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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흥미로운 여자 (7/121)

6화. 흥미로운 여자

-- 나는 그의 인생을 느린 자살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타인을 내치고, 성채에서 안락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삶. 그런 삶에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 * *

“저 여자를 봐.” 

조지가 시가를 피우며 실없이 웃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가 너무 많아서,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어.” 

애초에 ‘명망있는’ 신사들에게는 시시한 파티다. 사교계 햇병아리들끼리 짝짓기를 주선하는 모임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안은 여동생을 질 나쁜 무리들로부터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오늘 밤은 얼마 안 남은 가족애를 발휘할 때였다. 

조지 콜하스가 눈짓하는 방향에 여자가 있었다. 기둥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선 따분하고 무료한 표정의 여성. 금발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채로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있다. 

무척 앳되고 어린 얼굴인데, 세상만사를 다 깨우친 듯 염세적인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이 담배를 트레이에 비벼 껐다. 

조지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 아까부터, 저 숙녀분이 춤 제안을 거절하는 횟수를 세어봤거든?”

“허. 할 일이 참 없나 보군” 

옆에서 윌리엄이 어이없이 웃는다. 

“총 여섯 번. 여섯 번 이상은 춤을 거절했어.”

“막 데뷔했으니 절박하지 않은 것뿐이겠지. 혼기도 안 찼겠다.” 

이미 상대가 있거나. 윌리엄이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여자를 기억해낸 것이다. 

무료했던 첫 만남. 구닥다리 시골 저택의 남작과 그의 딸 매들린 로엔필드. 전형적인 시대착오적 시골 봉건 귀족 가문 정도로 갈무리된 첫인상이었다. 

로엔필드 남작은 꼴사나웠고, 흥미로운 사람은 더더욱이 아니었다. 딸에 대해서는, 글쎄….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었지. 그의 쪽에서도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쑥스러움이 지나치게 많은 타입은 그쪽에서도 질색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매들린 로엔필드는 꽤 색다르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녀는 연회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영화를 관람하듯 굴고 있다. 그 관조하는 시선이 재밌었다. 

“저 여성분께 말이라도 걸까 봐.” 

조지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아서라. 무례하잖냐.” 

윌리엄이 질색하며 조지를 말렸다. 

“요즘 세상에 그 정도가 뭔 무례야. 어디 빅토리아 시대냐. 잘 봐라, 이 몸이 나설 테니 기다리고 있어.” 

조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이안이 그보다 먼저 걸어나갔다. 

“어어. 이봐. 자네….” 

뒤에서 조지가 어이없어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안 노팅엄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선수를 쳤다. 언제나 가지고 싶은 건 먼저 나서서 가져야만 하는 그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춤을 춘다. 여자의 가냘픈 몸을 제 팔에 얹고 빙글빙글 돌았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다채롭게 빛이 난다. 

엄숙했다가, 놀라울 정도로 미숙했다가. 다양한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여자가 마음에 든다.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여자, 자신을 안타까운 사람처럼 바라보는 그녀는 꽤 흥미로운 상대였다. 

재미. 재미는 소중한 것. 그에게 있어 많은 것이 무료하므로, 이런 작은 호기심은 귀한 것이다. 

남자는 젊었고, 그는 삶에서 단 한 번의 중대한 실패도 겪지 않았다. 모든 것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파른 속도로. 

세상 만물이 그의 손아귀에 놓여있었고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하지만 언제까지나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위험은 가치 있었다. 예를 들면 자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의 춤 같은 것 말이다. 

이안은 매들린 로엔필드와 왈츠를 여러 번 췄다. 좌중의 시선이 그 둘에게 꽂히는 것이 뒤통수로 느껴졌다. 번거롭지만 감당할 수 있다. 

여자는 춤을 추는 내내 손을 심하게 떨었다. 시선은 그를 바라보면서도, 그를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흐릿했다.

그가 여자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왜 떠는 걸까. 괜찮아. 무슨 이유가 되었건.  

어차피 지금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다. 

* * *

“결국, 춤을 추기는 췄더구나.” 

“네….”

“한 사람하고만 계속해서 말이다.” 

후작부인이 도끼눈을 뜨고 매들린을 추궁했다. 

‘아… 네…. 대단하신 마스터 노팅엄을 독차지하다니, 잘못했습니다.’

옷을 왜 이렇게 촌스럽게 입느냐, 왜 이렇게 말을 안 하냐, 하다못해 지나치게 얌전뺀다고 혼나니 이제는 그냥 숨만 쉬어도 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서 후작부인이 매들린을 훑어보았다. 떨떠름함과 흡족함이 반반 섞인 표정이었다. 

“매들린 로엔필드.”

“네?”

“……노팅엄 가문은 굉.장.히. 명예롭고, 훌륭하고, 부유하기까지 하단다.”

“…그렇죠.”

거의 ‘지구는 둥글다’ 수준의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노팅엄가의 부는 시대가 지날수록 더해지기만 했다. 사실 그때도 그랬다. 매들린 이외에도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었다. 

남자가 제대로 운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그와 제 딸을 결혼시키고 싶은 가문은 많았다. 

그 숱한 예비 신부들 가운데서 매들린이 뽑힌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가문, 나이, 뒷배 없음. 등등.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툭.

후작부인이 매들린의 어깨를 아주 살짝 밀쳤다. 

“네?”

“…잘…해봐.” 

후작부인의 말에 매들린이 황망히 그녀를 쳐다봤다. 부인은 손부채질을 하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윽. 정말 어이가 없어.

“…넘겨짚으시는 거예요. 그저 춤 몇 번 춘 것뿐인데.”

이 이야기를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호들갑을 떨지, 벌써 피로했다. 

피곤함을 넘어서 진심으로 거북했다. 남자와 춤 한번 췄다고 이렇게까지 넘겨짚고 엮을 일인가 싶었다. 이안 노팅엄은 매들린 말고 다른 여자들과도 춤을 췄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겠어. 어떻게든 동선을 겹치지 않게 해두고 말이다. 다시금 다짐했다. 

* * *

한 사람의 다짐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매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짐을 지켜나가기엔, 런던 사교계는 지나치게 비좁았다. 노팅엄 가문은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강력했으며, 유력한 자리에 나갈 때마다 남자를 마주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안 노팅엄을 제외하고 그녀를 피로하게 하는 건 사교계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신사 숙녀들은 서로 깃털을 자랑하는 공작새들과도 같았다. 얼마나 더 쓸 수 있는지, 더 고상할 수 있는지를 과시하듯 경쟁한다. 신흥계급들은 신흥계급들대로, 쇠락해가는 가문들은 그들대로 역할을 연기해 가면서.

쇠락해가는 가문의 영애 역할을 맡은 매들린은 기계적으로 미소지었다. 하도 웃느라 입꼬리가 경련할 지경이었다. 만찬회가 끝이 나고 다들 옹기종기 모여 식후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전기가 들어오는 실내는 밤에도 환했다. 사람들의 하얀 치아가 그 밑에서 윤기 나게 빛났다. 

“예술은 타락했어요. 이제는 도처에 누드뿐이에요.” 

그녀 앞에 앉은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조지 콜하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갈색 머리의 촉망받는 변호사였다 그의 외모는 준수했지만, 말이 지나치게 많았다. 

“게다가 처절하게 추하죠. 프랑스에 있는 여자들이 다 그렇게 생긴 것도 아닐 텐데요.”

피카소, 마티스. 매들린은 조지 콜하스가 말하는 이들을 알 것도 같았다. 전쟁 후 그들은 굉장히 유명해졌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매들린조차 알 정도였으니, 그들의 그림값도 천정부지로 올랐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들의 그림을 한 점 사둔다면 굉장한 투자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장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계속 식탁 건너편을 힐끔거리느라 조지의 말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곳에는 이안 노팅엄이 있었다. 남자는 오늘따라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옆에 앉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사벨 노팅엄. 이전 삶 속에서 불운하게 유명을 달리한 이안의 여동생이었다. 

이사벨 노팅엄은 저택의 사진에서 본 것처럼 우아한 모습이었다. 오빠를 닮아 오만해 보이는 눈썹과 길고 하얀 목, 나른한 시선에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 귀하게 자란 여자의 표본이라 할 만했다. 눈빛에서는 지성과 고집이 느껴졌다. 

매들린으로서는 계속해서 그쪽으로 시선이 가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살아 움직이는 이사벨 노팅엄을 본 건 처음인걸. 

“흠흠.”

눈앞의 조지 콜하스가 몇 번 헛기침하자, 매들린은 자신이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쎄요. 저는 예술을 잘 몰라서.”

매들린이 옅게 미소지었다. 지금은 눈앞의 남자가 원하는 대로 떠들게 놔두는 게 좋았다. 

“그래도 좋아하는 화풍의 그림 하나쯤은 있겠지요?”

“……”

매들린이 살짝 주저했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소리 높여 말하는 법이 별로 없었다. 

“에드워드 번 존스의 그림을 좋아해요.”

“흠. 그렇습니까?”

남자가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쨍그랑, 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이안의 동생, 이사벨이 악을 쓰고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샴페인 잔이 산개해있었다. 

단발머리의 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소리를 질렀다. 

“오빠가 나에게 참견할 일은 아니야!”

“이사벨, 목소리를 낮춰.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늘 그렇게 사람들 시선이나 신경 쓰며 살라고.”

“이사벨.”

이안의 표정은 냉담했다. 전에 자신과 함께 춤을 추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눈빛이 첨예했다. 그 모습에 삼자인 자신도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만찬회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제 오라버니의 냉정한 태도를 못 견디겠는지, 아니면 부끄러운지 이사벨 노팅엄이 서둘러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사람들을 밀치며 떠났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계속했다. 

“앗….”

그 모습을 본 매들린은 갑자기 전신이 마비되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사벨이 언제 죽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해요.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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