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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전쟁 (19/121)

18화. 전쟁

코넬 알링턴은 귀족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빈에서 학위를 땄으며,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의무장교로 복무했다고 했다.

인근 병원을 운영하면서 임상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다고 했다. 남자는 매들린 앞에서 그 이야기를 덤덤하게 내뱉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찻잔을 바라보며 매들린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절묘한 순간에 남자가 나타났다. 마치 기다린 듯이….

“제 남편 역시 선생님의 임상 연구 사례가 될까요?”

매들린의 뼈있는 말에, 조용히 차를 마시던 알링턴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마주한 것은 수치스러워하는 낯의 여자였다. 무언가 굉장히 싫은 것을 깨달은 사람의 표정. 알링턴의 기분도 과히 좋지만은 않았다.

“오해하진 마시죠. 부군을 임상 연구의 소재로 쓰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니까요.”

“…….”

“저 역시 영화를 좋아하는 시골 사람입니다.” 

물론 그 말을 매들린이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진 않았다. 

알링턴은 병리학계에서 유명한 남자였다. 심리학 분야에서 걸출한 글들을 게재했다고도 했다. 의사라기보다는 임상 연구가 더 걸맞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그는 전쟁 신경증 분야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가 소유한 남작위는 부수적인 후광이었다. 알링턴 남작가. 매들린도 언뜻 들어 알고 있는 가문이었다. 알링턴 가문은 19세기 후반에 들어가면서 빈한해진 여느 시골 귀족 가문과 비슷한 처지였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소수였다. 결국, 가문보다는 개인의 성취가 더 주요한 시대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링턴 남작이라기보다는, 알링턴 박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것을 더 명예롭게 여겼다.

* * *

백작은 쓰러진 이후로 말이 없었다. 매들린 역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섣부른 위로로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얼마나 수치스러워하고 있을까. 얼마나 후회하고 원망하고 있을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었다. 

저택은 다시 예전의 그 죽음 같은 고요 속으로 침잠해,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 * *

-- 열일곱 살의 매들린.

아버지와 크게 싸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남작은 매들린이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이해할 수 없다며 역정을 냈다.

매들린이 감상적이며 철부지이고, 지금 당장 부녀가 굶어 죽는다면 다 그녀의 잘못이라는 식이었다. 

매들린은 그에 맞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쏘아볼 뿐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지의 베일이 걷히자 모든 것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의 아버지란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에게 매들린 로엔필드는 자신의 허영을 채워주는 트로피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상황이 궁색해지면 언제든지 팔아버릴 수 있는. 

어머니와의 뜨거웠다던 사랑도 이제 그에게는 지나간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든, 실망하든 말이다. 이안과는 이미 그렇게 끝을 냈으니. 그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야 만 셈이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다시금 짓눌러오는 미약한 두통을 무시했다. 

* * *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두 번 울렸다. 두 발의 총성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와 황태자비를 죽였다.

매들린은 신문을 펴들고 찬찬히 활자를 눈에 담았다. 정말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결국에는 똑같이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 대다수는 전쟁 같은 게 일어날 리 없다 생각했다.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얼마 안 가 사태가 정리될 거라고.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며, 이 모든 게 큰일로 번지지는 아니할 거라고 말이다. 

매들린은 웃고 싶었다. 또 울고 싶었다. 곧 선전포고가 이어질 거고, 사람들은 짧은 전격전을 예상할 거다. 

매들린이 기억하는 대로라면 다들 전쟁을 반겼다. 모두가 애국심에 가득 차서, 참전하지 않는 겁쟁이들을 비난하고 그 증표로 깃털을 건넸다.

지난 생에서 매들린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두루뭉술하게나마, 조국을 지키겠다는 남자들의 기개를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없는 형편에 국가 채권을 샀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애국심의 대가가 젊은 사람들의 피라면.

그녀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의 우는 소리는 이제 더는 대수롭지 않았다. 

영국은 언제 선전포고를 했던가. 정확한 날짜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려봤자 고대 그리스의 예언자 카산드라처럼 천덕꾸러기 취급밖에 더 당할까. 무슨 말이라도 토해내고픈 마음을 꾹 참으며 로엔필드 저택의 가구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전부 깨끗한 상태로 내놓아야 했다. 약간의 하자라도 생겼다가는 후려친 값으로 팔아야할 테니까.

게다가 가구를 팔고 난 후에는 매물로 올라온 로엔필드 저택을 보러오겠다는 구매자들을 맞이해야만 했다. 가장 유력한 구매자 후보로는 젊은 미국인 부부가 있었다. 식료품 사업을 크게 하는 그들은 영국에서 거주할 집을 찾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팔아야 할 텐데. 매들린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아니, 사실… 정말이지. 이안 노팅엄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다. 그의 의기양양한 모습과 오만한 젊은 표정을. 그리고 제 앞에서 불붙듯 이글거리던 눈빛을.

그렇게 전장으로 걸어가는 그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매들린의 볼이 점점 창백해졌다.

* * *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갔다.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가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이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가, 영국이, 미국이 선전포고를 했다. 40여 개의 나라가 줄을 서듯 서로에게 총구를 사열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와는 별개로 매들린 로엔필드의 삶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평온하고 모두와 무관한 삶을 살고자 하는 계획 말이다. 

로엔필드 저택이 팔렸다. 다행히 전쟁 전에 계약을 해서 제값은 받았다. 이제 그 돈으로 교외의 작은 주택에 세 들어 살 요량이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적은 돈을 가지고 전쟁 중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차례였다.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여성들이 점점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 시대적 흐름 앞에서 무력한 유한계급이었다.

타이핑을 하는 능력도, 회계장부를 작성하거나 하다못해 옷감을 만드는 생활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장사를 한다 해도 수완이나 말주변이 형편없었다. 

그렇다고 무능한 아버지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 남작은 술독에 빠졌다. 그는 언제고 취할 때마다 매들린이 이안 노팅엄의 청혼을 받아들였어야 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번듯한 중년의 얼굴이 술기운으로 불그죽죽해진 게 꼴사나웠다. 

매들린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쳐다봤다. 얼마 안 가 열차역에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아들과 연인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 테지.

‘나는…. 그래. 한마디만 더 했어도….’

매들린의 입이 달싹였다. 눈을 깜빡이고, 손을 까딱였다.

“…….”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이게 정녕 마지막이라면, 한마디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그와 더는 얽힐 수 없다면 말이다. 

* * *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이었다. 늦은 밤은 아니었으나 그 통에 바깥은 어두웠다. 

노팅엄 백작이 위독했다. 아들들은 자진 입대를 선택했고, 사람들은 비통한 불길함에 잠식되어 있었다.

노팅엄 백작부인은 가장 큰 비통함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사랑하는 두 아들이 동반 입대를 선택한다는 것도 충격이었거니와, 자신이 그들을 말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명예’. 목숨보다 소중하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것. 백작부인으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가치였다.

게다가 백작부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전쟁터를 주말에는 경건하게 싸우지 않고 예배당에 가고, 밤에는 잠을 잘 수 있으며 이따금 여흥도 주어지는 곳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이따금 엄습하는 불길함과 비통함은 어찌할 수 없어서, 저택은 암운에 휩싸여 있었다.

이안 노팅엄은 행장을 완전히 꾸린 채였다. 이제 몸만 가면 된다. 

장남이 참전한 이상, 차남까지 군에 입대할 이유는 없었으나 에릭은 완전히 열의에 들떠있었다. 마땅히 필요한 때에 목숨을 바쳐야 진정한 남자라는 둥,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안은 그 정도의 열의까지는 없었지만,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나서야 하는 게 귀족의 책무라는 의식 정도는 있었다.

오로지 이사벨만이 악을 쓰며 그들을 말리고 있는 상태였다.

최전방에 나가서 죽는다면 개죽음일 뿐이라느니 험악한 소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말에 냉소할 뿐이었다.

어차피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징집을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해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는 미약한 두통을 느끼는 채, 폭풍우 치는 바깥을 응시했다. 떠날 땐 떠나더라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싶었다. 

오랜 세월 몸이 좋지 않았던 부친이 눈 감을 때라도 편안히 눈감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백작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있었다. 이미 장례절차가 준비되어있었다.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시국이 시국이기도 하거니와, 백작의 당부이기도 했다. 자신의 죽음은 너무나 오랜 시간 걸렸으니 더는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의사를 충분히 존중해야 했다. 이안은 머리를 짚고 의자에 앉았다. 그것 외에도 신경 쓸 곳이 많다. 에릭과 자신이 없는 동안 사업을 어떻게 꾸려갈 것이며, 집안은 누가 통솔할 것인지.

이사벨이 잘 해낼 거라 생각하긴 했다. 그녀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데다가, 기개도 남달랐으며 총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지점들이 있었다. 제 동생 옆에 독사처럼 달라붙은 남자. 재커리 밀로프. 거기에 더해 그녀의 다혈질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 그 정도뿐일까.

“…….”

마지막으로 이안은 여자를 생각했다. 매들린 로엔필드. 햇살을 녹인 것 같은 금발을 가진 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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