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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도망 (10/121)

9화. 도망

-- 오늘도 당신은 아름답고, 나는 너무나도 추해서. 

내가 당신을 망가뜨릴까 봐 두려워서.

* * *

 -- 스물다섯 살의 매들린.

그녀는 도망쳤었다. 

그래, 매들린은 도망쳤다. 저택으로부터, 노팅엄 영지로부터. 가방에 옷가지와 돈, 생필품을 넣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로 말이다.

가출의 이유는 단순하고, 터무니없고, 형편없었다.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녀는 그저 영화를 보고 싶었다. 미국 영화를, 찰리 채플린을 보고 싶었다. 익명의 사람들 속에 숨고 싶었다. 

백작에게 부탁하면 허락해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그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넌더리가 나 있었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매들린은 이안 노팅엄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못 나아가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있었다. 

시내 구경을 간다는 이야기를 남겨두고 저택을 떠났다. 미리 수배해놓은 차는 시원스럽게 도로를 질주했다. 운전자는 힐끔힐끔 조수석에 탄 매들린을 훔쳐봤다.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영지까지 오겠다는 사람이 얼마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시원스러웠다. 자동차의 속도는 자유의 속도. 그녀가 저택으로부터 멀어지는 거리는 구속으로부터의 거리였다.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

계속 쓸데없이 말을 붙이는 운전사만 아니었다면 기분이 더 상쾌했을 텐데.

런던에 도착하면 영화관도 가고 백화점도 가고, 미술관, 박물관, 국회의사당, 도서관…도 갈 계획이었다. 가장 화려한 호텔에도, 가장 비루한 호텔에도 머무르고 싶었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백작에게 부탁했으면 런던행을 허락하긴 해도 자유로운 여행은 즐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는 분명 사용인들을 잔뜩 붙여놓고 시시콜콜 감시와 참견을 일삼았을 게 분명했다. 

그게 싫은 거다. 자신이 언제라도 사라질 설탕 과자인 것처럼 구니까…. 괜히 답답하고 성질이 나게 되는 것이다. 

매들린은 자신이 하는 게 엄밀히 말하면 가출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보다는 ‘외출’에 가깝겠지. 암, 그렇고말고. 

“런던은 오랜만에 가서요.”

기차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킹스크로스행 열차로 갈아타야지. 

자유의 값은 기차표의 값. 런던에 도착하면 머리카락을 플래퍼처럼 귀엽게 자를까 보다. 그녀의 마음은 치기 어린 자신감으로 잔뜩 부풀었다. 

지금쯤 저택은 난리가 났을 거란 생각에 더 기분이 좋았다. 백작에게 보고가 들어갔으려나.

들어가 봤자지. 

‘어차피 당신은 그 몸으로 날 쫓아오지도 못하잖아.’ 

못된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타인의 결손을 비난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의 모든 것을 비난하는 데에 사용하고 싶었다. 그의 마음의 상처, 몸의 상처까지도. 

그녀는 자신이 바닥을 쳤다는 사실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작이 손 놓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백작은 앉아서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런던, 뉴욕, 파리의 소식들이 전보를 타고 그의 책상 앞에 배달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전기신호가 되어 저 먼 대서양을 건넜고 천문학적인 돈이 왔다 갔다 했다. 

런던의 어리바리한 여자 한 명을 찾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비관하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도 아니면서, 오로지 남자 한 명을 성가시게 하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기차의 속도는 자유의 속도.

그녀는 정체 모를 노래를 흥얼거렸다.

* * *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매들린 노팅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택에서 지낸 지 몇 년 안 되었는데, 종전 직후의 우울한 분위기는 없었다. 도시의 군중은 흥에 넘쳐있었다. 

물론 거리 곳곳에 상이군인들이 우울한 표정으로 구걸하고 있는 광경이 왕왕 눈에 띄었다. 매들린은 그들을 볼 때마다 품 안의 돈을 꺼냈다. 

아르데코 장식을 한 간판이 여러 군데 보였고, 여자 남자가 같이 모여 커피를 마시는 장소들도 더러 보였다. 전쟁 전만 해도 여성은 카페에 출입하기 어려웠는데, 새삼 많은 게 바뀌었다 싶다. 

‘호텔에 체크인부터 해야겠어.’

네온사인 간판을 구경하다가 하마터면 지나가는 자동차에 치일 뻔했다. 매들린은 시골뜨기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서둘러 시선을 도보에 고정했다. 

그녀가 선택한 호텔은 지나치게 비싸지도 값싸지도 않은 곳이었다. 지나치게 고급인 곳을 선택했다가는 백작과 아는 사람을 마주칠지도 몰랐고, 값싼 곳은 아직 적응할 준비가 되지 않은 탓이었다. 

호텔 방에 도착해 행장을 풀었다. 여자 혼자서 여행하는 걸 보고도 데스크에 앉은 여자는 대수롭지 않아 했다. 하긴, 요새는 여성도 직업을 가지고 혼자 살아도 뭐라 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에 비하면 전쟁 전은 어찌나 고루했는지. 물론 전쟁 덕에 모든 게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녀는 해방적인 기분을 마음껏 만끽했다. 

짐을 풀고 침대에 눕자 그제야 모든 게 실감이 났다. 

‘도망쳤어.’

폐에 구멍이 뚫린 듯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도망치는 데 장장 3년이 걸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자신의 가출 소식을 듣고 분노할 백작을 생각하면 아주 살짝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어쩐지…,

‘죄책감’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게 스멀스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죄책감이라고. 내가?

흥. 코웃음이 쳐졌다. 백작을 불쌍히 여겨본 적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값싼 동정심이요 기만에 불과한 감정이었다.

백작의 어머니인 선대 백작부인을 떠올렸다. 자상하고 슬픈 얼굴의 여인. 매들린의 손을 붙잡으며 그녀는 고해성사하듯 읊조렸다.

‘그 아이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어요.’

비단 신앙심만 잃었을까. 남자는 자신이 겪은 지옥도에 대해서 절대 발설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남자는 인류의 번영도, 목적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 세상은 무의미의 먼지 덩어리 그 자체였다. 

‘나도 그에게 먼지 인형 정도겠지?’

백작의 속을 알 길은 없었다. 매들린은 차라리 자신이 제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백작을 못 봤더라면 했다. 자신이 그에게 중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무서운 사실은 없을 테니까. 

…그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고 싶은 자신에 대해서, 매들린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수마에 빠져들 때까지, 그녀는 끝없는 소용돌이 속을 헤매는 기분과 싸워야 했다. 

* * *

-- ‘다른 이야기는 할 필요 없어, 두 존재가 세상에서 만나면 언제든지 한 사람은 부서져 버리기 마련이다. 나와 함께 가자. 나는 악이 어떤 것인지 아니까 너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보다 안전할 거야.’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 * *

극장 앞에 서서 포스터를 기웃댔다. 미국에서 상영한 영화의 포스터가 크게 걸려있었다. 콧수염, 슬픈 얼굴의 남자가 과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 

매들린이 포스터를 읽었다. 

“키드.”

어쩐지 슬픈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볼 만할 것 같은데. 매들린은 한참 헤매다 표 한 장을 샀다. 곳곳에 연인들이, 가족들이 영화관 좌석에 앉았다. 

매들린은 그들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극장의 불이 꺼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매들린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꿈. 그것은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다. 

매들린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으면, 백작은 별장에 영화관이라도 하나 지어줬을 것이다. 영사기와 필름을 구입하고는, 그녀만을 위한 무대를 만들었겠지. 물질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는 이니까. 

웃다가 점점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 수 없었다. 왜 이리 슬픈 것일까.

그녀 자신이 은막 위의 환영들보다 덧없기 때문이리라. 

유령들, 지난 시대의 스러져가는 자취. 

막이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들. 

호텔로 돌아가자 지배인이 그녀에게 작은 전보 쪽지를 전해줬다. 

{ 런던역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

-- 스물여섯 살의 매들린.

악몽으로 점철된 긴긴밤이었다. 참호 안에서 봤던 사람 팔만한 크기의 쥐. 썩어가던 자신의 발 따위가 패치워크처럼 얼기설기 엮여있었다. 

고된 사투 끝에 남자가 눈을 뜨자 처음 본 광경은, 침대 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따뜻한 색조의 금발이 이리저리 흐트러져있고, 슬립 위의 가운은 어깨에 미끄러지듯 걸쳐 있었다. 

가운 사이로 부드러운 곡선의 몸매가 보였다. 

오뚝한 이마와 둥근 입매, 감은 와중에도 사색하는 듯한 눈. 복숭아색 볼. 꿀과 금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의 아내. 냉담한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다정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렇다고 이곳이 천국은 아니다. 그곳에 가기에 자신은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지 않은가. 

한참 동안 여자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그녀의 손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을 자각하자마자 불에 달구어진 것처럼 손이 뜨거웠다. 

그가 신음을 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창문을 통해 따뜻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그녀의 뒤통수를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주 잠시만큼은 이 평화를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어차피 심판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여자가 눈을 뜰 때까지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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