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가지 말아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안은 그녀가 기이하다 생각하면서도, 자신과 여자가 잘 맞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였을까. 매들린은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알 듯 모를 듯한 감정들이 여자의 눈가에 서리는 것을 이따금 보았다. 그것은 오히려 이안의 정복욕을 끓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다 소용없는 일이지.’
그의 치기 어린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안은 여자의 창백한 낯 앞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답은 명확한 거절이었다. 승복하기 싫었으나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매들린의 경멸을 온몸으로 치받고 조금씩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오만했다. 그는 인정했다. 돈으로 뭐든지 사려는 자신을 매들린이 좋아할 일은 아마 없다는 것도.
이제 승산은 없었다. 그녀의 경멸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편으로 돌리려면 시간과 정성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이제 전쟁터로 가야 한다.
시간은 없고, 주사위는 던져졌고,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이안은 이 이상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스쳐 지나간 인연을 붙들고 사지로 뛰어들어봤자 서로에게 좋을 일이 없으니까.
이루어지지 못한 인연 정도로 갈무리하면 될 일이었다.
-쿵쿵.
그때였다. 제 침실의 문을 누군가가 다급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신경이 곤두선 이안이 성마른 목소리로 외쳤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문을 연 것은 잠옷을 입고 숄을 걸친 이사벨이었다. 그녀가 격앙된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그 여자’가 왔어.”
“무슨…아니, 그보다도 ‘그 여자’라는 게…”
“매들린 로엔필드. 그 이상한 여자.”
“…….”
-콰쾅.
번개가 번쩍, 내리쳤다. 얼마 안 가 우레같은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사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여자가 찾아왔어.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서 말이야.”
* * *
매들린 로엔필드는 완전히 금도를 어긴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만이 아니라 확실히 넘어섰다. 늘 모범적인 삶을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처음 벌이는 기행이었다.
한밤중에 비에 왕창 젖은 꼴로 뛰어와, 헛소리를 늘어놓는 여자라니.
하지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충동을 다스릴 수 없었다.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남자가 이대로 속절없이 떠난다 해도. 적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라도 제대로 쏟아내고 싶었다.
코트가 빗물을 먹어 잔뜩 무거웠다. 그것을 벗어두고 저택의 하녀가 내어준 수건을 어깨에 둘렀다. 그렇게 난롯가에서 떨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로엔… 필드 양?”
응접실로 긴 그림자가 들어왔다. 젊은 이안 노팅엄이 눈앞의 자신을 귀신들린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매들린이 물기 어린 앞머리를 털어냈다. 치맛자락에서는 빗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용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쟁터로 가신다고 들었어요.”
매들린의 말에 이안의 경직된 표정이 일순 풀렸다. 그가 하하. 작게 웃었다.
“그러지 않는 젊은이도 있습니까?”
“꼭 가셔야 하나요.”
그 말에 이안이 의아하다는 듯 숱 많은 굵은 눈썹을 기울였다.
“왜죠. 제가 어디서 무얼 하든, 이제 당신과 일절 상관없는 일이잖습니까.”
그가 모난 소리를 하며 몸을 뒤로 뺐다. 매들린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어 올렸다. 그녀의 턱이 추위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 전쟁에서 당신은 모든 것… 많은 것을 잃게 될 텐데도요?”
“점이라도 치시는 겁니까. 불쾌하군요.”
이안 노팅엄의 곧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짜증스러운지 화가 난 건지 그가 표정을 굳혔다. 그럴수록 매들린은 더 절박해질 뿐이었다.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그녀가 중얼거렸다.
“역시, 이 말을 가장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녀가 숨을 한번 참더니 속사포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지 말아요. 전쟁터로 가지 마요.”
그녀가 고개를 떨궜다.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눈앞의 남자를 증오하는 건지, 아니면 동정했던 것인지. 그러나 이제 더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지금 이안 노팅엄은 자신을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까.
한참 말이 없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프로포즈했다고 해서, 당신이 내게 어떤 행동을 해도 정당화되는 건 아닙니다. 농을 치려는 거면 그만두세요.”
그의 차가운 눈빛이 아프게 박혔다.
“……”
“전쟁터야 당연히 위험하겠죠. 그곳에 나가는 다른 젊은이들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위축된 매들린이 입술을 달싹이며 항변하려 했다.
“나 역시 많은 것을 걸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런 각오 없이 나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란 겁니다. 아.”
남자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날카로운 비수를 던졌다.
“나를 ‘걱정’하는 거라면 그건 필요 없다고 해두고 싶군요. 하기야, 가족과 연인을 한시바삐 전쟁터로 등 떠밀어 보내는 세상에서 참으로 특이하긴 합니다만.”
그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는 이쯤 하죠.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잠을 청하면 되겠군요.”
그가 매들린을 잠시 곁눈질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더는 말할 가치가 없다는 식이었다.
매들린이 덜덜 손을 떨었다.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전 생에서 나는 당신의 아내였다고 말할 수 없었다. 세간의 상식 앞에서 자신의 경험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내게 왜 청혼했어요?”
매들린의 목구멍 사이로 새된 목소리가 비집어져 나왔다.
도대체 왜. 왜. 당신은 지난 생에서나 지금 생에서나 나를 구속하고 청혼하고, 또 붙잡는 건가. 매들린은 따져 묻고 싶었다.
불합리했다. 왜 자신만 이 짐을 지어야 하는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전쟁터에서 산산이 부서지면 왜 그 마음의 짐은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결국 내 경고를 듣지도 않을 거잖아. 늘 나를 무시할 거잖아.
“…….”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했죠. 그래요. 좋아요.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그 결혼 응할게요.”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수지맞는 장사죠?
“로엔필드 양.”
이안은 뒤돌아섰다. 얼굴은 이제 짜증을 넘어 피로가 가득했다.
“나와 결혼하면 참전하겠다는 결심을 거둘 건가요? 그러면 우리 결혼해요.”
“모욕이 지나치군.”
남자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매들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나는 겁쟁이가 될 순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당신의 변덕 때문이건, 동정심 때문이건.”
“…….”
“참전할 겁니다.”
매들린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표정은 찌푸리지 않았다.
그녀의 결연한 눈가가 축축해졌다. 이안이 잠시 주저하듯 한숨을 쉬더니, 그녀 가까이로 다가갔다.
매들린이 쥐어짜는 목소리로 간신히 매달렸다.
“……가지 마세요.”
그녀는 제 눈앞에서 발작하던 백작을 떠올렸다. 자신을 붙잡던 남자를, 그 이후에도 언제나 그림자에 머물던 시선들을. 포탄과 함께 갈가리 찢긴 남자의 마음을 말이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그를 품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메마른 바다였고 남자는 상처받은 물고기였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진 거라면, 매들린은 어떻게든 그것을 고쳐 쓰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온 거야. 참을 수 없어서. 한 사람의 인생이 지옥으로 변하는 걸 놔둘 수가 없어서. 매들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평소의 다홍색 입술과 뺨은 이제 거의 연보랏빛으로 질려있었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까 전의 경멸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담겨있었다.
“매들린, 전부터 생각했지만, 당신은 정말 이상한 여자요.”
그가 조심스럽게 매들린의 축축한 어깨를 붙들었다. 남자의 강건한 손바닥이 그녀의 둥그런 어깨를 감쌌다.
“나를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이런…행동까지 벌일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그가 한쪽 손등으로 매들린의 볼을 옅게 쓸었다. 미적지근한 남자의 손가락이 비를 맞아 차가운 여자의 볼을 스쳤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고, 그가 입꼬리를 힘겹게 당겼다.
“당신이 말했던 대로 나는 오만한 남자입니다. 프로포즈를 거절한 건 현명한 행동이었어요. 매들린 로엔필드. 더 나은 사람을 찾길 바랍니다.”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원래 적진에 들어간 군인이 죽음을 각오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뿐인 겁니다.”
그렇게 말을 다 끝낸 그가 그대로 응접실을 나갔다.
온몸이 젖은 매들린은 그렇게 응접실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 *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매들린은 그것들을 전부 놓친 자신의 어리석음을 믿을 수 없었다. 결국에는 눈앞의 남자조차 구할 수 없었다.
과거로 돌아온 보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새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가며 미친 여자처럼 굴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열일곱 살 철부지 귀족 여자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제 손으로 아무것도 이룬 적 없는 사람이 남을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8월이 가기 전에 노팅엄 가문의 남자들이 떠날 예정이었다. 노팅엄 가문뿐만이 아니었다. 조지 콜하스도, 윌리엄 레버렛도. 젊은 남자들이 사라진 사교계는 파탄이 난 지 오래였고 온 국토에는 전쟁의 열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들 애국심으로 난리도 아니었다.
매들린은 환송식에 차마 참석할 수 없었다. 밝은 모습의 젊은이들을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기사도 신화에 휩싸인 사람들의 삿된 정열을 비난할 힘도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신문지를 바라보며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앞으로 여성도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살 방도가 있을 터였다.
그나마 남겨뒀던 돈을 모아 타자기를 한 대 샀다. 매들린은 그 철로 된 물건 앞에 섰다.
자리에 앉고 책에서 읽은 대로 기계를 매만졌다. 치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