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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훈풍 (16/121)

15화. 훈풍

-- 스물여섯 살의 매들린.

바람이 불던 밤, 백작의 침대 옆에서 까무룩 잠이 든 이후, 둘의 사이에는 제법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매들린으로서는 이를 반겨야 할지 기겁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작이 매들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 시작이었다.

오후에 홀로 망중한을 즐기며 차를 마시고 있는 매들린에게로 다가온 것이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라든지 우울한 표정이라든지, 평소의 백작과 같았으나 무언가가 달랐다.

“코리는 괜찮소?”

“…….”

매들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찻잔을 떨어뜨려 깰 뻔했다. 남자의 입에서 강아지의 이름이 나온 게 신기할 뿐만 아니라 그가 강아지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매들린이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 말썽꾸러기는 잘 있어요.”

“다행이군.”

그 말과 함께 백작이 흠흠. 두어 번 헛기침했다. 매들린의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속셈이지?’

남자의 말에는 무언가 의도가 있을 터였다. 한심한 잡담 따위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니.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남자가 매들린 앞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던가.”

매들린의 얼굴이 완연한 빨간색으로 익었다. 일전의 ‘가출’을 굳이 끄집어내고 있다.

“아직도 그 일로 화가 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지난밤에도 제 팔목을 잡으며 가지 말라느니 했던 게 생각났다. 이유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 사람이 아니었다. 매들린은 잠깐 긴장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다소 해쓱한 얼굴인 남자는 그나마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가 느릿느릿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한다면 자유롭게 다녀도 되오.” 

막고 싶지 않소. 그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음... 매들린이 한 쪽 눈썹을 의문 가득히 들어 올렸다.

“뭐...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일은 아니겠죠?”

의심이 반 섞인 나머지 날카로운 답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전에도 인근 마을은 자주 나다니고는 했으나, 언제나 사용인을 대동한 채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제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야기렷다.

“이전에는 그저 걱정이 됐을 따름이었소. 세상은 안전한 곳이 아니니까.”

‘그러면 그렇다 말을 처음부터 하든가. 저이가 왜 이렇게 의뭉스럽게 굴지.’

매들린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이 한숨을 쉬며 다음 한마디를 내뱉었다.

“파티 참석도, 모임도 당신이 마음 가는 대로 하시오.”

“……”

아무래도 눈앞의 남자는 진심인듯했다. 매들린을 바라보지 않고 바깥을 흘겨보는 눈길이, 이 말을 꺼내는 것조차 다소 부담스러운듯했다.

매들린이 예상치 못한 일격에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요?”

그녀가 완전히 식어버린 찻잔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변덕이라고는 부리지 않는 일관된 기질의 남자였지만, 이번에 제대로 확언을 받고 싶었다. 혹시 나중에 말이라도 바꾸면 안 되니까. 

“당신까지 내 진창 속에 빠뜨리고 싶지 않소.”

“진창이라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매들린이 말끝을 흐렸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으나 꽤나 괴팍한 단어 선정이었다. 제 처지를 그렇게 비하할 것은 없지 않은가. 

“……말하지 않는다고 사실이 아닌 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매들린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두통이 이는지 살짝 눈을 내리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발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백작이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사라지는 찰나였다. 매들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안.”

“…….” 

남자는 몸을 가눈 것이 힘든 듯, 매들린을 쳐다보지 않았다.

“원한다면 장미는 언제나 꺾어도 돼요. 이 정원은 당신 거기도 해요.”

매들린 자신조차도 왜 튀어나왔는지 모를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맙소.”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사라졌다.

그 짧다면 짧은 대화를 기점으로, 부부간의 사이는 (어디까지나 전과 비교하여) 완만해져 갔다. 매들린은 하루에 한 번씩 백작의 서재를 방문했다. 어디까지나 동태를 살피고 진찰을 하기 위해서라는 미명을 달았다.

사실 백작의 서재는 꽤 괜찮은 도서관이었다. 매들린은 백작이 문서를 살피는 동안 책장 가까이에 서서 마음에 드는 양장본을 골라갔다.

“설마 이게 여기 있다구요?”

그녀는 손끝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질감을 느끼며 한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웬만하면 일하는 남편을 가만히 두고 싶었으나, 워낙에 놀라운 발견이었다.

“‘탬벌레인 대왕’ 초판본 말이군. 어차피 작가가 죽은 뒤 한참 뒤에 인쇄된 거요.”

“…흠….”

그렇다 해도 어림잡아 17세기 물건으로 보이는데. 여기 이렇게 아무렇게나 있어도 되나. 물론 관리는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만.

매들린은 호들갑을 떠는 자신에 대한 백작의 덤덤한 반응에, 괜히 무안해지고 말았다. 다시 책을 꽂아 넣는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남자가 무심히 제안해왔다.

“원한다면 가지고 가서 읽어도 좋아.”

“……제 책처럼요?”

그녀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남녀의 시선이 교차했다. 

흉터로 덮이지 않은 이안의 한쪽 눈에서 영문 모를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불쾌함으로 오인한 매들린이 괜히 중언부언했다.

“뭐…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몇 년 전에 재산법도 개정이 되었고… 당신 걸 태우거나 찢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조심히 다룰게요.”

“당신 거지.”

“…….”

“여기 있는 건 전부. 당신의 정원이 내 정원이듯, 내 서재도 당신의 서재지.”

그가 그 엄청난 말을 툭, 던지고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매들린의 얼굴이 화악 익었다. 무언가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두뇌에 입력이 잘 안 됐다. 

그날 그녀는 책을 한 권도 가져가지 않았다.

* * *

백작과 매들린 사이에 원만한 난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사용인들조차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잔뜩 긴장한 상태로 매들린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전에 그들이 불친절했던 것은 단연코 아니었지만, 정체 모를 벽이 늘 있었는데, 그것이 좀 허물어진 느낌이었다.

물론 모든 게 단순한 착각일 여지는 있었다. 변한 건 사람들이 아니라 매들린의 마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확실히 남자가 전처럼 무섭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봐도 끔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틀리는 입매라든가, 음울한 눈동자를 봐도, 그러려니 싶은 익숙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원초적인 혐오감이라든지 적개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대화 중간중간에 선을 넘나드는 긴장감이 여전히 드러나곤 했다.

이안은 무거운 사람이었고, 매들린은 그가 가하는 하중이 버거웠다.

얼마 안 되는 대화 가운데서도 이안의 냉혹한 가치관이 엿보여, 그 점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언제고 또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구는 남자의 모습이 기이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쇠락이요 부패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전환시켜 보고 싶었다. 뭔가 궁리해내야 했다. 

어떻게?

어쩌면……

매들린의 머릿속에서 다시 다채로운 빛깔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 * *

“마님. 그건 정말 무리입니다.”

“…진짜요?”

매들린이 눈을 반짝이며 세바스천을 바라봤다. 그를 간절하게 쳐다보면 뭐라도 떨어질 것처럼 말이다.

저택 근처에 있는 빈 예배당을 임시 영화관으로 꾸미고,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을 초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저택 근처 예배당이야 백 년 가까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었고, 상영할 기자재, 필름이나 인력은 런던에서 구해오면 되며, 날짜야 넉넉하게 잡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난색을 표했다. 일단 사용인들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세바스천은 대놓고 난감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나마 젊은 사용인들의 눈은 반짝반짝했다. 대놓고 티 내지 못하는 기대감 같은 것들이 그들의 눈동자에 여실했다.

매들린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획을 착실하게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그녀의 내면에서 의지라는 것이 샘솟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강렬한 마음의 충동이었다. 

백작의 허락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칼자루를 넘겨주지 않았는가. 모처럼의 기회를 아무것도 안 하며 낭비할 수는 없었다.

저택을 재단장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미 깨끗한 저택이었지만,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만은 어째 단시간에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헌팅 트로피에 태피스트리 천을 걸어두고, 의자 천을 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택을 단장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당을 영화관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의자를 놓고, 회벽을 칠한 흰 벽에다 스크린을 설치했다. 빛바랜 스테인드글라스를 두꺼운 천으로 덮었다.

얼추 준비가 끝났을 때, 매들린은 결심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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