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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편지 (21/121)

20화. 편지

{ 안녕하세요. 매들린 로엔필드 양. 이 주소가 맞는지 모르겠군요.

저 역시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의심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으니까! 

사실대로 고백부터 할게요. 처음부터 난 당신이 껄끄러웠어요. 무슨 꿍꿍이로 그때 내 보호자를 자처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요. 나와 그이(아시죠?)의 관계를 아는 것도 좀 의심스러웠지요. 

하지만 글쎄요. 껄끄러움도 껄끄러움이지만, 우리의 대의 앞에서는 그런 게 중요할까요.

당신이 내게 말했었죠, 살아있으면 길은 있다고.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고 싶어요(당신이 적이 아니라면 말이죠).

노팅엄 저택을 상이군인 재활병원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지금은 유럽 본토에 있는 야전병원으로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전황이 확대되면 될수록 영국의 병원들이 필요해질 거예요. 

우리 저택이야말로 병원으로 쓰이기에 적절하죠. 가족 인원수에 비해 지나치게 넓고 사치스럽고, 게다가 정원도 아름다워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쉬기 좋을 거예요. 

이런 땅을 놀리는 건 죄악이 아닐까요. 

어머니는 강건하게 반대하고 계시지만, 나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간호학을 배우고 같이 봉사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물론 경험 풍부한 의사와 간호사들도 모집하고 있답니다.

봉급과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연락해요.

경의를 담아, 이사벨이. }

믿기 어려운 편지였다. 자신이 비 오는 날 노팅엄 저택에서 보였던 추태를 생각해보면, 이사벨의 제안은 대담함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싶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유럽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으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이사벨의 제안이 가슴에 와닿았다.

게다가 아버지의 상태가 갈수록 안 좋아졌다. 남은 재산도 부족한 데다가 술독에 취한 아버지는 재활이 필요했다.

귀족 영애가 간호사가 된다는 말은 퍽 파격적으로 들렸으나, 모든 것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 그 어떤 것도 파격적일 수는 없었다.

매들린은 편지를 고이 품에 넣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비통함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었다. 

* * *

-- 스물여섯 살의 매들린.

그 ‘사건’ 이후로 알링턴은 주기적으로 저택을 방문했다. 그는 냉소적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재치가 있었다. 인류에게 의학으로서 공헌하겠다는 마음만큼은 진심으로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관심이 가장 큰 사람이었다.

남자는 백작의 동태를 관찰했고, 그를 ‘치료’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는지는 매들린도 의문이었다. 잠깐이나마 흘렀던 난기류가 꿈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백작은 다시 자기 안으로 침잠해버렸다. 매들린 역시 다시 손을 뻗을 용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서, 자꾸만 주저하게 됐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예전의 활달한 그녀는 어느새 마찬가지로 고립된, 존재에 불과했다. 그녀는 멈춰서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채로… 우두커니.

오전 진료를 끝내고 난 알링턴에게 굳이 차를 마시고 가라고 권했다. 어쩐지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고 남편의 동태가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알링턴 박사님.” 

그녀가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부인.” 

반면에 알링턴의 눈빛은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이안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러했다. 과학과 합리를 통한 인류의 진보를 믿는 사람. 그렇기에 개개인의 사람에는 한없이 무심해질 수도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금발을 단정하게 빗어넘긴 푸른 눈의 사내였다. 

“남편은 어떤가요?”

알링턴은 여러 기계를 가지고 왔다. 백작이 앓는 발작은 ‘포탄 충격’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충격으로 ‘둔감화’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매들린으로서는 명망 높은 심리학자가 허튼소리를 한다고 볼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알링턴의 치료에 많은 것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알링턴이 찻잔을 내려놓고 매들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당분간은 부군과 조금 떨어져 지내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자극에 노출된 직후에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워낙 부담스러운 치료법이라서요. 알링턴의 권고는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이가 많이 힘들까요?”

매들린도 모르게 제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괜찮을까. 안 그래도 약한 사람이다. 

치료하는 내내 위층에서 낮은 비명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얼마나 아플까. 전기자극으로 치료받고 약물을 주입받으니, 보통 사람들이 이겨내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기술이었다.

매들린의 속이 역해졌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멍해지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치료니까요. 썩은 환부를 도려내듯이… 망설임이 없어야 해요.” 

알링턴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가 찻잔을 치운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작 각하가 노력하는 건 오로지 부인 때문입니다. 그 노력에 같이 부응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알링턴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밤이 되자 매들린은 이안의 침실로 향했다. 남자가 자고 있는 동안이라도 잠깐 그의 동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미한 불길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가늘게 눈을 내리깐 채, 안락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손에는 서류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일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치료는 육체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매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

이만 나가봐야지. 매들린은 최대한 거리를 두라는 의사의 조언을 떠올렸다. 쉬고 있는 이안을 방해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방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무슨 일이오.”

남자가 그녀를 불렀다. 매들린이 뒤를 돌자, 힘겹게 눈을 뜬 남자가 보였다.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애써 웃어 보이려 노력했다. 

“힘들지 않아요?”

“치료?”

끄덕. 그녀의 고갯짓에 백작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나아야지.”

“하지만 너무 힘들다면 계속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을 위해서라도.”

“……”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아야 하지 않겠나.”

그가 그 말을 남겨두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는 그대로 기진한 것이었다.

* * *

-- 열일곱 살의 매들린.

‘어쩌면.’

이사벨로부터 편지를 받은 날. 으슥한 밤. 침대에 누운 매들린은 생각했다.

어쩌면 알링턴의 치료를 받게 하지 말아야 했던 게 아닐까. 치료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손쓸 도리 없이 무너져내린 기분이었다. 

알링턴을 철석같이 신뢰하기만 했던 매들린으로서는 굉장히 의외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공포를 공포로써 이기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백작에게는 오로지 고통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백작은 말수가 없어졌다. 손을 떨기 시작했고 매들린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햇빛을 보는 것을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이게 괜찮아지는 거라고? 매들린은 그 광경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치료 자체가 효과가 없을뿐더러 남편을 더 고통 속에 빠뜨렸던 게 아닐까 자문하기 시작했다. 

매들린이 몸을 웅크려 무릎을 껴안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정녕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는 매들린에게 알링턴과 그의 병원이 가진 권위는 세상 제일의 것이었다. 영국왕립의학회 회원인 데다가 대륙 최고의 논문을 쓴다는 사람을 그 누가 쉽게 의심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시간이 뒤집히고 다시 살게 된 지금,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치료들. 구리 전선과 주사기들. 치료가 끝나면 몸을 가누지 못하던 이안 노팅엄. 갈수록 말라가던 남자의 몸.

자신을 위해서는 뭐든지 감내할 수 있다던 말. 

날카로워져 가던 신경줄. 자신을 찾던 거친 목소리까지. 매들린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어. 

불면의 밤이었다.

* * *

이사벨은 창가에 기대선 채로 담배를 피웠다. 인간사에 드리워진 암운을 예고하듯 날씨도 좋지 않았다. 물론 영국에서 볕이 좋은 때를 찾기란 어렵지만 말이다.

우중충해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날씨였다. 간호 선생을 초빙하고 교구를 구입하는 데에도 한세월이었다. 알고 지내던 모든 숙녀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딱 두 개였다.

하나는 예의 바르고 완곡한 거절의 편지, 또 하나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야겠지.’

이사벨은 조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대의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기 확신을 위한 증거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이사벨은 자신의 목걸이에 달린 로켓을 매만졌다. 재커리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막아설 수 없어.” 

자신의 목덜미에 닿았던 남자의 한숨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했다. 이렇게 가까운 것 같은데 멀다. 하지만 또 가깝다.

전쟁터로 나간 남자 형제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공군 비행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에릭에게 울고 불며 난리를 쳐 후방의 운전병으로 빼낸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이안은… 최전방의 장교로 배치되었다. 

그를 미워했으나 동시에 누이로서 사랑했다. 

이사벨이 그렇게 한참 수심에 빠져 저택 앞 광활한 땅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지평선에서 하나의 흐릿한 점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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