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부디 살아 돌아와서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한참 동안 오지 않는 날들에는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런 날들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려고 애써야만 했다. 이사벨은 믿을 수 있는 상대였지만, 자신의 비밀까지 터놓을 수는 없었다.
어느 날 그녀가 먼저 매들린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오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달큰한 밀크티를 만들어 마시며 밤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게 위스키를 탄 게 아니라는 게 너무 슬프네. 그놈의 배급.”
“…하”
술은 전시에 귀했다. 원료가 전부 소독약으로 쓰이는 탓이었다. 둘은 한참 시시덕댔다. 이사벨이 중얼거렸다.
“이런 이야기는 좀 그런데, 남자 없어요?”
“남자요?”
“우리 오빠 말고. 그건 아무래도 안 궁금하니까.”
“…….”
매들린의 얼굴이 빨갛게 익자 이사벨이 큭큭 웃었다.
“이안은 내게 엽서만 보내요. 만사 잘 풀리고 있다, 괜찮다… 집안을 잘 지키고 어머니를 잘 모셔라. 그런 내용이죠.”
이사벨이 담배가 당기는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녀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오빠랑 잘해볼 생각 없어요?”
“네?”
“이안이 저렇게 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이사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이지적인 초록색 눈이 어둡게 반짝였다.
“우리 오빠는 수지 타산적인 사람이거든요. 자신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아요.”
“…….”
“청혼을 거절한 여성과 사심 없이 편지를 주고받는 성품은 못 된다는 거죠. 게다가 전쟁터에서라면 말 다 한 거 아닌가요?”
“위로가 필요한 거겠죠. 그리고 이사벨. 저와 노팅엄 씨는 이제 좋은 친구랍니다.”
“친구라.”
이사벨이 놀랍다는 듯 입을 벌렸다. 매들린이 고개를 떨궜다.
“뭐. 아름다운 우정이 되길 바라요. 솔직히 내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지만?”
“남녀 사이에 동지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이사벨?”
“그러면 내가 할 말이 없네.”
이사벨이 큭큭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녀가 매들린에게 속삭였다.
“전쟁이 끝나면 그이와 같이 살 거예요. 여기서 배운 걸 토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매들린은 그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사벨의 화려하고 이지적인 얼굴 뒤에 어떤 정열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매들린은 약간의 부러움을 느꼈다. 치기 어린 질투심. 선망. 뭐라 이름 붙이건 초라한 감정일 뿐이었다.
‘나도 이렇게 빛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 * *
솜강 유역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전쟁 속의 전투, 지루한 참호전과 일상 사이를 횡으로 종으로 갈가리 찢는 전투 말이다.
전투 속의 살상. 오물과 피와 염소가스의 냄새. 땅을 파도 파도 사람 시체를 다 묻을 수 없었다.
쥐들은 시체를 먹고 살이 뒤룩뒤룩 쪄 군인들을 공격했다. 지뢰가 땅 밑에서 격발한다. 동료의 부서진 유골이 그들 머리 위에 흩뿌려지곤 했다.
그곳에는 신도, 조국의 명예도 없었다.
* * *
매들린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부르트고 거칠어진 손이었다. 일하는 사람의 손.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는 부쩍 친해졌다. 이사벨, 엠마, 카를라와는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전쟁 발발 후 약 2년이 지난 지금, 저택은 완전한 병원으로 변모해 있었다.
매들린은 아연했다. 이전 생에서 살았던 괴물의 성이 깨끗하고 분주한 병원이 되어있다니.
인생의 궤적이 부쩍 달라진 기분이었다.
폈던 손을 다시 휠체어의 손잡이 부분에 놓는다. 제임스 고든 상병은 유쾌한 이였다.
늘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꼬장을 부리는 게 아니라면 훨씬 괜찮은 사람일 텐데. 두 다리가 없는 그는 언제나 이렇게 휠체어로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네요. 간호사 아가씨.”
지평선 언덕을 바라보며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저도요.”
로엔필드 저택. 다시는 보지 못할 그곳.
매들린은 조용히 그곳을 그렸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사교 시즌,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귀족들, 콧대 높은 그들의 허영까지. 조금은 그리울지도 모른다.
“고향을 그리는 데에는 담배만 한 게 없을 것 같은데.”
“휴….”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봤다. 병원에서는 꽤 떨어진 곳까지 산책을 나온 데다가 주위에는 다른 사람들도 없었다.
그녀가 품 안에서 몰래 꿍쳐놓은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는 요즘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 구하기 어려웠다.
“여기요.”
“와우!”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요.”
그녀가 담배를 한 대를 입에 물려준 다음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담배 연기를 시원하게 내뱉은 제임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능청을 부렸다.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죠? 역시 내가 잘생…”
“곧 퇴원하시니까요.”
물론 매들린은 받아주는 법이 없었다. 둘은 한참을 키득거렸다.
* * *
-- 장교들이 앞장을 섰다. (중략) 우리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탄약을 장전하고 재장전하기만 하면 됐다. 그들은 수백 명씩 쓰러졌다.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독일의 한 기관총 사수, 솜 전투를 회상하며
얼마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드먼드 블런던, 솜 전투를 회상하며
출처 :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솜강 유역의 전투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한 달 가까이 몇만 명이 죽었다. 몇만 명이! 개틀링 기관총 앞에서 허무하게 쓰러졌다.
돌격, 앞으로. 죽음을 향한 전진이었다.
편지는 매일 하는 기도처럼 계속 썼다. 답장이 오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오늘은 어떤 환자를 봤다, 날씨가 참 예쁘다, 이런 음식을 먹었다,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활자로 적힌 고국의 일상들이 그에게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의미를 주기를 바랐다.
어쩌면 남자를 동정하거나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일종의 우정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우정. 동료애. 그런 것들. 6년간 내가 당신을 견뎠듯이, 당신 역시 나를 견뎌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부디 살아 돌아와서… 살아 돌아와서…’
무엇을?
채 마무리 짓지 못한 문장들이 그녀의 혀끝에 걸렸다.
무엇을 하려고, 이제 와서.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끝맺지 못한 문장이 그녀의 목덜미에 걸렸다.
* * *
앞에서 진격하던 분대는 온데간데없다. 다들 기관총의 위용에 갈려나간 것이다. 지옥이었다. 포병부대가 이미 적진을 뒤흔들어놓았을 거라고 자신하는 수뇌부의 호언장담과 달리, 독일군은 이미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철조망과 지뢰조차 그대로였다. 그나마 파괴된 곳을 뚫고 지나가려는 육군은 오히려 좋은 먹잇감이었다.
가까스로 분대를 엄폐하는 데 성공했으나, 살아 돌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뭉쳐서 들어가면 죽는다.’
기관총을 좌우로 갈기기만 해도, 영국군은 나뭇잎처럼 떨어져 갈 뿐이었다. 간신히 병사들을 지형 뒤에 엄폐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뒤에서 병사들이 울기 시작했다. 연대나 분대를 조직할 때 동향인으로 구성한 통에 정신적 외상이 컸다. 눈앞에서 동네 친구가 쓰러지는 것을 보는 일이 괜찮을 리 없었으니까.
“울지 마. 내 말 들어.”
일선의 초임 장교지만 그래도 눈앞의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아남게 해야 할 의무가 남자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이안이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산개한다. 앞의 3번 참호까지 전력을 다해 뛰어간다. 엄폐물을 이용하고, 절대 뭉치지 말 것.”
-쾅.
그리고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오물과 더러운 흙이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시간이 없었다.
“전원 진군한다!”
* * *
전투가 끝나고, 연기가 자욱한 땅 위로 시체들만이 가득하다. 까마귀들, 쥐떼들, 진드기들의 시간이었다.
이안은 참호 안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였다.
보낼 수 없는 편지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신이 무너져내리고 있었으나 내색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아래에 있는 사병들도 무너진다.
귀족의 책무. 고결한 책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무너진다는 것은 또한 죽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죽으면 돌아갈 수 없다. 이곳에서 쥐들의 먹이가 되는 거지.
참호로 간 이후 몇 번을 무인 지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낙오자들을 구해냈는지 모르겠다. 영웅적인 행적이라며 칭송을 받을 겨를은 없었다.
대충 몸뚱이들을 참호 안으로 눕혀 놓았을 뿐이었다.
무인 지대에는 일종의 마비가 있었다. 두려움도 용맹함도 없는 정신의 공백 상태 말이다.
[날 왜 구하셨어요.]
하반신이 없는 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죽었다. 시체는 바깥에다 버려야 했다. 참호를 오염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이안은 자신 안에 있었던 자신감이 이미 남아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인류의 진보도, 유럽의 미래도 그가 꿈꾸던 이상과는 다름을.
자신은 판을 주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역시 그 안에서 종속된 존재임을 알았다.
매들린을 가끔 생각했다. 짙은 꿀색 머리를 한 여자는 수줍어하면서도 대담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두 눈은 갈망으로 빛나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었다.
그 무언가가 자신은 아니었지. 그건 분명했다.
이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청혼의 거절도, 그녀의 제안을 이안이 거절한 것도 다행이었다.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눈앞의 신문을 치웠다. 독일인들의 비열함과 장병들의 용맹함을 칭송하는 시들이 역겨웠다.
차라리 그는 그 시간에 카드게임을 하고 싶었다.
전장에서 도박은 일약 열풍이었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자신의 운을 몇 번이고 증명하고 싶어 했다. 여자 이야기는 그다음 순번이었다.
이안은 10분만이라도 눈을 붙이고자 눈을 감고 참호 벽에 기대어 잤다. 손에는 몇 번이나 읽고 읽어 종이가 바스러지는 편지를 쥐고선.
그는 꿈을 꿨다. 눈을 뜨는 순간, 기억하지 못할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