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노팅엄가의 초대
매들린은 가만히 앉아 치장을 받았다. 아직 팔지 않은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유일하게 남은 하녀의 손길을 받아 단장했다. 머리는 단정하게 땋아 올렸다.
“아씨는 장밋빛 볼이 참 매력인데… 그에 맞는 분홍색 드레스가 아직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요.”
매들린이 위로한답시고 씩씩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지금 입은 이 진녹색 드레스가 더 잘 맞을 터였다. 최대한 비극적인 분위기를 내야 하는데 발랄한 분홍색 옷을 입고 나갈 수 없지 않은가.
* * *
다시 찾은 노팅엄 저택은 기억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음산한 분위기라고는 없이, 고풍스럽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저택이었다. 앞에 있는 거대한 분수상에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매들린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죄어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장미정원은 없었고 그곳에는 테니스 경기장이 차려져 있었다. 태양은 부녀의 심정도 모른 채로 밝게 내리쬐고 있었다.
매들린은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저택에 당도했다. 대문 앞에 늘어선 사용인들의 모습이 퍽 친숙했다.
엄숙한 얼굴의 집사장 세바스천, 역시나 말수 없지만 상냥한 릴리벳까지. 그때의 그 사용인들이 조금 더 젊은 얼굴로 있는 것을 보니, 괜스레 말을 붙이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의 표정 역시 전부 다 한결 온화해 보였다. 새삼스럽게 노팅엄 저택의 변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택에 닥친 비극의 무게까지.
어쩐지 어색한 얼굴로 집사장의 안내를 받았다. 사용인들에 이어 노팅엄 백작과 가솔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노팅엄 가문의 사람들을 이렇게 만난 것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당연했다. 전 생애에서 그들은 죽거나 다쳤거나, 사라졌으니까. 지금 그들은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로 로엔필드 부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노팅엄 백작, 루이스 노팅엄이 먼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초상화와 흑백 사진 속에서만 보아왔던 남자는 창백하고 초로한 사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냉혹한 사업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옆을 캐서린 노팅엄 백작 부인이 함께했다. 조용하고 상냥한 여인은 ‘노팅엄 가문의 비극’ 이후로 별장에 줄곧 은거했다. 지금은 그런 불행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한 채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부부의 뒤편에는 노팅엄 삼 남매가 있었다. 장남인 이안 노팅엄은 백작 뒤에 서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릭은 즐거워 보였고, 이사벨은 여전히 매들린을 향해 의뭉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자. 들어가시죠. 선생님의 방문을 고대했습니다.”
파리한 안색의 노팅엄 백작이 남작과 매들린을 안으로 들였다. 매들린은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녀가 아닌 그 누가 봐도 백작이 오래 살 성싶지는 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병환이 꽤 깊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세 젊은이의 활달함에도 불구하고 저택에는 약간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백작은 시종일관 최선을 다해 남작 일가를 맞이했다. 초대의 본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룬 채로, 대화의 주제를 빙빙 돌려댔다.
그 탓에 천성적으로 느긋한 성격인 로엔필드 남작마저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주먹을 꽉 쥔다든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긴장하는 것이었다.
매들린 역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팅엄 일가가 무슨 연유로 파산한 자신과 아버지를 초대했는지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 답답했다. 그녀와 이안 노팅엄의 눈이 이따금 마주쳤다. 그는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만족스러움. 득의만면함이 살짝 묻어나오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매들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자, 이안이 고개를 기울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백작이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 이제… 우리들은 자리를 비켜주어야겠군요.”
그 말과 함께 모두가 짜고 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 노팅엄을 제외하고.
매들린은 어리둥절했다. 노팅엄 가족 사람들이 유유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로엔필드 남작 역시 허둥지둥 그들을 따라 방을 나갔다. 그러면서 딸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예요?’ 매들린이 입 모양으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빠져나간 뒤 문이 닫혔다. 매들린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굳이 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일어날 테니까요.”
이안 노팅엄이 그 말과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겁니다.”
그가 매들린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머리로 이해한 매들린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할 수 있다면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도대체…”
“놀라셨습니까.”
이안이 묵묵히 말했다. 그가 품에서 능숙하게 반지를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파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죠?”
매들린이 황당한 나머지 목소리를 높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제 집안이 파산한 게 지금 남자가 벌이고 있는 이 짓거리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내가 당신들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단 이야기입니다. 부모님까지 설득했으니 더 따져볼 건 없겠죠. 매들린 로엔필드 양.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가 네모난 반지함을 열었다. 그 속에는 천박하리만치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있었다. 매들린이 작게 숨을 멈췄다.
“아버지의 상태는 당신도 보았겠죠.”
“…….”
“잘못되기 전에 매듭짓고 싶습니다. 적어도 당신께서 보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의 결혼을요?”
매들린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뻔뻔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다. 매들린의 그런 반응에, 이안의 얼굴에서 표정이랄 게 사라졌다. 완전히 백지만 남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 사랑하냐고요?”
매들린이 재차 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남자의 지금 행동거지를 정당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안 노팅엄이 곧바로 대답했다.
“사랑이라. 그건 변덕스러운 표현 아닙니까. 그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
“당신의 이상한 철학자 같은 표현, 표정,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아버지와 달리-이 표현은 어쩔 수 없군요-, 나름 이성적인 면모도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갑작스러운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재정적인 위험에 처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방법밖에는 없겠더군요. 매들린 로엔필드. 당신을 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결혼으로.
“…….”
척수에 차가운 물을 부은 것처럼 전신이 오싹했다.
“돈으로 나를 사려는 건, 언제나 똑같군요.”
결국,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못된 말이. 그 말에 의아하다는 듯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런 적이-.”
“이안. 나는 오늘 프러포즈를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겁니까? 당신에게 갑작스러운 일이란 건 이해합니다.”
이안이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그가 매들린에게로 바투 붙자 그의 그림자가 매들린의 전신을 뒤덮었다.
남자는 살짝 화가 나 있었다. 아니, 용케도 참고 있었다. 거절이라고는 처음 당해본 것일 터. 그는 화를 내기에는 너무나도 당황한 상태였던 거다. 매들린의 이런 냉정한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요. 아버지의 빚 때문에 팔려가듯 결혼하고 싶지는 않아요.”
“오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이안 노팅엄, 당신의 제안을…”
“같은 실수라니. 로엔필드 양,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지금 나는 당신을 욕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제안이 아닙니까?”
그렇게 남자는 그나마 유지해오던 평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 모습에서 매들린은 익숙함을 느꼈다. 자신을 붙잡던 백작을 떠올렸던 것이다.
역겨워해야 할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무참하게 서글펐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본성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남자가 자신의 오만 속에 빠져 살든 말든,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마스터 노팅엄.”
매들린이 저도 모르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이 남자를 얼마나 동요시킬지, 알지 못하는 채로 말이다. 그녀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과 저는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로엔필드 양, 이유라도 알면 안 됩니까? 바보가 된 기분입니다.”
이안이 손을 뻗어 매들린의 손등을 쥐었다. 그 큰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아, 당혹감이 역력했다.
“서로를 안 좋은 길로 이끄는 유형이니까요.”
“…….”
이안 노팅엄이 조용히 매들린의 얼굴을 훑었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매들린은 동화 속 인어공주처럼 입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남자에게 전할 수 없었다. 당신은 이런 행동들 때문에 나를 잃었던 건데…. 안타까웠다.
고개를 먼저 돌린 것은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에 수치심과 일그러진 분노가 가득했다. 그가 그렇게 곧장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남자는 사라졌는데, 어째서인지 남자의 그림자만은 오롯이 남아 매들린을 묶어놓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정확히 그녀가 스물여섯 살일 때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