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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미련한 (26/121)

25화. 미련한

금발에 냉정한 푸른색 눈. 이지적이고 차분한 입매. 매들린이 소스라치며 알링턴의 손에서 제 얼굴을 떨어뜨렸다. 알링턴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진찰입니다. 안심하시죠.”

“그, 그건…”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코넬 알링턴 박사입니다. 정신생리학 전문이죠.”

그가 이사벨을 흘깃 돌아봤다.

“매들린, 앞으로 같이 일하실 분이에요. 알링턴 박사님. 매들린이 오늘 상태가 좋지 않네요.” 

“네…, 안녕하세요….”

매들린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명이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살아있는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양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일단 푹 쉬며 안정을 취하면 될 것 같군요. 해열제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알링턴이 매들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일말의 동요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핀셋으로 표본을 관찰하는 곤충학자 같은 차분함이 있었다. 

“네. 의사 선생님. 일단 이곳 병원부터 다 소개해드릴게요.” 

이사벨이 매들린을 바라보며 윙크했다. 

‘푹 쉬어요.’ 그녀가 입 모양으로 매들린에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매들린의 내면은 폭격을 맞은 듯 공황상태였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과거는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것인가.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보다 괴로운 희극으로. 

두통이 재발했다. 

* * *

매들린은 알링턴에게 따졌다. 처음에는 온건하게, 나중에는 소리를 지르면서까지. 알링턴은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최신 생물학 심리학 이론들을 거론하며 매들린의 입을 다물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작은 다시 차도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매들린은 제 우려가 바보 같은 것이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링턴이 넌지시 책을 건네왔다. 

“백작 각하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책입니다.”

<신경생리학의 지평>

“…부인께서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괜찮아요. 저는 대학교도 가지 않았고 사실상 무지렁이인데요.”

매들린이 자신감 없이 얼버무렸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박사가 일견 무례한 투로 말했다.

“알고 싶으면 배우면 됩니다. 백작부인께서는 적어도 제게 질문하는 용기는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강퍅한 말투와 달리 퍽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백작은 종내에는 활기를 되찾았지만, 어쩐지 그는 그녀가 봐왔던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은 무심해졌다고 해야 할까. 

거침없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메말라갔다. 사용인들에게도 박해졌다. 

매들린의 숨통이 점점 조여왔다. 차라리 이전의 고요와 침묵이 나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백작은 매들린을 더더욱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박사는 매들린에게 제안을 던졌다. 

“어때요, 날 전혀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도 상관없어요. 일종의 복수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를 떠나서, 공부를 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나와 함께라면,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에서. 원하는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해드리죠.

미끼였다. 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니까 알링턴 박사를 전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매들린은 그것을…. 

* * *

“하지만, 그이는 결국…”

매들린이 아픈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래도, 그때 이야기를 해야 했었어.” 

매들린이 혼잣말했다.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야.”

열에 들떠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교재를 보다가, 이안의 편지를 읽다가 했다. 그리고 그렇게 책상에 엎어져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 * *

감기가 나은 매들린은 더욱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알링턴과는 최대한 사무적인 거리를 유지했다. 

다행히도 그 역시 수선을 떠는 매들린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좀 열심히 일하는 간호사쯤이라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저 냉정하고 차분하게 환자들의 동태를 살필 뿐이었다. 

아주 이른 새벽이었다. 매들린은 그날도 환자들의 동태를 체크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등불을 든 천사와 거리는 멀지만, 적어도 등불을 든 번견 정도는 되었다. 죽음이라는 불청객으로부터 환자들을 지키는 케르베로스. 매들린은 등불이 환자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며 그들의 용태를 리스트에 기입해나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끄으응….”

저 먼 구석에서 소리가 났다. 환자가 악몽을 꾸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끓는 듯한 거친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매들린이 재빨리 구석으로 다가갔다. 

환자 X가 눈을 뜨고 매들린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로웰… 로웰… 아…. 나는…”

‘미국 억양이야.’

매들린이 재빨리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남자 가까이에 붙어 귀를 기울였다. 천근 같은 침묵이 둘 사이를 감쌌다. 

“가지…마시…오.”

꺼져가는 촛불처럼 미약한 목소리였다. 매들린의 심장이 철렁였다.

* * *

남자의 이름은 존이었다. 성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격렬한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증일지도 몰랐다. 

환자를 진찰한 알링턴은 침착했다. 그는 남자의 기억상실증이 일시적인 것이며 안정을 취하면 곧 나아질 거라 했다. 

‘물론 그게 언제냐는 게 문제겠지만.’ 단서를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시적인…. 매들린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 말을 그대로 환자에게 해주었다. 

‘나와 저 사람의 차이는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겪고 있는 것 역시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일지도 몰랐다. 방향성만 다를 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계속해서 다시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환자 X는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영원히 기억나지 않으면 어떡하죠?”

“괜찮아질 거예요. 정말요.”

매들린은 힘겹게 마주 미소지었다.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말이었다. 

* * *

매들린은 그 이후로 쉼 없이 매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매일 부칠 수는 없었으나 보낼 수 있는 한 보냈다. 

편지를 보내지 말라니. 보내지 않을 수 없게 했으면서. 

도저히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남자를 그 지옥도에서, 화마 속에서 홀로 있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당신이 스스로를 저버려도, 난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 외침은 연약한 것이었다. 무척이나 연약하고 헛된 것이었다. 

* * *

전쟁이 막바지로 향하는지, 절정에 다다랐는지, 아니면 막 시작했는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안 노팅엄은 참호의 장교 구역에 기대어 섰다. 손에 쥔 편지지가 바스러질까 봐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한 손에 쥔 담배가 속절없이 타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매들린에게서 온 편지 4장. 

한숨이 절로 나온다. 미련한 여자. 

매들린 로엔필드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이상하고 미련한 여자였다.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주제에 전쟁에 가지 말라며 붙잡더니, 이제는 기약 없는 편지까지 보낸다. 

무사히 도착하면 그때 말해주리라. 

당신은 정말 멍청한 여자라고. 그리고 안아줄 것이다. 그녀를 꼭 안고….

그런 미래를 상상하는 이안 노팅엄이야말로 가장 미련한 사람일 터였다. 

이안은 한숨을 쉬었다. 편지에 쓴 이야기들은 진심이었다. 매들린의 편지는 위험했다. 계속 헛된 희망을 품게 했다. 

다시 돌아가 그녀에게 두 번째로 청혼하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망상이었다. 

사지 성하게 돌아가면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까. 그는 계속해서 가정법을 덧붙이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귀족이라면 마땅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장교라면 사병들의 목숨 앞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자꾸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고결하지 않았다. 신사라기보다는 겁쟁이처럼 굴고 있었다. 

“…….”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편지지를 품 안에 넣었다. 가슴팍에 총알을 맞으면 피에 젖을 것이다. 그래도 곁에 두고 싶었다. 

이제 곧 전투가 재개될 예정이었다. 지도부가 목표하는 고지 탈환이 멀지 않았다. 몇만 명을 희생한 전투의 목표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한 목표였다. 그러나 목표는 목표였다. 

이안은 참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청명한 프랑스 하늘….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평화 상태, 그 자체였다. 

인간은 이리도 비참한데 자연은 이토록 찬란했다. 병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저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저 너머 지평선에서 검은 떼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아연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재빨리 망원경을 꺼내들었다. 

하늘을 어느덧 깜깜하게 메워버린 것은, 바로…

까마귀 떼였다. 

까마귀들이 무인 지대에 버려진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거대한 무리를 지어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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