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안과의 편지
{ 매들린 로엔필드 양에게
녹색 봉투에 담긴 편지는 검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웃기는 일이죠. 장교의 특권을 이용하면서 이런 시답잖은 편지나 보낸다는 것이.
당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여전히 참전했다는 것에 후회는 없어요. 그 나이대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고백은 내게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참전을 권하는 시대에서, 깃털은커녕 깃털을 주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는 아가씨가 있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그랬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거라고 을러대는 여자 말입니다. 살면서 반전주의자를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신에게만은 솔직한 편지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에 대한 솔직한 편지 말입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는 말합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요. 전선은 확보가 되었고 사기는 충천되어 있으며 지휘관은, 혹은 부하들은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것과 괴리가 있어요. 진실은 항상 기대보다 추악합니다. 이곳은 나에게 끝없이 내가 피와 뼈를 담은 살자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단 말입니다.
겨울입니다. 참호 속에 물이 차오르는데 그걸 퍼낼 수가 없습니다. 발은 얼어가고 병사들은 발이 썩어들어가죠.
우리는 적들에 의해서보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더 많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곧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될 거고 이런 부당한 상황에 대한 불평도 잦아들겠지요. 그러나 겁이 나진 않습니다.
전투의 열기가 내게 강림하면, 이 모든 고통도 잊을 수 있겠지요.
공적 몇 개는 더 추가해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당신에게 비웃음당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 이건 농담이에요.
추신 : 매들린 로엔필드, 당신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은 진심입니다.
아, 그리고 편지에 담긴 조언은 감사합니다. 덕분에 연료탱크 주위에서 차를 끓이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군요.
진심을 담아,
이안 노팅엄이. }
* * *
{ 녹초가 된 채로 쓰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사벨과 선대 백작부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관료들과 협상하고 인력을 충원하는 데에 힘을 다하고 있죠.
이미 알고 계시겠죠. 노팅엄 저택이 병원으로 변모한 일과, 제가 이제 당신의 저택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이사벨 말에 따르면 사전에 당신의 허락을 분명히 받았다고 하던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네요. 솔직히 말해 그녀가 당신의 허락을 구하는 장면이 상상이 안 가요. 아무튼 선대 백작부인은 긍정적이세요. 대단한 분이십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당신의 답장을 받고 안도했어요. 비 오는 날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편지를 보내도 좋다는 말씀이겠죠. 감사합니다.
노팅엄 씨가 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저도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답니다. 자… 그러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저는 금발이지요.
참. 할 말이 없군요.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오만한 이야기지만 외모에는 약간의 자신감이 있었지요. 그것 외에는 가진 게 없다는 방증입니다.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좋아하는 것도 천편일률적이죠. 사교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매력적인 성격도 아닌 것 같군요. 그저 당신의 관심 한 자락을 받았을 뿐이었건만 그조차도 내쳐버렸네요.
한때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요. 늘 새로운 곳을 방문하는 것을 즐겨요. 혼자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책이 있으면 괜찮지요.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크리스토퍼 말로입니다. 저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루이스 스티븐슨, 디킨스…. 그 외에는 별로 읽지 않아요. 제게는 철학이나 과학이 너무 엄숙하게 느껴지거든요. 반면에 이사벨은 다방면의 책을 고루 읽지요. 옥스퍼드에 있는 신사들보다 박식할 거라 자신해요. 다들 그녀를 좀 더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경애를 담아, 매들린 로엔필드가. }
* * *
{ 오해 하나를 바로 잡아야겠군요. 이사벨은 애초에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뜻에서 한 일이라 굳이 말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재활병원이라는 것이 굳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장문의 편지를 보냈더군요. 수리하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도 결국에는 마땅히 애국자로서 할 일을 하는가 싶었을 뿐.
그보다 의외인 것은, 당신이 그런 궂은일을 자처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는 일을 낮잡아보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렵지 않겠습니까? 연민은 훌륭한 덕목이지만 때로는 무리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요.
나에 대해서 궁금한가요. 내 이름은 이안 노팅엄이고, 지금은 군인이며, 이사벨의 말에 따르면 유한지주계급이고, 어쩌다 보니 10대째 작위를 상속하는 집안에 태어났군요.
부정하진 않겠어요. 백작이라는 직함은 참으로 편리합니다. 군 경험이 없어도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고 원하면 원하는 대로 보직을 변경할 수 있으니까요. 대다수의 군인들은 그 편의를 누리지 못하죠.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어떤 다른 무언가인 것보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고 때로는 그 사실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추신 : 크리스토퍼 말로를 좋아한다면, 저택(지금은 병원이겠지만) 서재를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
* * *
서부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져든 이후로 자잘한 전투들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이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노팅엄 재활병원에도 새로운 얼굴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사벨과 선대 백작부인이 팔을 걷어붙이고 병원 운영에 힘쓴 결과, 세 명의 새로운 자원봉사자와 두 명의 의사, 간호사가 도착한 것이다.
노팅엄 저택이 병원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신문 기사화되면서 많은 지지와 성원이 전국에서 몰렸다.
첫 환자는 1915년 2월에 도착했다. 야전에서 기본적인 처치를 받은 환자였으나 대공포 파편이 얼굴을 온데간데없이 찢어놓았다. 처음에 흉터를 봤을 땐 생리적으로 온몸이 굳어버리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배운 대로 그를 눕히고 동태를 확인하고 몸을 씻길 수 있었다.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의 위치를 변경하고 상태를 확인하는 것까지.
여전히 부족한 감은 있었으나 숙련된 선배들의 동정을 확인하면서 감을 잡아나갈 수 있었다. 귀족다운 뻣뻣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좀 더 자연스럽고 전문가적인 태도를 견지해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할 테고.
첫 환자를 기점으로 속속들이 사람들이 입원해오기 시작했다. 도버 해협을 너머 수송되어온 환자들. 도저히 전투 불능이라고 여겨질 만큼 중상을 입은 사람들이 주였다.
다리가 없어진 사람, 팔이 없어진 사람, 환청을 듣는 사람, 내부 장기가 망가진 사람…. 그러한 사람들에게 점점 익숙해져 간다. 눈앞에 보이는 고통에 놀라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잘 살피게 된다. 그것은 고된 훈련의 힘이었다. 숙련된 의료진들의 처치를 어깨너머로 배우고 보조하면서 얻은 노력의 결실.
그녀는 분명 성장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 뼘씩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 *
알듯 말듯 불분명한 전황 속에, 매들린은 남자가 프랑스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편지가 이토록 잘 전달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장교의 초록색 봉투’가 지닌 힘일지도 몰랐다.
편지를 교환하면서 매들린은 자신이 저도 모르게 그의 편지를 기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안의 편지를 받지 못한 주는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렸을 때 내성적이어서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던 그녀는 언제나 편지 친구를 고대해왔다. 서간체 문학을 읽으면서 자신에게도 미스터리한 친구가 생겼으면 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가 가장 바라던 일일지도 몰랐다. 청혼이나 괴상한 사랑 고백이 아닌, 잔잔히 스며드는 관계 말이다.
이사벨과 동료들과의 잡담, 아버지를 향한 잔소리(그래도 그는 조금씩 움직이고는 있었다), 서재에서의 공부. 그런 일상들이 전쟁 중에서도 그녀를 지탱하는 보루였다.
하지만 별개로 편지를 교환할수록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안감과 고통이 있었다.
남자에게 다가올 운명을 막지 못한 채로 그가 지옥 속으로 걸어가는 것을 두고만 봐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불안감을 편지에 쏟아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