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영화 상영
간만에 저택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역의 명사,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런던의 멋쟁이들까지.
매들린은 그들을 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만큼 관심을 받은 것이리라.
“요즘에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초대받지 않아도 오는 게 ‘예의’인 것 같군요.”
세바스천이 툴툴거렸다. 그에게 있어서 요즘 도시 사회는 온갖 퇴폐의 온상지에 불과했다. 그런 도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드니 기분 나쁠 만했다. 물론 매들린으로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신선한 일이었다.
매들린은 부드러운 은색 실크드레스에 비단으로 된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차림새만 봐서는 누가 어떤 신분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귀족과 평민들의 구분은 이제 큰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처음에는 노팅엄 저택에 압도되었다가, 서글서글한 매들린의 미소를 보며 안정감을 찾아갔다.
그들의 상상에서의 매들린 로엔필드는 창백한 비련의 여성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양 뺨에 홍조 가득한 건강한 여자였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눈치였다.
그러한 손님들의 방문에 호기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누구나 다른 이의 몰락을 구경하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까.
그들은 매들린을 흘깃흘깃 곁눈질하면서 ‘자. 이제 안주인이 건강한 건 확인했으니 그 유명한 유령 백작은 언제 나올까.’ 식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렇게 다과회가 한창 순조롭게 이어져가고 있을 때였다. 매들린이 작은 초인종을 울렸다.
서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호스트인 매들린 쪽을 쳐다봤다. 흠흠. 매들린은 조심스럽게 목청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았다.
“자, 이제 같이 제가 준비한 영화를 보러 가요.”
그녀가 다소 수줍게 제안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백작이 사용인의 부축을 받은 채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일순 군중의 숨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매들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
매들린이 계단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말이지 남자가 무리해서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온 백작이 제 부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계단 아래서 자신을 지켜보는 손님들에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저택의 주인인 이안 노팅엄입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가진 최고의 옷을 입은 남자는 어째 평소의 음울한 은둔자 이미지와는 다르게 세련되었다.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는…윤이 났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어도, 아니, 오히려 전성기와는 다른 이채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남자가 얼마나 애써서 태연한 척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뒤틀린 진주처럼 기이한 매력을 띤 백작의 모습에 압도된 것은 매들린뿐만이 아니었다. 좌중의 사람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마다 백작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하느라 바빴다.
“같이 가지.”
그 말과 함께 이안이 목발을 잡지 않은 한 손으로 매들린의 팔을 감았다. 그 능숙한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않았으나 매들린은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의 팔에 걸린 남자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 * *
예배당까지는 무척이나 가까웠지만, 백작이 움직이기에는 불편할 수 있었다. 매들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백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휠체어가 필요하지 않나요.”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들은 타인이 보기에는 꽤 다정한 부부였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서로에게 의지하는 남녀. 진실과 먼 이미지. 그러나 그 연기에, 매들린조차 속아 넘어갈 지경이었다.
지금 자신에게 손을 맡긴 남자와 귓속말을 나누는 모습이 이상하게 익숙하고 편안했다. 앞으로 이렇게 조금씩 가까워졌으면 하는 기대가 생길 정도였다.
그들은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손님들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남자가 손을 떨던 감촉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매들린이 조심스럽고 확실하게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당신 혼자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도 힘든 일이오.”
그가 대번에 일축했다.
“그래도…”
“…영화가 보고 싶기도 했고.”
그가 말끝을 흐렸다. 어둠 속이라서 그의 붉어진 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매들린의 미소도 어둠 속에 묻혔다. 하지만 그 온기만큼은 서로가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예배당에 모두가 들어서자, 영상기사가 필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피아니스트가 경쾌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현악단이 유쾌한 반주를 넣었다. 명멸하는 스크린 빛을 받아 사람들의 얼굴이 번뜩였다.
매들린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침착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감내하는 남편이 있었다. 흉지지 않은 얼굴의 반쪽에는 이상한 감정들이 응어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날것의 무언가라서, 매들린은 서둘러 다시 정면의 화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버스터 키튼 감독의 <제너럴>.
런던에는 유성영화를 벌써 상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무성영화도 여전히 개봉 중이었다. 지금 상영하는 이 무성영화도 미국에서 건너온 물건이었다.
버스터 키튼. 유명한 무언극 배우라는데, 사실 매들린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지 않아도 말이다. 그녀는 남편을 체크하는 것도 잊을 뻔할 정도로 영화에 몰입해 있었다.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운 대목에서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했으나, 백작은 웃지 않았다. 그는 다채로운 흑백 화면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몰입해 있는 건지, 아니면 권태로운 건지 구별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창 영화가 막바지에 달할 무렵이었다. 남부군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포탄을 쏘는 장면이 나왔다.
-쿵.
그와 동시에 매들린 옆에서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무성영화라 했는데. 관중석에 앉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매들린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비명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안이, 그만 꺼꾸러지고 만 것이었다.
“나는… 괜찮…”
남자가 끙, 억눌린 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매들린이 서둘러 쓰러진 남자 옆에 앉았다. 그녀가 남자를 어떻게든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남자의 몸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발작이었다. 순간, 매들린의 심장이 멈춰버린 듯했다. 박동을 멈춘 심장이 끝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예배당이 난리가 났건, 사람들이 웅성거리건, 매들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허둥지둥하면서 남자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고 끙끙거리던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 곁으로 다가오더니 이안 옆에 몸을 웅크렸다.
“부인. 진정하세요. 저는 의사입니다.”
가까이로 다가간 남자가 매들린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 세웠다. 그가 익숙한 손길로 쓰러진 백작의 맥박과 호흡을 재기 시작했다.
“다들 진정하시고.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백작께서는 증후군에 빠져있을 뿐입니다.”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팔을 휘두르며 사용인들을 불러모은 그가 차분하게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지금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건가. 빨리 백작 각하를 침실로 모시게.”
* * *
영화 상영은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알 바 아니었다. 세바스천이 알아서 수습했을 것이다. 매들린은 당장 호스트로서의 책임감보다는 쓰러진 이안이 걱정되어서 죽을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그의 얼굴은 연보랏빛으로 창백했다. 손과 발끝이 경련하고 있었다. 침대가에 앉은 ‘의사’는 백작의 손목의 맥을 잡고 이것저것을 확인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부군께서는 ‘포탄 충격’의 후유증을 앓고 계시는 것 같군요.”
포탄 충격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
매들린이 할 말을 잃은 채로 입만 뻐금거리자, 의사는 안심하라는 듯 미간에 힘을 풀었다.
“신경증의 일종… 아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안정을 취하고,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것만 보지 않는다면 말이죠.”
“…제가 바보 같은 일을 벌였군요.”
영화 같은 걸 보는 게 아니었어요. 애초에 이런 파티를 여는 게 아니었어요. 이안처럼 하얗게 질린 매들린이 중얼거렸다.
“부인을 책망하려는 의도로 한 말은 아닙니다. 신경적인 분야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바가 많으니까요.”
의사의 단정한 금발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멀끔한 얼굴에서는 다정함과 냉정함이 개개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표본을 살피는 나비처럼, 그는 기민하게 기진한 백작을 살폈다.
“선생님, 정말 괜찮을까요?”
충격이 휩쓸고 지나가자 이제는 후회의 눈물이 비집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매들린은 고개를 돌렸다. 이런 한심한 안주인이라니, 한심하고 한심해서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보다 부인께서도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남자가 일어섰다. 일어서고는 곧장 품 안에서 명함을 꺼냈다.
“제 이름은 코넬 알링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