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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백작의 몸살 (9/121)

8화. 백작의 몸살

매들린은 코리를 내려다보며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코리를 찾았다. 

개는 털이 살짝 축축했지만, 진흙은 한 점도 묻어있지 않았다. 사용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캐묻자 풋맨인 찰스가 위험을 무릅쓰고 밤에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찰스가 그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쓸 줄이야. 혹시 백작이 명령이라도 내린 걸까.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고작 ‘개 한 마리’를 두고 백작이 그리 무리수를 뒀을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리 이야기하니, 매들린으로서도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찰스를 개인적으로 불러 감사를 표했다. 

물론 감사는 물질적으로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들린이 봉투를 건네자 찰스가 굉장히 거북해했다.

“마님,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괜히 위험에 빠뜨린 것은 아닐까 죄스럽고….” 

매들린이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하게 굴었는지 자각은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괜찮습니다요.”

“아니, 제발 받아줘요. 찰스. 내 마음이니까.”

“아이고.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찰스가 좌불안석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찰스에게 졌지 뭔가. 그녀 역시 이렇게 돈을 건네는 행위가 팁처럼 보일까 싶기도 했고.

그리고 곧이어 백작이 아팠다. 매들린은 백작을 직접 만나러 위층 서재로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남편이었고, 부부 사이에 딱히 할 말이 있어야 만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여러모로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어.’

나름 화해-라기보다는 휴전-를 청할 생각도 있었다. 남편과 자신 사이에 소통이 잘되지 않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평생을 원수지간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때, 백작의 서재로 향하던 그녀를 집사장 세바스천이 막아섰다. 흐릿한 평소 인상과 달리 그는 완강한 얼굴로 매들린을 막아섰다. 마치 그녀에게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님.”

“아내로서 제 남편을 보러 가는 데에 이유가 따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요.” 

당혹스러운 나머지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매들린이 미간에 힘을 주자, 세바스천이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백작님께서는… 혼자 계시고 싶어 하십니다.”

“좋아요. 그러면 제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주실래요?”

“….” 

세바스천이 예상치 못한 듯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좌우를 살피더니 다시 한번 말했다. 

“마스터 노팅엄께서는 오늘 손님을 받기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 긴요한 일이면 제가 대신 전달을….”

“전 손님이 아니에요.”

“…….” 

세바스천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말실수를 자각한 것이다. 그가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백...백작님께서는…”

“알고 있어요. 나와 한자리에 있는 것도 싫어한다는 거죠.”

“아닙니다!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세바스천은 완전히 궁지에 몰린 꼴이 되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백작님께서는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아프니까 더더욱 만나고 싶은 거예요.” 

매들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이안 노팅엄은 부상으로 인해 몸을 운신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누워있는 상상은 하기 힘들었다.

물론 부상의 후유증으로 몸이 약해진 상태기는 했다. 

“어쩌다….”

“최근 몸살 기운이 좀 있으신 것뿐입니다.” 

세바스천은 예의 그 무표정한 집사로 돌아갔다. 그가 애원조로 매들린에게 당부했다. 

“부디 백작님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셔야 하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요?”

“……백작님께서는 저를 제외한 그 누구의 방문도 원치 않는다 하셨습니다.”

“특히 날 보고 싶지 않다는 거겠죠.”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번에도 그녀가 졌다. 

“그래요. 그이가 아프다면, 나를 보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아쉽네요. 같이 차라도 한잔할까 했는데.”

말이야 가볍게 했지만, 솔직히 걱정이 됐다. 이미 부상으로 심약해진 육체가 감기에 걸려 이겨낼 수 있을까 싶었다. 

“주치의는 불렀나요?”

“네. 마님. 필요한 조처는 다 취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 선생께서도 절대적인 안정을 권고했습니다.”

“…….”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세바스천의 방어적인 태도에, 매들린은 살짝 기가 질렸다. 백작의 하수인 아니랄까 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내게 알려줘요.”

그 말만을 남긴 채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 * *

밤이었다. 깜깜한 밤. 그림자조차 숨죽이는 밤. 노팅엄 저택의 밤은 다른 곳보다 더 어둡다.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동굴 같다. 매들린은 계속해서 몸을 뒤척였다. 어째서일까. 전신이 뻐근하고 짓눌린 느낌이었다. 목덜미가 뻣뻣하니 아팠다. 

‘나도 감기 기운인가.’

그녀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참을 수 없는 갈증. 답답함. 가슴을,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 그 먹먹한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알고 있다. 

[돌아가시오.]

자신에게 그리 말하던 남자. 그 지치고 초췌한 얼굴에 깃든 무언의 감정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어졌다. 어째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나를 증오하면서, 미워하면서! 

몇 번이고 이 저택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번번이 그에 의해 저지되었다. 언젠가는 도망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언제나 그녀를 찾았다. 마치 마법의 수정구슬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런던역에서 자신을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오한이 들었다. 

결국, 제 발로 저택에 돌아오는 건 언제나 매들린이었다. 거기에는 어떤 강압도, 협박도 없었다. 무언의 압박만이 있을 뿐.

점차 그렇게 저택은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저택은 독방이었고 백작은 동료 수형자이자 감시자였다. 모든 것이 그 때문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매들린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얇은 슬립 위에 울로 된 가운만 걸친 차림새였다. 방 밖으로 나가니 복도에 붙은 옅은 전등 몇 개를 제외하고는 어두웠다. 

아직 지난 폭풍우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거센 바람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웨엥, 웨엥, 바람 소리가 거셌다. 

웨엥, 웨엥. 사람이 내는 울부짖음 같이 들리는 그 소리가 을씨년스러워서, 몸서리가 쳐졌다. 

매들린의 발걸음이 층계참에서 멈췄다. 올라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 이것을 애초에 왜 고민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금단의 장소’인 3층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작은 등을 들고 올라갔다. 점점 남자의 침실로 다가간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어쩌면 그녀는 확인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아픈 남자를 보고 위안을 얻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무슨 위안? 사람은 전부 죽으니까, 그 역시 죽어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위안?

아니, 살아있으니 다행이라는 위안? 혼란스러웠다. 매들린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육중한 나무문 앞에서 멈췄다. 

-흐윽…아악…!

한참을 멈춰 서있던 매들린은 방 안에서 들리는 비명을 듣자마자 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침대 위에는 백작이 머리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이사벨…이사벨… 날 용서해줘….”

우는 게 아니라,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열에 들뜬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매들린이 등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 재빨리 침대 가로 갔다. 

위험한 상황일까.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는 창백했다.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식은땀에 온통 절어 훨씬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이마에 붙었다. 

흉터는 잔뜩 일그러져있었고, 눈 밑에는 어두운 보라색 그늘이 있었다. 남자다운 얼굴인데 동시에 병약해 보이는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기이한 아름다움. 성화처럼 기묘하게 뒤틀린 우아한 모습에 매들린의 몸이 두려움으로 진동했다. 그녀가 옆에 온 걸 모르는지 남자가 계속 신음했다. 

매들린이 손을 뻗었다. 그녀가 남자의 창백한 이마 위에 조심스럽게 제 손바닥을 올렸다. 

‘뜨거워.’ 

손이 달구어진 찻주전자에 닿은 것처럼 뜨거웠다. 이를 어쩌나. 열이 펄펄 끓는 사람을 간호해본 적이 없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차가운 물수건이라도 가져와야겠어. 그녀가 그렇게 등을 돌려 젖은 수건을 가지러 갈 때였다. 쇠갈퀴 같은 앙상하고 긴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어떻게 아픈 사람이 그런 힘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인한 아귀힘이었다. 매들린이 신음했다. 

“악, 윽… 아파….”

“이...이사벨….”

뒤돌아서자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벨. 여동생의 이름. 그는 자신을 제 여동생으로 착각하고 있다. 매들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락 없이 이곳에 자신이 들어온 걸 알면 어떻게 조치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그게 두렵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 

입술만 달싹일 뿐 뭐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저음의 목소리가 통한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소리를 되뇌었다. 놓으면 사라질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아귀힘이 계속해서 들어가 있었다. 

“네가…. 살게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내가…내 욕심이…”

이대로 가다가는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매들린이 바들바들 떨며 다른 한 손으로 남자의 손을 덮었다. 

“진정해요. 전 이사벨이 아니라 당신의 아내예요.”

매들린…노팅엄. 매들린이라고요. 어떻게 돼도 좋으니, 눈앞의 남자를 진정시키고 싶었다. 

“매들린…”

“네. 당신의…”

“내 아내.”

남자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동시에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의 얼굴에 낙담이나 고통 같은 게 가시고 순식간에 평안이 깃들었다. 

‘……’

“날 두고 가지 마시오.”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처럼….”

“…….”

매들린은 입을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처럼, 그녀가 가출을 감행한 때를 말하는 것일 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눈길이 닿는 곳, 창가 위에 그녀가 키우던 맨스필드 장미 한 송이가 보였다. 

“…….”

그때처럼. 매들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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