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새로 온 의사
{ 당신의 편지를 받지 못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괜찮습니다. 전혀 원망하지 않아요. 바쁘고 정신없고, 힘든 곳이잖아요.
양말을 주기적으로 말리고, 담뱃불을 잘 비벼끄는 것은 잊지 않고 계신가요? 병사들에게도 주기적으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정말이지, 위생이라는 건 중요한 일이더군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배우다 보면 경이로울 지경이에요.
하지만 안전한 이곳에서 떠들어봤자 무엇 하나 와닿지 않을 거란 건 분명합니다. 당신은 그곳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당신이 보냈던 편지를 읽어보면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했었어요.
당신은 오페라를 좋아하죠. 신고전주의 회화를 좋아하고…. 살짝 구식인 감은 없지 않지만 어울려요(농담입니다).
당신은 단 것 또한 좋아하지 않죠. 스포츠를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한 편이시죠. 하지만 동시에 책임감도 강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던가요.
신의도 좋지만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주세요.
당신은 당신을 이루는 것만이 아닌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도 명심하시고요.
이상한 일이에요. 어째서일까. 이토록 우리 사이가 먼 지금. 당신은 바다를 건너 지옥 속에 있는 지금.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지금. 나는 당신과 제일 가까운 것 같아요. 그러니 우리 둘 다 말솜씨를 키워야 할 것 같군요!
다시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되도록 해요.
그러니 꼭 돌아오세요. 이곳으로, 이곳 노팅엄 저택으로 말이에요.
신의를 담아, 매들린 로엔필드가. }
* * *
노팅엄 저택, 아니, 이제는 병원이었다. 속속들이 입원한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감당하기 아슬아슬할 정도로 밀려들어 오는 중이었다.
매들린은 차에 실려오는 환자들을 병원 안으로 안내하며 그들의 상태를 빼곡히 서류에 옮겨적었다.
이번에 들어온 환자는 총 세 명. 한 사람은 비교적 경미한 부상으로 금방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지뢰를 밟아 무릎 아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환자는…
온몸에 전신화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신원 미상, 아마도 연합군 소속으로 사료됨. 코마 상태. 그는 람세스 2세의 미라처럼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숙달된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참상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매들린 역시 처음의 생리적인 거부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다들 전문가다운 평온을 되찾았다. 그들은 즉시 환자를 병실로 옮기고 그의 동태를 기민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환자의 이름은….”
그가 깨어나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환자 X. 그것이 당분간 그의 이름이었다.
환자 X. 매들린은 그 사람을 자세히 관찰했다. 얼굴 표면은 이미 녹아버려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운 데다가, 사지 역시 화상투성이였다. 그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 역시 다 타버렸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그가 연합국 소속임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여기까지 호송되어온 것이기는 하지만.
매들린은 환자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고 그를 지극히 간호했다. 다른 환자들도 열심히 돌보았으나 환자 X는 유독 마음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이안이 생각나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가 기진해있는 터라 신분을 따지기는 어려웠으나 지극히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으로 인하여 손이 갔다. 전쟁의 비극으로 인해 다친 병사들은 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비단 전쟁뿐만이 아니라 아프고 힘든 사람들은 전부.
그리고 그런 연민이 들 때면, 지난 생의 자신의 삶이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에는 스스로의 불행이 가장 무거워 보였는데, 지금은 그 불행 역시 한없이 가벼워만 보였다.
나쁘지 않았다.
지난 삶을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놓친 것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날도 환자 X를 돌려 눕히고 상태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이사벨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병실이라 차마 뛰지는 못하고, 바짝 붙어서 매들린 귀에 속삭였다.
“매들린, 이안한테 편지 왔어.”
그녀가 긴 녹색 봉투를 매들린의 품 안으로 찔러넣었다.
{ 친애하는 매들린 로엔필드 양에게.
나에게 편지는 이제 그만 보내줬으면 하는군요.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전적으로 내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나는 적어도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과의 서신교환 같은 건 불필요한 일입니다. 당신의 편지는 불길합니다. 내가 이토록 무가치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마다 살고 싶게 하니까. 헛된 희망은 위험한 것 아닙니까?
부탁입니다. 내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지 말아 주십시오.
이안 노팅엄이. }
편지에서 ‘친애하는’이라는 서명 위에 취소 선이 그어져 있었다.
“매들린?”
편지지를 붙든 매들린을 본 이사벨이 불안한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매들린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매들린, 괜찮아요?”
매들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환자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세면대로 가서 얼굴을 힘주어 씻었다. 수돗물과 눈물이 뒤섞였다. 물소리에 흐느낌이 묻혔다.
어째서일까. 남자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강렬한 고통이 그녀의 폐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손이 시종일관 부들부들 떨렸다. 괴로웠다.
그녀의 괴로움은 이중적이었다. 고통을 느끼는 사실에서 오는 고통.
‘동정심이었나. 아니야.’
오만함이었다. 자신이라면 그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내심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럴 권한도 능력도 없으면서. 고작 편지나 보내는 주제에…. 그런 글줄로는 남자에게 닥쳐올 불행을 막을 수 없다.
지난 생에서 그를 이미 저버렸으면서. 자격도 없는 내가 무슨 권한으로 그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뜨거운 눈물이 그렇게 하염없이 그녀의 볼을 적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수돗물이라 생각했다.
* * *
모두가 병원의 주인이자 총책임자인 선대 백작부인 앞에 섰다.
처음에는 다섯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느덧 제법 병원에 걸맞게 불어나 있었다.
“의사 한 분이 더 들어올 거예요.”
선대 백작부인은 이제 완전히 실무적인 옷차림이었다. 화려한 모자도, 드레스도 없었다. 수수한 회색 치마를 입은 그녀였지만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침울하던 표정에는 힘이 돌아와 있었다.
새로운 일과 소명이 그녀에게 활력을 가져다준 것이었다. 실로 이사벨의 덕이었다. 사람의 진정한 재능은 직접 맞부딪쳐볼 때까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누가 선대 백작부인이 탁월한 경영자이리라 예상이나 했을까. 그녀는 훌륭하게 병원을 운영했다.
“얼마 전까지 서부전선에서 의무장교로 복무한 분이에요. 어깨에 관통상을 당해서 물러나게 됐어요. 빈에서 신경생리학을 수학한 인재죠. 부디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매들린이 홀로 으슬으슬한 기운에 떨고 있을 때였다. 이사벨이 매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듣기로는 지체 높은 가문 출신이라는데요?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으스대는 귀족은 당신과 나 둘로 충분하니까.”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
매들린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대답했다.
* * *
--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세상이 죽어서 떨어지지.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모든 게 다시 태어나지.
(내 머릿속에서 널 만들어낸 것 같아.)
별들이 파랑과 빨간색으로 차려입고 왈츠를 추지,
그리고 제멋대로 어둠이 빠르게 밀려오지.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세상이 죽어서 떨어지지.
-실비아 플라스, [미친 여자의 사랑 노래]
잠도 식사도 잊고 환자들 간호에 몰두한 탓이었을까. 열이 나고 말았다. 이대로 가면 폐만 될 것 같아 홀로 침실에서 누워 쉬고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이사벨, 저는 괜찮아요. 그냥 놔두면 나을 것 같아요!”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나타난 것은 이사벨과 한 남성이었다. 의사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선대 백작부인이 말했던, 새로 온 의사인 모양이었다.
“닥터, 저기 혼자 무리해서 쓰러진 가여운 여인 좀 진찰해주시죠.”
“그럴 것 없다니까요….”
매들린이 자세를 고쳐잡고 일어났다. 열에 달뜬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손부채질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갑자기 불쑥, 남자가 매들린 앞으로 다가갔다. 키가 큰 사람이었다.
그가 저벅저벅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대뜸 매들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몸을 물릴 겨를이 없었다.
“열이 상당하군요.”
이 목소리. 매들린의 심장이 덜컹, 아래로 추락했다. 고개를 들어 본 얼굴의 정체는……
아냐. 이럴 수는 없어. 이래서는 안 돼.
코넬 알링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