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콜하스의 초대
-- 열일곱 살의 매들린.
콜하스마너로의 초대장.
얇고 바스락거리는 카드를 받아든 매들린은 어쩐지 곤란한 심정이 되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콜하스댁 도련님께서는 자신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지난번의 파티 이후로 말을 걸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저택으로 초대장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공식적으로는 콜하스 자작이 로엔필드 남작 영애에게 보내는 정중한 서한이었으나, 실상은 조지의 개인적인 사심이 들어간 초대임이 분명했다.
“흠. 그런데 그 남자는 셋째 아들 아니더냐.”
로엔필드 남작이 초대장을 흘겨보면서 핀잔을 줬다. 조지 콜하스는 콜하스 자작의 셋째 아들로 캠브리지 법률 대학교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남작은 여전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작위도 못 잇는 셋째 아들이 제 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탐탁잖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숙녀답지 못한 행동이지.”
아버지가 간단하게 결론을 지었다. 매들린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가식이나 속물근성은 아무래도 좋았다. 조지는 유쾌한 젊은이였고, 그와 있으면 약간의 재미랄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안 노팅엄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 말인즉슨, 이안과 이사벨을 한자리에서 마주칠 수 있단 이야기였다.
그러면 얼마나 민망하고 껄끄러울지. 그런 상황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긴, 런던 사교계에서 노팅엄 가문을 피하는 거야말로 힘든 일이지.’
매들린은 한숨을 쉬며 행장을 꾸렸다.
* * *
콜하스마너, 콜하스의 별장은 런던 근교에 위치해 있었다. 차나 마차를 타고 가면 순식간이었다. 로엔필드 저택에 비하면 아담했으나, 그렇다고 대충 지어진 느낌은 없었다.
벽돌로 아담하게 잘 지어진 집이었다. 매들린은 중간에 차에서 내려, 그곳까지 걸어갔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늘의 색깔이 바뀌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저녁 식사 직전이었다. 차를 탄 신사 숙녀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긴 연회 테이블에 앉아 훌륭한 요리를 대접받았다.
콜하스 자작은 인심 좋은 사람이었다. 자작위를 가졌다고 으스대는 법이 없었고, 훌륭한 호스트로서 책임을 아는 이였다.
은식기들은 깨끗했고, 내부 장식들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았으며, 손님들도 얼마 없어 쾌적했다. 이 모든 편의의 이면에는, 사용인들의 쉼 없는 노동이 있을 터였다.
매들린의 옆에 조지 콜하스가 앉아 계속해서 말을 붙여왔다. 이안 노팅엄은 제 형제들과 함께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아있었다. 노팅엄 삼 남매를 한자리에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째 이안, 둘째 에릭, 그리고 셋째 이사벨까지.
흑발의 삼 남매는 좌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제각기 아름다웠으며, 은근하게 우아한 태가 났다.
이안이 대화의 무게중심을 잡아주면, 에릭이 농을 쳤다. 이사벨은 고개를 쳐든 채로 오만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매들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가 왜 여깄냐는 뜻인 걸까.’
매들린은 고개를 숙이고 수프를 떠먹는 척했다.
식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작은 실내악 악단이 소품을 공연했다.
눈치가 빠르지 못한 매들린이 보기에도, 조지는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매들린과의 대화가 즐겁다며 치대는 통에, 자작까지 눈치를 줄 지경이었다.
‘이전의 삶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여성 편력이 워낙 지대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탈리아 말고 비엔나도 가보세요.”
조지가 발포주 한잔을 권하며 말했다.
“온갖 혁신은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곧 그곳이 전쟁터가 되어 쑥대밭이 된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문명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전할 겁니다. 과학과 미술, 모든 분야에서 말이죠.”
기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우리는 앞서가고 있어요. 조지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폈다. 매들린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럴지는 모르겠네.”
그때였다. 조지의 등 뒤에서, 이안 노팅엄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조지가 내미는 잔을 낚아챘다.
“조지 형님. 오랜만이에요.”
에릭 노팅엄도 함께였다. 이안보다 유순한 얼굴의 청년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내 이론에 반대하는 건가? 확실히 지금이 불황기이긴 하지만….”
조지가 신경질을 냈다. 괜히 매들린 쪽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이안이 등장한 게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괜한 걱정인데.’
매들린으로서는 이안의 등장이 굉장히 불편했다. 그러나 사람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그런 기색을 낼 순 없었다. 다행히 이안은 매들린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영구평화이론은 꿈같은 이야기야. 인류는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끝없이 동족상잔을 하게 되어있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마주 앉은 숙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경쟁하고 파괴해왔기 때문에 역사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쇄신은 원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이안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반드시 무력일 필요는 없다고 봐. 경제적으로도 세계는 너무 얽혀있어서, 위험한 일 따윈 없을 거야.”
“하긴, 이제 인류는 미개함의 시대에서 벗어났으니까.”
조지와 다른 청년들이 반론했다.
매들린은 두 신사들의 대화에 관여하지 않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어차피 그들은 얼마 안 가 전쟁터로 나아갈 자신들의 운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상황 자체가 일종의 아이러니였다.
“레이디 로엔필드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때였다. 이안이 느닷없이 매들린에게 칼자루를 쥐여줬다.
“…….”
구석에 앉은 매들린은 적잖이 난처했다. 좌중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게 부담스러운 데다가, 남자가 무슨 짓궂은 마음이 일어 저에게 이러나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안은 무연한 표정으로 매들린을 바라봤다. 그의 굵은 눈썹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 그 밑의 눈빛은 가라앉아있었다. 일전에 춤을 신청했던 때처럼 느긋한 기색이었다.
‘역시 이사벨 때문에 여전히 꽁한 건 아닐 테고.’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제가 잘 아는 신사분께서는….”
매들린이 이안을 바라봤다.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남자는, 정말로 매들린의 대답이 궁금하다는 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가 아는 신사분께서는, 역사란 의미 없는 주사위 놀음이라고 하시더군요. 발전이라, 글쎄요.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발전을 빌미 삼아 모든 죽음과 슬픔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좌중의 표정이 굳어가는 게 와닿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감상적이고 싶지는 않아요. 마스터 노팅엄의 고견에 일리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글쎄요. 폭력이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죠.”
침묵. 좌중이 고요했다.
“…로엔필드 양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이안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보아 기분 나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에 비해 다른 신사 숙녀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논쟁을 대놓고 비꼬는 매들린의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어색한 기류를 감지했는지 에릭이 갑작스럽게 주제를 바꿨다.
“난 정치 이야기는 따분해서 말이에요. 그보다는 윔블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랭킹에 올라와 있는 신사 숙녀들 가운데서 누구에게 걸고 싶은지.”
순식간에 이야기가 테니스로 전환되었다. 이안 노팅엄 역시 전혀 기분이 상하거나 짜증 난 기색 없이 대화에 참여했다. 매들린만이 살짝 꺼림칙해진 상태였다.
“형님께서 테니스를 어찌나 잘 치는데요. 저랑 같이 복식조를 이루면, 윔블던 출전도 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에릭. 허풍 떨지 말아라.”
“아, 정말이라니까요.”
에릭이 너스레를 떨었다. 테니스 복식조를 이룬 형제의 모습을 상상하노라니 제법 그럴싸했다. 둘 다 키가 훤칠하고 균형 잡힌 신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매들린은 침묵했다.
잠시 산책을 하겠노라고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벗어나자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장 앞에는 너른 관목림이 펼쳐져 있었다. 발코니에 나아가 그 모습을 보노라니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매들린이 저녁 공기를 들이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저택 맞은편의 관목림 사이에서 그림자 한 쌍이 보였다.
그녀가 의구심 어린 눈초리로 관찰했다. 그 그림자는 두 사람의 인영이었다. 정확히는 두 남녀의. 사냥꾼 모자를 쓴 남자 한 사람과, 양산을 쓴 여자 한 사람의 그림자였다.
‘이사벨 노팅엄…!’
그녀와 그녀의 연인 재커리 밀로프임이 분명했다. 척수를 타고 내려가는 싸늘한 기운에, 매들린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녀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방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이안이 있었다.
막아야 한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판단했다. 매들린이 의식적으로 미소를 꾸며냈다. 이안의 굳은 표정이 살짝 누그러지는 것을 감지하진 못했다.
“로엔필드 양. 일전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일전의 일이라뇨?”
“이사벨 말입니다. 그 아이의 일로 당신을 추궁한 건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오빠 된 사람으로서 동생에 대해서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
남자가 살짝 뜸을 들였다. 매들린은 불안한 눈동자로 남자의 시선을 탐색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자 덩달아 긴장이 됐다.
“혹시 이사벨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저는.”
“그 아이를 잘 타일러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뜻하는 바는 아시겠죠.”
이안의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사적인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화가 상당히 불편했으나 어찌하겠는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녀가 뒤통수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말했다. 남자의 얼굴로 노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로엔필드 양. 저는 잘 모르겠군요.”
“……”
“이전부터 줄곧 느꼈지만, 당신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설마요.”
매들린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경멸이라고 해야 할까.”
“경멸이라뇨.”
그래. 난 당신을 경멸해. 당신이 하는 건 사랑이 아니었어. 유치한 소유욕에 불과했지. 매들린의 목구멍에서 내뱉어지지 못한 말들이 응결되어 그대로 숨통을 옥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