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파산
“아버지?”
그렇게 여느 때처럼 촘촘하게 짜인 사교계의 스케줄에 맞추어 만찬회에서 돌아온 때였다. 매들린은 타운하우스에 깔린 적요를 눈치챘다. 수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 불길하다. 그녀는 재빨리 하녀 도릿을 불렀다.
“도릿, 아버지께서 주무시고 계시나요? 왜 기척이 없으시죠?”
“저…그것이…”
도릿이 주저했다. 그녀의 커다란 파란 눈에 금방 물기가 차올랐다. 분명 무언가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겠죠?”
“…아가씨…”
눈물을 글썽거리던 도릿이 갑자기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어떡해요…”
매들린은 곧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사고를 쳤음을 직감했다. 그놈의 투자를 막았다고 일이 해결될 거였으면, 애초에 그런 결정을 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결국, 그 사달을 낼 아비였다.
그녀는 훌쩍훌쩍 눈가를 훔치는 도릿을 놔두고 황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아버지의 방을 노크도 없이 열자, 침대 위에 앓아누운 뒷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매들린… 소란스럽구나. 숙녀가 되어가지고는….”
지금 그게 문제야? 매들린은 속으로 터져 나오는 욕을 삼킨 채로, 침착하게 상황을 따져 묻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그건…아니…, 그게 말이다….”
매들린을 향해 돌아누운 로엔필드 남작이 급격하게 창백해진 얼굴로 울먹이기 시작했다.
“내가 죽일 놈이다…내가 죽일 놈이야….”
“지금 누가 죽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진정하세요.”
매들린은 재빨리 의자를 침대 가로 끌고 앉았다. 그녀가 아버지의 손을 다소 아프지만 굳게 다잡았다.
“일단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파산했단다.”
남작이 해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실신했다.
‘……정말.’
미래를 안다는 게 무슨 소용일까. 이토록 전과 같이 흘러간다면 말이다.
매들린은 격심한 두통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아버지가 거액을 투자한 무역회사가 도산했다. 농장 대신 무역회사라. 꿩 대신 닭이란 건지.
전 재산이 걸려있을 뿐만 아니라 소정의 채무까지 남아있는 상태였다. 빚의 변제일은 넉넉했으나, 로엔필드 저택과 영지를 몽땅 팔아야 겨우 갚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에서 문제였다.
빚을 갚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뒤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완전히 막막한 상태였다. 영지 없는 남작 부녀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영지 없는 귀족이 애초에 성립 가능한 것일까?
남작은 평생 손에 물 하나 묻히고 살지 않았다. 옥스포드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그는, 평생을 고상한 토론과 유희에 힘쓴 딜레탕트였다.
매들린 역시 크게 다를 것 없이 무능력했다. 바보 같았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바깥세상과 유리되어 살았다. 전생에 걸쳐 남작과 백작의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살아온 그녀가 위기를 타진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 매들린은 런던의 은행들을 돌아다니며 중얼거렸다. 드레스를 입고 양산을 든 어린 숙녀가 혼자 은행가를 돌아다니는 모양이 퍽 이상한지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아버지가 자리를 보전하며 끙끙 앓는 동안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이래서는 인생을 다시 사는 의미가 없어.’
게다가 상황이 더 안 좋은 면도 있었다. 아버지는 이전의 삶보다 이른 시점에 파산을 했다. 차라리 뭐든 하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다른 무리수를 두게 내버려 둔 꼴이 됐다.
그리고 그렇게 숨 막히는 일주일이 흘렀다. 부녀는 허겁지겁 런던의 타운하우스를 처분하기로 했다. 매각 절차는 복잡했고 구비해야 할 서류도 많았으나 따로 전문가를 고용하기는 여의치 않았다.
‘귀족이 아니라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인 쪽이 맞겠어.’
이것도 매들린에게는 일종의 교육이었다. 사는 건 쉽지만 파는 건 어렵다. 흥정할 여유가 없을 때는 손해를 입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배우는 건 질색이었지만, 교훈은 교훈이었다.
일이 있은 지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지만, 무슨 일이냐는 안부를 묻는 서신 하나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로엔필드 남작 부녀가 파산했다는 소문 말이다.
그 씀씀이가 후하다고 소문난 남작이 결국에는 그렇게 됐다는 소문이겠지.
‘차라리 이게 나은 걸지도 몰라.’
몰락을 앞당기는 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전 인생에서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빚은 없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무슨 일이라도 닥치는 대로 한다면 구원의 빛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구원의 빛이,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곳에서 올 줄은 매들린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편지가 왔다. 단정한 필치로 주소가 인쇄된 겉봉에는 밀랍을 녹여 굳힌 봉인이 있었다. 봉인에는 머리가 두 개인 사자, 노팅엄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것을 받아든 남작의 손이 덜덜 떨렸다.
로엔필드 남작은 체통도 잃은 채 허겁지겁 편지를 뜯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편지의 내용인즉슨, 돈이 썩어나도록 많은 노팅엄 백작가에서 로엔필드 부녀를 ‘콕’ 집어 초대한다는 이야기였다.
따로 파티가 있는 것도, 만찬회가 있는 것도 아닌데, 로엔필드 부녀만을 초대하는 특별한 제안이라니. 적잖이 수상했다.
‘혹시….’
자신의 딸이 노팅엄 백작의 장남과 춤을 자주 춘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
후작부인의 말로는 이안과 매들린의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목격했다고 했다.
신사로서 애써 모른 척하고는 있었으나 솔직히 말해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그렇지않아도 백작의 아들이 제 딸을 가지고 간을 보는가 싶어서 초조했던 참이었다.
물론 이안 노팅엄은 공인된 신사다. 그러나 혈기왕성하고 성공한 남자들이 어린 여자들을 가지고 어떻게 못되게 굴 수 있는지, 남작은 익히 알고 있었다.
로엔필드 남작이 어렸을 때는 혼기 찬 남녀 둘이 같이 홀로 남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례한 행위였었다. 지금이야 분위기가 많이 자유스러워졌다지만, 사교계는 여전히 고루한 가십들과 체면치레로 가득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안 노팅엄과 엮이는 건 위험부담이 컸다.
그러나 달리 말해, 만약 자신의 딸 매들린이 이안 노팅엄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면?
그렇다면 남작은, 아니, 로엔필드 가문은 단숨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원되는 꼴이었다.
그러나 로엔필드 남작은 애써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알았다. 자신이 의중을 비치면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매들린이 괜히 찬물을 끼얹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몸이 달아있는 걸 들켰다가는 백작가에서 되레 퇴짜를 놓을 수도 있었다. 그는 돈 관리에 있어서 신중함은 없었으나, 이런 혼담에 있어서는 무척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둔 뒤, 두 손을 모아 생전 건성으로 찾던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를 드렸다.
* * *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불안했다. 로엔필드 가문의 파산 소식이 런던 사교계에 퍼질 대로 퍼진 상황에서, 노팅엄 가문의 친서가 도착했다. 타이밍이 너무나 수상했다. 게다가 ‘단둘’만 초대한다 했다. 더더욱 수상했다.
‘어쩌면 이사벨 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그날의, 이안의 부탁을 떠올렸다. 관련해서 매들린으로부터 정보를 더 캐내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물론, 단순히 친교적 의미에서 초대장을 보낸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노팅엄 가문 사람들과 자주 말을 섞어본 것도 사실이니까. 매들린은 자신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으나,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까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거절의 편지를 써야겠어요.”
매들린이 편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백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니? 딸아.”
“아버지. 아시다시피 저희가 어디 놀러 다닐 형편은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 타운하우스에 있는 세간살이도 다 정리해서 팔아야죠.”
“…바보 같은 소리 말렴, 매들린.”
“바보 같은 소리라뇨?”
매들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로엔필드 남작이 냉정한 눈초리로 자신의 딸을 노려봤다.
“이 서한은 사실상 백작의 장남이 ‘너’에게 보낸 초대장이다.”
“그게 뭐 어때서요? 그는 원체 인기가 많은 사람이에요. 누구에게나 초대장을 보내는 사람일 거라구요.”
분명, 이 초대장을 직접 쓰지도 않았을걸요? 매들린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아버지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우리가 이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는 그의 아둔함에 열불이 터질 것 같았다.
“오. 매들린. 내 딸이지만 너는 너무나도 둔하구나.”
로엔필드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매들린의 손에 든 초대장을 앙칼지게 낚아챘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걸 알면서도 보낸 초대장이다. 이럴 때 괜히 움츠러드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야.”
“…….”
그 말에도 일리가 있긴 했다. 망해간다고 해서 움츠러들고 먼저 낯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뻔뻔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나은 방법일지도 몰랐다. 당장의 체면은 손상되겠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니었으니까.
“좋아요. 아버지. 하지만 너무 많이 기대해서는 안 될 일이에요. 노팅엄 가문은 부유하지만, 관대하진 않아요. 보나 마나 저희가 어떻게 지내나, 측은함에서 우러난 초대일 거예요.”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장 타운하우스를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중고 가구매장에는 이미 몰락 귀족들의 장식적인 고가구로 가득했다. 헐값에 내놓아도 구닥다리라며 팔리지도 않는 형편이었다.
가구들의 가격과, 바꿀 수 없는 운명의 비가역적 성질. 매들린은 그 속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해진 스스로를 느꼈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차피 거대한 흐름 속 순리대로 흘러갈 일이었다면?
매들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사회는 좁고, 그녀 앞으로 난 길은 더더욱 좁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