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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왜 그러실까 (13/121)

12화. 왜 그러실까

그렇게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동작으로 매들린을 두 남자 사이에서 낚아챈 이사벨은, 아무도 없는 회랑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중얼거렸다. 

“난 사실 드레스 따위는 질색이라고요. 봉마르셰 백화점이니 하는 곳도 싫고.”

“…아 …그렇군요.”

“오로지, 당신을 그 어색한 지옥 속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꾸며낸 말이에요. 새로운 카탈로그 같은 건 없어요.”

“아… 네.”

그러시군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매들린을 홱 돌아본 이사벨이 의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영매 같은 건 아니죠?”

“네?”

“귀신 보는 사람 말이에요. 타이타닉의 침몰을 예측하고 죽은 사람이랑 소통하는 그런 사람.”

“아닐걸요?”

점입가경이었다. 차라리 아까 전으로 돌아가서 계속 사냥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긴, 나는 유물론자니까 귀신 같은 건 당연히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 정말 신경 쓰인다고요! 내 애인 이름을 맞추질 않나. 심지어, 앞으로 내가 할 행동 같은 걸… 어떻게….”

유물론자? 유물을 믿는다는 건가. 매들린은 알쏭달쏭했으나, 이사벨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쯤은 알았다. 앞으로 할 행동을 알았단 이야기는. 

“죽을 생각이었나요?”

역시 그날. 과속하거나, 핸들을 돌려서. 

“…….”

이사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꼭 이안을 닮아있었다. 엄청나게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와 굵은 눈썹 같은 것이 말이다. 매들린이 표정을 풀고 차근차근 그녀를 달랬다.

“일단 바보 같은 짓이란 건 알죠? 고작 가족들을 화나게 하려고 연인과 동반자살…”

“당신이 뭘 안다고요!”

이사벨이 쏘아붙였다. 하지만 큰소리는 나지 않았다. 

“…….”

이번에는 매들린 쪽에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문 그녀를 본 이사벨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냥 좀 신나게 밟아볼까 싶었지. 술이 많이 취한 상태이기도 했고요.”

“술에 취해서 과속 운전하는 것도 바보 같은 생각이지요.”

“보기와는 다르게 참 얄밉게 말하네. 당신, 예의 바른 아가씨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생은 딱히 체면 차리고 싶지 않아서요.”

사교계도 은근히 대충하고 있고. 낮게 중얼거리는 매들린을 보며 이사벨이 뭐 저런 사람이 있냐는 눈길로 바라봤다. 

“당신이랑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

“네?”

“아니에요. 헛소리나 하는 게 꼭 어릴 적 친구를 닮아서요.”

이사벨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럭키 스트라이크였다. 

“어쩐지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 *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었다. 

후작부인이 옆에서 ‘혼기가 다 차면 너는 끝장이다.’ ‘사교 시즌이 세 번 지나면 너는 노처녀다.’ 중얼거리는 건 차라리 소음이었다. 이제 그 어느 소리에도 그다지 정신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타자기를 갖춰두고 때때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회계장부 정리하는 법까지 독학중이었다. 취미는 아니었고, 나름 삶의 방편이었다. 

매들린은 어떠한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직까진 그리 흔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흔해질 삶의 방식 말이다.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 풍족하게 누릴 건 누리고 사는 삶. 감히 그것을 바랐다. 

그러려면 일단 아버지가 물려주는 영지와 저택을 팔아치운 돈에다가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할 터였다. 

“흠.”

괴발개발한 회계장부를 보니, 절로 모골이 송연했다. 

역시 학교에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왜 학교도 가지 못하고, 피아노나 회화, 고전 그리스어를 가정교사에게 배웠는가. 

‘쓸모없어!’ 

궁벽해진 양갓집 규수들이 가정교사 노릇을 하던 것은 과거의 일이었다. 상류층도 학교에 가게 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양을 집에서 가르치는 일은 드물어지고 말았다. 

‘에라이 모르겠다. 젊고 사지 멀쩡하니까, 뭐든 되겠지.’ 매들린은 손에 쥐가 나기 전까지 타자를 치다가 책상에 엎드렸다.

‘죽기 전에 전쟁 직후 크게 오른 주식 10개는 외우고 죽었어야 했나.’

매들린은 제 생각에 스스로 어이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영국의 고성 안에서 장미만 키우는 거야말로 정말 다시 태어나는 이유가 없는, 쓸모없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대로 아는 거라고는 전쟁, 전쟁뿐이었다. 그 누구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사건 말이다.

* * *

이안 노팅엄이 기분이 안 좋은 건, 그러려니 싶은 일이었다. 매들린으로서는 별로 신경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시한폭탄처럼 굴고 있지, 이사벨도 일단은 노팅엄이라서 꺼림칙하지(하지만 그녀와 나누는 대화 자체는 재밌었다), 도무지 옛 결혼 상대에게 집착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저번에 매들린을 채간 건으로 지금까지 오빠가 화나 있어요. 믿을 수나 있나요?”

이사벨이 매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해가 안 가네요. 왜 그러실까요. 정말 쓸데없는 이유로 언짢으신 모양이네요.”

매들린이 영혼 없이 반문했다. 

“그거야말로, 정말이지, 참으로 마음에 드는 소리네요. 내가 정확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니까요?”

이상한 일이었다. 이사벨은 매들린이 이안에 대해서 대충 싫은 소리를 할 때마다 좋아죽었다. 남매라는 게 다 저리 서로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을 텐데, 신기했다. 

아무튼, 고작 그런 일로 이안 노팅엄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매들린이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더 웃긴 건, 자신이 기분 나쁘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자기는 그냥 살짝 졸릴 뿐이라나.”

이사벨이 웃겨 죽겠다며 낮게 깔깔거렸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시선이 제 쪽으로 꽂히는 것 같았다. 매들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한 박자 늦고 말았다.

‘이사벨 노팅엄이랑 친해져서 곤란하네.’

사실 이사벨의 경우는 친구를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매들린에게는 선택권 같은 건 없었다. 한참 동안 이사벨이 떠들게 내버려 둔 매들린은 잠시 후 사교계 어르신들의 오페라 맞장구를 쳐주느라 시달렸다. 

어느덧 다시 혼자 남겨진 매들린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평화를 느끼며,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잠시였다. 

“요즘 자주 피곤하시군요.”

“아. 깜짝이야.” 

매들린의 무례는 이제 아주 노골적이었다. 이안 노팅엄이 살짝 허. 소리를 냈다. 그녀가 대놓고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 재밌다는 투였다. 

“이쯤 되면 런던 공기가 안 맞으시는 건 아닙니까. 만날 때마다 졸고 계시는군요.”

“런던 공기가 별로인 건 사실이지만…, 밤에 공부를 하고 있어서요.”

“고전 그리스어 공부라도 하시는 모양이군요.”

오호라. 매들린이 살짝 남자를 곁눈질했다. 표정에 변화가 하나도 없이 제 말을 받아치는 걸 보니, 싸움을 맞받아칠 준비가 된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스 비극이랑 얼추 비슷하긴 하네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피할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잠을 못 잔답니다.”

“……?”

이안이 저런 바보 같은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매들린을 바라봤다. 

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의 이안 노팅엄이라니. 왠지 신선했다. 젊을 뿐만 아니라 앳되고, 순진하기까지 하다. 그런 얼굴에 살짝 마음이 누그러진 매들린이 남자에게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선뜻 보여주었다. 

“쉽게 말할게요. 먹고사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걸 왜 걱정합니까.”

이사벨이랑 놀더니 완전히 물들었군요.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헛소리만 하는 아가씨인 줄 알았더라면, 그때 춤을 신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안이 냉랭하게 투덜거렸지만, 행동거지는 달랐다. 그가 어느새 그녀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았기 때문이었다.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생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혹시 로엔필드 경 때문입니까.”

이안이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의 무뚝뚝한 어조에는 흔들림이 없어서,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제 아버지의 ‘넉넉한’ 씀씀이는 런던에서 비밀도 아닌가 봐요.”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로엔필드 남작이 사치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교계에서 기정사실인 모양이었다. 이안조차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래도, 영지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만 해도 어느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물론, 사치만 하지 않는다면. 

“믿을 수 없지요. 곡물가는 해가 다르게 내려가고 있고, 영지는 야금야금 팔리고 있는걸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사치를 안 한다는 보장이 있나요?”

헛. 매들린이 대놓고 제 아버지를 비판하는 것을 들은 이안이 살짝 헛기침했다. 물을 마시고 있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내가 너무 아버지에 대해서 심하게 말하고 있나.’ 

어쩌면 지금 매들린의 지나친 현실주의는, 지난 생의 이안이 몸소 가르쳐준 것일 수도 있었다. 자유와 재산은 직결되어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영애께서 고군분투하기보다는, 그것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현실적으로.”

그 말을 듣고서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지금 이안은 나름대로 자신의 허례허식을 전부 털어내고 말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진심 어린 충고였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딱히 동의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구원자라. 글쎄요. 저는 오로지 저 자신에 의지해 살아나가고 싶어요.”

“이사벨이랑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안이 들으나 마나 뻔한 소리라는 듯이 살짝 비웃었다. 그 모습을 본 매들린은 살짝 감정이 상했다. 

“자신이 싫어서, 누군가를 싫어한 적이 있으신가요.”

“…….”

이안이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매들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잘 빚은 듯 흠 없이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동요만이 어려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제 안의 힘을 키워나가고 싶은 거예요.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딱히 이해받기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떠오른 깨달음을, 당장 남자에게 내뱉지 않으면 안 되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는 자각이 뒤늦게 찾아오고 말았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고, 매들린의 얼굴이 그만 빨갛게 익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놀리거나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고개를 과묵하게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듯 끄덕이더니…

“당신은…. 뭐, 아닙니다. 이만. 좋은 밤 되십시오.” 

말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선,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매들린은 그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모를 낯익음에 몸을 떨었다. 너무 많은 사실을 이야기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설명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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