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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간호 공부 (22/121)

21화. 간호 공부

“무엇부터 해야죠?” 

매들린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사벨이 하하하. 크게 웃더니 매들린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여기로 온 첫 번째 사람이에요.”

“그럴 리가요.”

“제가 그다지 상류 사회에서 평판이 좋진 못해서요.”

매들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놀랐어요. 우리 오라버니와 좋게 끝나지 않았단 걸 아니까요.”

“…….”

“뭐. 그게 뭐가 중요한 거겠어요? 남자들이 없는 지금, 우리들이라도 최선을 다해야죠.” 

이사벨이 싹싹하게 웃으며 매들린의 짐가방 하나를 냉큼 들었다.

어어어. 매들린이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에 그녀가 짐가방을 든 채로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자. 빨리 올라와요. 매들린의 방은 이미 꾸려놨답니다.”

매들린의 방은 사용인들의 방 중 하나였다.

“있는 손님방은 전부 실습실로 개조를 해버려서요. 이렇게 초라한 방인데도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매들린이 결연하게 말하자 이사벨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옆방이니까 잘됐네요.”

매들린이 행장을 푸는 것을 무연히 지켜보던 이사벨이 경쾌하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이제 같이 저녁을 준비하죠!”

* * *

-- 멀리 사라져갔던 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삶이었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느끼지 않고, 보지 않는 상태로 점점 깊숙이 빠져들었다.

-로열웨일스 퓨절리어 부대의 한 사병,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백작이 죽고 남자 형제들이 사라졌다. 나이 많은 집사장을 제외한 남자 하인들도 몇몇은 차출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이사벨은 활기차게 움직였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용인들과 부대끼며 음식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는 통에 집사장이 진절머리를 내며 그녀를 말리려 했다.

“아가씨, 제발 이런 채신머리 없는 짓은 그만하시죠!”

“지금은 전시상황이라고요. 아가씨니 뭐니 하는 말도 그만둬요.”

그녀가 신나게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어색한 모양으로 당근이 썰리는 것을 본 요리사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거북이라거나, 뇌조 같은 고급 요리는 더는 사지 않도록 해요. 요리를 할 수 있는 인력을 더 채용해야 하기도 하고요. 이제 이곳이 곧 병원이 될 거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먹여야 하는지 아세요?”

이사벨이 들떠서 재잘거렸다. 냉랭한 평소의 그녀로서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아가씨.” 

세바스천은 이제 완전히 진력이 난 상태였다. 그가 매들린 쪽을 힐끗거렸다.

‘아가씨 좀 말려주십쇼.’ 하는 눈치였다.

매들린이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팔을 걷어붙였다.

“노팅엄 양. 저도 야채를 다듬어볼게요.”

그날 저녁은 야채 스프와 스테이크였다. 마지막 양념 간을 요리사인 제닝스 부인이 해서 그나마 먹을 만했다. 썰린 당근과 감자는 크기가 제각각이어서 씹기 과히 불편했다.

이사벨의 파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사용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사교계에서 평판이 안 좋았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당연하다 싶을 정도였다.

매들린은 맛있게 그릇을 비워냈다.

“이번 주 내로 우리를 지도할 ‘선생님’이 올 거예요.”

이사벨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물자들도 속속들이 도착할 예정이고요. 이곳을 쓸 만한 병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힘이 필요하다구요.”

이제 와서 보니 이사벨은 비운의 처녀도, 사랑에 빠진 여인도 아닌 강철 같은 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비록 다혈질적인 측면이 다분하지만, 이안과 비슷하게 제 의지를 관철해나가는 면모가 있었다.

매들린은 식사 자리를 주재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빛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용기 내어 이곳까지 온 게 다행이었다.

물론 이사벨은 사재를 털어 이미 전문 인력을 고용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자원봉사자까지 모집했다.

노팅엄 저택에 머물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소정의 봉급을 받는 대신 간호사로서의 훈련을 받고 야전병원을 운영하는 조건이었다. 

이사벨은 전국이 애국심으로 들끓는 지금이야말로 지원자들을 모집하기에 적기라고 단언했으나, 실상 모집된 자원봉사자는 매들린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 * *

선생님으로 초빙된 간호사 선생은 노숙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흠흠.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비상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단기간 안에 쓸 만한 간호사가 되는 건 불가능해요. 처음부터 나이팅게일은 꿈도 꾸지 말아요! 하지만 지금은 전시상황이니까 여러분들도 힘을 보태야겠죠…”

그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 

“물론 귀족 아가씨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도 많을 거예요.”

“…….”

“피라든지, 장기라든지…, 울부짖는 젊은 병사라든지 말이에요. 재활병원이니까 피를 자주 볼 경험은 적겠지만 언제든 대비해야 해요.”

엄격하고 딱딱한 여학교 교장 선생님 같은 인상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자 온후함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모두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언제나 낯섦을 극복하고 기꺼이 배우려는 자들에겐 문이 열려있죠.”

수업을 시작할까요.

* * *

다림질을 하고 소독을 하고 깨끗한 병실을 만들었다. 매들린은 정신없이 지식을 흡수했다. 수많은 장기들의 이름과 환부의 상태를 암기했고 담력과 관찰력을 길렀다.

지난 생과는 다르게 인생을 풀어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두 달의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라디오로, 신문으로 전쟁의 참황이 속속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적지근하던 전황은 한 번 불꽃이 튀듯 격화되더니 곧 참호전으로 번지며 지지부진한 상태로 흘러갔다.

매들린은 의식적으로 뇌를 비웠다. 생각을 비우고 당장의 노동에 집중했다. 손이 부르트도록 세탁물을 정리하고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날이 지날수록 마르는 매들린을 보며 이사벨조차 걱정할 정도였다.

“매들린.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아직 환자들도 없는걸요. 걱정된다면 사람을 더 모집하면 돼요.”

“아니에요.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매들린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 가진 건 가문의 허명뿐인 빈털터리 젊은 여자라는 걸 상기할 때마다 기운이 빠졌다. 

“흠… 매들린.”

이사벨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담배를 권하고 싶지만, 여기는 이제 엄연히 병원이니까요.” 

게다가 오츠 선생님이 제게 불호령을 내리실 거예요. 그녀가 웃었다. 배급제가 된 이후에도,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붉은색 립스틱을 바르는 이사벨의 진한 입가가 장난스럽게 뒤틀렸다. 

“우리 오라버니가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편지를 써보는 건 어때요?”

“편지요?”

“편지요. 사흘이면 도착해요. 물론 답장을 쓸 겨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안은 감사하지만, 노팅엄 씨가 걱정되지는 않아요.” 

그를 걱정하기에는, 그는 매들린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다면야, 뭐. 다행이네요.”

이사벨이 음흉한 눈빛을 날렸다. 

* * *

{ 겨울이 오고 있어요.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는 걸 용서해주시길. 이걸 읽을 시간에 부족한 잠을 자도 괜찮을 것 같군요. 

모든 것이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졌어요. 

언젠가는 당신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모든 것이 늦을까 봐 편지를 써요.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너무 오래 담그지 않기를 바라고, 당신이 두꺼운 옷을 입어서 감기에 걸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료 탱크 주위에 불을 붙이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벨기에에서 독일군이 부주의한 실수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어째서일까요. 저는 당신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어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되네요. 그러니 무사히 돌아와서 저를 비웃으시길 바랍니다. 

제 하나 마나 한 조언을 잘 참고하시어, 안전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추신 : 이 모든 당부는 동정심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10월 8일,

매들린 로엔필드가. }

고심 끝에 보낸 짧은 편지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매들린은 상심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도 있었다. 에릭은 비교적 안전한 후방으로 빠졌다고 했다. 그러니 이안이 느꼈을 충격도 조금은 덜어지리라. 

물론 삶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는 것만으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 정도로 매들린은 순진하지 않았다. 

편지에 썼던 말대로 이안이 자신의 편지를 찢어서 버린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쾌할 수도 있을 테니까.’ 

청혼을 거절할 때는 언제고, 전쟁터에 나간다니까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걱정한다고 하는 심경의 변화를, 남자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잡다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지도를 받느라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현재로선 간호사 면허제도도 없었고, 도제식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직무의 막중함은 여실했다. 

알아야 할 게, 배워야 할 게 너무도 많았다. 직무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매들린은 이날도 공부를 하다가 등잔 밑 책상에 엎드려 고개를 파묻은 채 선잠에 들었다. 정리되지 않은 그날의 공부와, 상념들이 얽혀 꿈으로 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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