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사냥, 재밌습니다
지금의 남자에게는 죄가 없었다. 부서지지 않은, 그저 오만할 뿐인 남자. 어찌 됐든 이곳의 세계에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죠.”
이안이 살풋 웃었다. 냉엄한 얼굴에 걸맞은 적당히 미지근한 온도의 미소였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너무 싫어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건 서로에게 손해 아닐까요.”
“손해라니요.”
매들린이 멋쩍게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이안이 말했다.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악연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네요.”
“한 치도 들어갈 틈을 내어주시지 않는군요.”
이안이 한숨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가 살짝 상반신을 기울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로엔필드 양의 의사를 십분 존중하여,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후퇴하지 않을 겁니다.”
이안 노팅엄이 홀로 들어간 뒤, 매들린은 다시 관목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밀회가 끝이 난 모양인지, 아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엔 어둠이 이미 내려앉은 뒤였다. 사람과 나무의 그림자가 뒤섞여 한 치도 분간할 수 없었다.
공기 중에 여름의 풀 내음이 나면 날수록, 매들린의 마음은 들뜨기는커녕 타들어 가는 것처럼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다. 곧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겠지.
지금 그 모든 지식과 일천하리나마 경험이란 것들이 있어 더 고통스러운 걸지도 몰랐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 모든 걸 알고도 무력한 저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생을 산다고 하여 좋은 일 따위는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 모든 고통을 알고서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숲속의 저 연인처럼,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 * *
며칠이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숲속에서 밀회를 가지던 이사벨과 남자의 모습 말이다.
그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엿보아서는 안 되는 순간을 엿보는 것 같이, 불경하면서도 아련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그런 불같은 사랑이 있다는 것도 대단하네.’ 죽음을 각오하는 젊은이의 사랑 말이다. 매들린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 역시 ‘젊은이’였지만 이미 그런 감정이 다 사그라든 느낌이었다.
물론, 낭만적인 사랑은 이기적인 집착과는 결이 다를 터였다. 전 생애에서의 남편이 부린 행태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매들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감정은 비틀린 통제 욕구라든가, 이기적인 호승심에 불과한 거였다. 그래야만 했다.
아무튼, 그렇게 몇 번의 석연찮은 만남이 이어지고 난 이후에도, 남자와의 마주침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별수 없었다. 피하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런던의 사교계는 혈통 좋은 경주마들을 풀어놓은 좁다란 목초지 같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게 답답하긴 했지만 견딜 수는 있었다. 매들린은 자신만의 여흥을 개발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관찰하기로 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사람들을 지켜봤다. 그렇게 차근차근 지켜보기라도 하면, 자신이 이전에 놓쳤던 것을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을 것처럼. 실제로 많은 게 새로이 보였다.
물론 개중에는 딱히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도 있었다. 아버지가 지금 프리실라 백작부인과 아슬아슬한 밀회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도 모르니만 못했다. 지금도 저쪽에서 둘이 서로 은근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이, 참 꼴 보기가 싫었다.
매들린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눈을 돌린 곳에서 또 다른 사실 하나가 보였다.
저기 연회장의 가장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루이스 바턴. 석탄 공장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는데, 평민 출신이라고 다들 의도적으로 무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끊임없이 사교계에 문을 두드리는 끈질긴 양반이었다. 생긴 것은 자못 평범한 외모였으나 깔끔하고 앳된 얼굴의 사내였다. 순한 검은 눈망울이 처져 있는 게 자못 안쓰러워 보였다.
게다가 그런 그를 더 안쓰럽게 만드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그래서, 여우 사냥에 같이 가겠다고 부득불 안간힘을 쓰더니만, 막상 그곳에서의 에티켓은 전부 무시했다죠? 결국, 마스터 노팅엄께서 한마디 쏘아붙이고 나서야 얼굴이 익는 꼴이 참….”
“그러고서도 이렇게 낯을 들이밀 생각을 하다니, 철면피가 따로 없어요.”
하하 호호. 지척에서 남자에 대해서 떠들어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하….”
듣다 보니까 참 어이가 없었다. 그 누구도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말을 걸지 않으며 괄시하는 꼴이 참 우스웠다. 게다가 그 ‘노팅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혈압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역시 치졸한 남자였어.’
사교계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에게 면박을 줄 정도로 속이 좁은 옹졸한 남자였다. 그러니까
결국, 매들린은 또 오지랖을 부리기로 했다. 홀로 남자에게로 다가간 것이었다. 원래 초면인 상태에서 먼저 말을 붙이는 게 예법이 아닌 건 알았으나 굳이 그런 걸 따지고 싶진 않았다. 그랬으면 이사벨한테도 뭐라 안 했겠지.
‘딱히 저 사람이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뒷말하는 치들이 싫은 것뿐이지.’
매들린은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띠며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바턴 씨. 일전에 만찬회에서 뵈었던 적이 있었는데, 절 기억하시나요?”
“앗. 네. 네! 로엔필드 양, 기억합니다.”
루이스 바턴의 낙담한 얼굴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순한 눈망울에서 활력이 돌자, 보기에 제법 괜찮았다. 나쁘지는 않았다.
“적잖이 지루하시지요?”
“아, 아니요.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로엔필드 양.”
루이스 바턴이 손사래를 쳤다. 지나치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나 다름없는 법. 매들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다행이에요. 지루하지 않으시다니. 저는 사실 좀 졸리기 시작했거든요.”
“그건…. 그건 큰일이지요. 로엔필드 양. 피곤하시다니.”
바턴이 큰 눈을 굴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가 빈 의자 하나를 끌고 왔다.
“잠시 앉으실래요?”
허둥지둥하는 모양새가 꽤 숙맥이거나 사교계 경험이 없는 남자인 것 같았다. 적어도 서른 살은 되어 보이는 남자인데, 의외였다. 매들린이 남자가 내어준 의자에 앉으려고 할 때였다. 저편에서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또 뵙는군요. 로엔필드 양.”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살짝 무뚝뚝한 얼굴의 이안 노팅엄이 있었다. 남자의 기본 얼굴이 원래 무뚝뚝했으니, 그냥 평범한 얼굴의 이안 노팅엄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터였다. 매들린은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스터 노팅엄.”
“바턴 씨. 반갑습니다.”
“아, 아. 네. 마스터 노팅엄. 정말 간만이군요. 그때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루이스 바턴의 전신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매들린이 말을 걸었을 때보다 훨씬 심했다. 반면에 갑자기 둘에게로 다가온 이안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정말 안부 인사만 전하러 온 듯 평온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매들린은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들에게로 온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저도 바턴 씨와 함께 했던 사냥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안이 입꼬리를 당겨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악센트와 어조에서 약간의 비아냥이 깃들어있었다. 매들린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불쌍한 바턴 씨는 그 뉘앙스를 전혀 읽어내지 못한 채로 정말로 황송해했다.
“정말, 정말이지 영광입니다. 마스터 노팅엄. 언젠가 같이 또 사냥을 한다면 언제가 좋을지….”
“로엔필드 양. 사냥에는 조예가 있으십니까?”
이안이 루이스 바턴의 말을 노골적으로 잘라먹으며 매들린을 떠보았다.
“아니요. 저는 그다지….”
그다지가 아니라 전혀. 사냥은 예나 지금이나 질색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크게 자리했다. 어머니는 사냥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녀가 우울해하며 두문불출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주 즐겁게 사냥하러 다니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꼴을 어찌 참았는지 모르겠다.
“사냥, 재밌습니다.”
이안 노팅엄이 불쑥 내뱉은 말에, 매들린은 살짝 뜨악해졌다. 저 남자가 고작 저런 말을 하려고 대화에 불쑥 끼어든 건가. 그건 나머지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는 모양이었다. 이안이 헛기침을 몇 번 콜록였다.
“제 말은…. 사냥감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도 재밌고, 사냥개를 다루는 일도 꽤 재밌다는 겁니다. 요즘은 숙녀들도 많이 하는 모양이더군요. 로엔필드 양도 도전해봄이 어떤지요.”
젊은 이안 노팅엄은 확실히 전 생애의 남자보다는 사교적이었지만 결코 ‘외향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만만한 사람일 뿐이었다. 이렇게 남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에는 오히려 어색한 면도 있었다.
“그렇지요. 사냥이야말로 신사 숙녀들에게 최고의 교양 아닙니까! 로엔필드 양. 로엔필드 남작께서도 굉장히 명사수라고 들었습니다. 영애께서도 소질이 있으실 거예요.”
“아….”
루이스 바턴의 부추김에 살짝 기분이 떨떠름해지고 말았다. 나름 홀로 떨어져 있는 남자를 도와주려고 다가갔는데, 그런 건 까맣게 모르는 채로 이안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꼴이라니.
“그나저나 깜짝 놀랐습니다. 마스터 노팅엄, 사냥감 앞에서는 꽤 손속이 무자비하시더군요.”
“…….”
그 말에 이안 노팅엄의 얼굴빛이 일변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너무나 미묘해서, 또 매들린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와… 저 루이스 바턴이라는 사람, 진짜 눈치 없긴 하구나.’
“사냥감이란 사냥감은 전부 사나이답게 처단하시는 모습이 참 멋졌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렇게 집요하시니, 뭐든 잘하시겠지요.”
‘여우 사냥에서 욕먹은 게 괜히 욕먹은 건 아니구나.’
매들린은 미약한 두통을 느꼈다. 사교계의 언어 게임은 지나치게 미묘하고 치사했으나 루이스 바턴의 입방정은 그의 걸림돌이었다. 이 난관을 어찌 빠져나가나 눈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서, 소리도 그림자도 없이 우아한 형체가 나타났다. 이사벨이었다. 검은색 머리를 굽이치는 똬리 형태로 땋은 다음에 올렸다. 치마는 장식 없이 단순했으나 전혀 싸구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얼굴에는 살짝 오만한 고양이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가 매들린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엔필드 양. 여기 있었네요. 르봉마르셰에서 새로운 드레스 카탈로그가 나왔다는데, 구경하러 갈래요?”
그녀가 아주 천진하고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척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