했는데 결국엔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망쳐버렸다고. 말했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곧 다른 간호사가 들어올 시간이었다.
‘자고 있나.’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존을 보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존이 말해준 이야기를 수첩에다 옮겨적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일어나서 등을 돌리자 등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역시…믿소. 당신 말을 믿소.”
매들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잘 자요.
* * *
날이 밝아진 새벽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의 기관총사수들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흩어지는 연합군들이었다. 그나마 물량 공세를 퍼붓자 승기가 눈앞에 잡히는듯했다.
그러나 저항은 완강했다. 독일군들은 수류탄을 던져댔고 폭탄이 여기저기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전장은 지옥도가 되었다.
아군이 쏜 포탄인지, 적군이 쏜 포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당장의 목표를 탈환하는-.
그때였다. -펑- 소리가 들리더니 엄청나게 큰불이 눈앞에 붙기 시작했다. 독일군 화약고에 불이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조지…!
앞의 소대는 조지 콜하스가 속해있는 곳이었다. 그쪽의 병사들이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독일군들의 총포 아래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탈환은 고사하고 전멸을 피하기조차 어려웠다. 전선이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다.
이안이 목청을 높였다.
“지금 후퇴하는 아군들을 전원 엄호한다!”
참호로 물러나 조지가 이끄는 소대가 무사히 퇴각할 때까지 돕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창 엄호사격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사히 탈출한 아군 중 하나가 급박하게 이안에게 달려왔다.
“중위님, 중위님. 큰일입니다!”
“빨리 말하게.”
“지금 콜하스 중위께서 쓰러져서-.”
“뭐라고?”
이안이 큰소리를 내자 아군 병사가 말을 더듬었다.
“같이 퇴각을 하던 중,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아마도 독일군의 지뢰에 당하신 것 같습니다!”
“…….”
이안은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조지 콜하스가 무인 지대에 버려져 있다. 물론 눈앞의 사병을 책망할 순 없었다. 공황상태에서 상관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파악하겠나.
이안이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가 젠킨스 상사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 그때까지 철저히 아군의 움직임을 제한할 것. 이 참호를 벗어나지 않고 수동적으로 응전하라.”
“중위님?”
젠크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부터 콜하스 중위를 무사히 탈환해오겠다.”
“저도 가겠습니다!”
“…안 돼.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만한 곳이 필요하다.”
“제가 가겠습니다.”
눈앞에 있는 병사가 자청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와 같이 간다. 콜하스 중위가 있는 곳을 기억하겠지.”
병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짓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았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해봤을 때, 완전히 허황된 계획은 아니었다. 일단 아군 부대가 지원해주고 있는 판국이었고, 병사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조지를 살려야 한다. 중대장인 그가 없어지면 대대에 손해가 막심할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친우였다.
그때였다.
“살려줘! 살려줘!!!”
포탄과 총포의 아수라장 너머에서 조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처롭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목소리를 듣자 이안은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지금 간다.”
이안이 총을 든 채로 몸을 낮추었다. 그대로 참호를 벗어나자마자 그에게로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 * *
이안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조지를 내버려 둬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려달라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며 조지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커다란 나무 뒤에서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펑! 펑! 좌우로 포탄이 날아왔다.
날아오는 총알과 포탄을 피한다는 의식도 없이 정신없이 갔다. 처음에는 몸을 낮추고 뛰어가다가 나중에는 기어갔다. 얼굴에 진흙과 오물이 잔뜩 묻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안이 간신히 피를 흘리는 장교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조지 콜하스가 맞았다. 이마가 찢어졌는지 온통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조지. 조지. 정신 차려.”
“…이안.”
“움직일 수 있겠나. 빨리 가야 해.”
이안이 조지의 어깨를 흔들었다. 다행히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고 탈진한 것 같았다. 이안이 옆에 엎드려있는 병사에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조지. 내게 업혀.”
병사가 서둘러 조지를 이안의 등 위로 옮겼다.
포화가 쏟아지는 한복판으로 질주했다.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몰두한 상태였다. 극도의 흥분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살려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러다가 몇 번을 바닥에 처박혔는지도 모르겠다. 세지 않았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고, 넘어지면 또다시 일어서고, 이름 모를 병사는 이미 눈앞에 없었다.
먼저 갔나. 그렇다면 다행이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앞으로, 앞으로 무인 지대를 헤쳐나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중위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조지. 조지, 우린 살 거야.
-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이안은 온몸이 찢기는 고통을 느꼈다. 몸이 떨리더니 만 갈래로 찢어졌다.
그의 의식은 잠시 명멸했고 이내 무한한 고통의 무저갱 속으로 침잠했다.
“매들린…. 당신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소. 미안하오.”
어째서, 가장 마지막의 순간에 그 여자가 생각났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