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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이사벨 노팅엄 (8/121)

7화. 이사벨 노팅엄

매들린이 주위를 둘러봤다. 1층으로 내려가자 사용인들로부터 겉옷을 돌려받는 이사벨이 보였다. 그녀의 사슴처럼 우아한 목덜미는 여전히 분노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초조해진 매들린이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그 후에 어떻게 할지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노팅엄 양.”

“…?”

이사벨 노팅엄이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고고한 얼굴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바빠서요. 급한 일이면 전보를 보내세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매들린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멈춰주세요.” 

매들린은 스스로의 목소리가 어색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붙잡아야 한다는 직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무슨…”

그녀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가 이사벨의 손을 붙잡고서는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연인을 만나러 가시는 건가요?”

“……뭐야. 당신.” 

이사벨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녀가 붙잡힌 손을 매몰차게 빼내고 매들린을 매섭게 노려봤다. 

“당신, 지금껏 우리 대화를 엿들었던 거야?”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허, 참. 오빠 주위에 별의별 것들이 다 있단 건 알았지만, 이 지경일 줄이야. 보아하니 이안의 추종자인 것 같은데, 내게 잔소리를 해봤자 오빠의 호감을 살 순 없어.”

“밀로프 씨를 만나러 가실 생각인 거죠?” 

매들린에게서 연인의 이름이 나오자 이사벨의 혀가 굳었다. 그녀가 충격을 받은 듯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해요. 사회주의라든지…, 전 그런 건 잘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매들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미친 여자처럼 보일 거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이사벨 노팅엄은 차를 타고 다리에서 추락할 것이다. 

…정황상 자살이라 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연인의 정사라고. 매들린은 지금 눈앞의 젊은 여자가 벌일 치기 어린 행동을 최대한 막고 싶었다. 

그게 지금인지, 나중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지금 막지 못해서 후회하고 싶진 않았다. 미친 여자 취급을 받는 게 차라리 나았다. 

“당신…우리 오빠의 끄나풀 같은 거 아니야…”

이사벨의 얼굴에 짜증과 불안, 그리고 분노가 어렸다. 가까이서 보니 눈가에 분노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자칫하면 뺨이라도 때릴 것 같은 분위기에 매들린은 살짝 얼었으나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마스터 노팅엄은 훌륭한 신사지만, 그분은 지나치게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지요. 사람을 통제하는 데에 능숙하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그 통제에 말려들 필요는 없어요.’ 매들린이 덜덜 떠는 이사벨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그녀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후회할 일만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내일이 있어요.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매들린이 결연한 표정으로 이사벨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일단 살아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은가. 미친 여자로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녀는 최대한 눈앞의 여성을 설득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2층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남자 둘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안과 조지였다. 매들린과 이사벨이 서로 손을 붙잡고 있는 걸 보자, 이안의 눈썹이 뒤틀렸다. 몹시 언짢은 듯했다. 

“로엔필드 양. 지금 가족 간의 대화를 위해 잠시 비켜주시겠습니까.” 

이안 노팅엄이 딱딱하게 말했다. 

“……싫어. 로엔필드 양과 있을 거야.” 

이사벨이 매섭게 말했다. 그녀가 재빨리 매들린의 손을 꼭 붙들었다. 

‘적어도 오빠보다는 처음 보는 이상한 여자가 낫다 싶은 건가.’ 

매들린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 

이안 노팅엄의 입매가 언짢은 기색을 못 숨기고 사정없이 비틀렸다. 그가 쿵쿵 계단을 내려오더니 거칠게 코트를 받아들었다. 중절모를 고쳐 쓴 남자가 이사벨을 무표정으로 노려봤다. 

“모든 행동에는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란다. 이사벨.”

그가 잠시 매들린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로엔필드 양. 언제부터 둘이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는 모르지만, 남의 가정사에 참견하는 건 그리 현명치 못하군요.”

이안의 눈빛은 무심한 듯 적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매들린은 그가 완전히 나가고 나서야 한숨을 쉬었다. 정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는 남자임을 새삼 느꼈다. 아까의 그 쌀쌀맞은 모습이 아마 그의 실체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이사벨이 매들린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젠장. 당신, 정말…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라버니의 끄나풀은 아니군.” 

“…….”

“오라버니에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숙녀답지 못한 말투였다. 매들린이 상상했던 우아하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요조숙녀의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그녀는 욱하는 성격을 지닌, 다혈질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궁금한 건 나중에 묻도록 하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사벨이 살짝 목례했다. 매들린은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얽히게 되어 좋은 게 없는데. 불길한 예감을 삼키며, 그녀가 서둘러 마차를 불렀다. 

* * *

-- 스물여섯 살의 매들린.

“코리!”

“코리!”

“어디 있니, 코리!”

폭풍우 치는 밤이었다. 저택 바깥은 지옥이었다. 매들린은 새된 비명을 질러댔지만 이내 그 무시무시한 바람이 그녀의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어둠 속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저갱이었다. 

“마님, 들어가시죠.”

풋맨인 찰스가 난감해하며 매들린을 붙들었다. 그러나 매들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코리를 얼른 찾아야 해요. 어디서 추위에 떨고 있을지 몰라요.”

하얗게 질린 여자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하는 개, 코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코리는 테리어 계통의 사냥견으로, 백작의 선물이었다. 그녀가 서재에서 대거리한 이후로 선심 쓰듯 물건처럼 내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매들린은 코리를 그런 ‘대가’나 ‘대체물’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백작이 실제로 그런 의도로 내어주었다 한들, 강아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게다가 코리는 영특하고 충심 깊어, 그녀의 외로운 저택 생활에 큰 의지처가 되어준 것도 사실이었다. 

개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깨끗한 영혼이 있었다. 매들린은 그 아이에게 많은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런 ‘코리’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헤매고 있었다. 매들린의 심장이 타들어갈 것처럼 아팠다. 

“찰스. 들어가 봐도 좋아요. 내가 직접 찾을 테니까…”

“제가 어떻게 마님을 두고 들어갑니까. 내일 날씨가 개면 찾도록 하지요.” 

찰스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집사장인 세바스천까지 나와 매들린을 말리기 시작했다. 정중한 말투였으나 두려움이 역력한 그들의 모습에 매들린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원인은 단 하나였다. 

“왜요. 백작께서 노여워할 것 같아요?”

그녀 역시 그들이 그저 사용인의 입장에서 한 말인 건 알았지만, 코리의 실종과 함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백작이 무섭다면 걱정할 필요 하나 없어요. 내가 죽어서 시체로 발견된다 해도 그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나요?”

“마님. 그런 게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는 절대로 그러실 분이….” 

그때였다. 육중한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폭풍우 치는 바깥으로 긴 그림자가 스며들듯 나오기 시작했다.

“매들린.”

긴긴 한숨과 함께 남자가 매들린 앞에 섰다. 그가 이토록 가까이 제 부인의 앞에 선 건 참으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아까 전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것일까. 

현관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등진 채로 선 남자는 흡사 뱀파이어 같았다. 목발을 짚은 그는 악몽에 시달린 사람처럼 몹시 피로한 인상이었다. 푹 팬 볼과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몹시도 지친 눈빛으로 구부정하게 매들린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들어갑시다.”

“하지만, 코리가…”

“단념하시오.”

“…….”

그의 말에는 진중한 무게가 서려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그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다름 아닌 남자가 준 강아지였다.

“개는 개일 뿐이오. 개를 찾다가 사람이 다칠 순 없잖아.”

매들린이 화를 내건 말건 백작은 초연했다. 그는 단단한 암초처럼 매들린을 막아섰다. 

“돌아가시오.”

바깥은 어둡다. 

* * *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날씨가 개고 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녀는 1층으로 내달렸다. 얇은 실크 치마의 밑단이 자꾸만 거슬렸다. 얼른 사람들과 함께 코리를 찾아 나설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멍!

그때, 그녀는 놀랄 만한 광경을 보게 됐다. 

-멍!

그녀 앞에 해맑은 눈망울의 갈색 테리어, ‘코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매들린을 본 코리는 짧은 꼬리를 마구 흔들며 그녀의 발치에 다가왔다. 축축한 코가 그녀의 발목을 간지럽혔다. 

* * *

코리를 다시 찾은 지 며칠 뒤, 백작은 원인불명의 고열로 크게 앓기 시작했다. 집안에는 비상이 걸렸고, 매들린 역시 저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다. 

폐렴인 걸까. 

확실히 요새 날씨가 쌀쌀했다. 저택은 크고 화려한 만큼 난방이 잘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최고의 건축가들이 달라붙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어느 방은 지나치게 덥고 어느 방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명색이 집의 안주인으로서 무척이나 성가신 문제였다. 

‘…….’

매들린은 혀를 헥헥 내밀고 재롱을 부리는 코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과히 즐겁지만은 않았다. 

저택 안은 숨죽인 듯 조용했다. 사용인들은 암살자처럼 사뿐사뿐 조용히 걸어 다녔고, 매들린은 무대 위에 홀로 남은 유령이었다. 이곳의 부와 역사는 사람을 집어삼켰다. 잠식했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매들린은 저택 안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뒤를 충직한 코리가 졸졸 따라다닐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위화감의 원인을 차근차근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백작이 아프다. 

집사장이 마뜩잖게 털어놓은 이야기에 동요가 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가 아픈 게 하루 이틀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부디 백작님을 방해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셔야 하기에…]

원래 이 사실도 절대 누설되어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백작이 입단속을 어찌나 시켰으면, 집사장의 얼굴에는 예의 그 두려움이 가득했었다.

매들린은 눈을 한두 번 깜빡였다. 

한번 올라가서 확인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녀는 간단히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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