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교 파티
-- 열일곱 살의 매들린.
시간은 어느덧 흘러 5월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런던의 사교 시즌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사교 시즌이 시작된다는 것은 곧 매들린의 데뷔탕트가 가까워진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매들린은 덤덤했다. 처음도 아니거니와, 자신의 사교계 데뷔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으리란 것도 알기 때문이었다.
전쟁도 전쟁이었고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속 빈 강정같이 소득 없는 시즌이었다. 드레스 맞추랴, 춤 배우랴 정신없었던 것만 기억났다.
게다가 데뷔탕트로 인해 돈은 얼마나 많이 쓰게 되는지. 앞으로 다가올 불행은 까맣게 모르는 채 사교계가 세상 전부인 양 굴었던 게 바보 같았다.
매들린이 우울해하건 말건, 남작은 런던에 갈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뇌조 사냥을 하거나 포커를 할 생각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괜찮은 ‘신사’분들은 다 런던에 있겠죠.
매들린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 * *
열차 특등칸에 앉겠다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매들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바보 같은 놀음에 맞장구를 쳐주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아버지의 파멸적인 투자를 막은 대가로 여겨야 했다. 매들린은 냉소적인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달래봐도, 어차피 전쟁 나서 파투날 사교 시즌이라는 생각에 기분만 가라앉았다.
‘그 후작부인의 지루한 모임에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은데.’
복잡한 의례와 형식들.
시골에서 왔다는 이유로 미묘하게 자신을 깔보는 신사 숙녀들의 기 싸움에 다시 시달릴 생각을 하니 입맛이 떨어졌다. 반대로 귀족이라는 직함에 환상을 가진 부르주아들을 상대하는 것도 그다지 입맛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플랫폼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시골과는 정반대로 왁자지껄한 활기찬 도시의 모습이었다.
도로에는 무쇠로 된 차들이 다니고 영화관 포스터가 붙여져 있고…런던에 처음 왔을 때 어찌나 즐거웠었던지, 그때는 정말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지 뭔가. 지금도 설레는 감정이 아주 없진 않았다. 런던은 언제나 그녀를 벅차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저런 차들이 정말 싫다니까. 저 고철 덩어리들은 정말 흉물스럽구나. 매들린, 이 아비의 팔을 꼭 붙잡으렴.”
“…….”
런던에 사는 먼 친척인 후작부인이 사교계 내내 그녀의 ‘보호자’ 역할을 할 터였다. 보호자라니, 무슨 빅토리아 시대도 아니고. 매들린은 한숨을 쉬었다. 후작부인이 엄마 새 역할을 자처하면서 그녀를 얼마나 들볶을지 알고 있기에 벌써 진이 빠졌다.
타운하우스에 도착하면 잠이나 푹 자야겠다. 런던은 내일부터 둘러봐야 할 것 같았다.
* * *
런던의 사교계는 5월 즈음 무르익기 시작해서 여름에 정점을 찍는다. 상류층 신사 숙녀들은 그동안 클럽, 만찬, 무도회, 파티로 정신없이 유흥을 보내는 것이다.
그해 사람들은 유독 흥에 겨워했다. 지식인들은 전쟁이 절대 일어날 리 없다 호언장담했고,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평화를 찬양하며 반짝이는 현재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굴었다.
영화 포스터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 빙글빙글 춤을 추는 사람들. 열띤 얼굴의 남녀들이 하이드파크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거리 곳곳에는 시위와 토론회가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런던은 축제였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축제. 매들린은 그 신기루 속에서 홀로 고독했다. 미래를 아는 게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터였다.
그런 끔찍한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어찌 기분 좋을 수 있을까. 아무리 그녀가 지금 파티가 한창인 연회장 한가운데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매들린은 기둥 뒤로 물러나서 샴페인을 홀짝였다. 왕을 알현하는 데뷔탕트 의식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며칠간 이 자리 저 자리 끌려다니느라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자신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후작부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잔소리가 많았다.
매들린은 순진한 열일곱 처녀를 연기하는 게 무척 힘든 일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중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이 자리 저 자리 끼면서 잘 보이려고 노력했을 텐데, 이제 와서 다시 그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얼마 안 가 구닥다리가 될 예법을 들먹이며 기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누가 주최한 파티에 참석했는지도 잊을 지경이었다.
‘내가 너무 염세적인 건가. 그 누구처럼….’
매들린 로엔필드는 연회장의 뒤켠에 멀찍이 서서 사람들이 쌍을 이루어 춤추는 꼴을 지켜봤다. 그녀에게 중간중간 신사들이 찾아와 춤을 청했으나, 그때마다 매들린은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명했다.
네 번 정도 청을 내려놓자 더는 사람들이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쌀쌀맞게 구는 매들린을 보는 후작부인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갔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다시 살고 싶은 것이지, 사교계에서 꾸며진 인형 노릇을 다시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찾은 삶 속에서 무엇을 할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직업을 가지고, 글을 쓰고, 피아노를 치고,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난 생 내내 생각해왔던 것을 펼치고 싶었다. 신문에서 읽었던 사람들처럼,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남편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가 무료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그녀 옆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음?”
매들린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모든 문제의 원흉이 서 있었다.
“…….”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 꽂히기 시작했다. 부유하고 지체 높은 백작의 후계자가 막 사교계에 데뷔한 숙녀에게 말을 거는 광경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그걸 신경 쓸 형편이 아니었다.
“…파티가 적잖이 지루해 보이십니다. 로엔필드 양.”
“…….”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를 들은 매들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 증오해 마지않는 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이.
자신의 전 남편.
젊은 이안 노팅엄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장난스러운 이안 노팅엄이라. 그것은 그녀로선 무척이나 생경한 광경이었다.
이안 노팅엄은 매들린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쑥스러움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능청스럽게 말을 붙였다.
“영애께서 신사들의 청을 연거푸 거절하는 것을 봤습니다. 꽤 유쾌하더군요. 얼굴들이 잔뜩 익어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니.”
“…….”
“이 여흥이 영애께는 퍽 지루하신 모양입니다?”
남자의 입매가 잔잔한 호선을 그렸다. 성공 가도를 걸어온 젊은 남자 특유의 자신만만함이 만면에서 우러나왔다.
“…그런 건 아니에요.”
매들린의 입안의 혀가 얼어붙은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볼이 새빨갛게 익었다.
“신사로서 숙녀에게 곧바로 말을 붙이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임을 압니다만, 우리는 일전에 이미 인사를 나눈 사이이니 양해해주시죠.”
남자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랬죠.”
매들린은 최대한 춤추는 남녀의 모습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머릿속이 더없이 혼란스러웠다.
이 남자는 어째서 지금 저에게 다가온 걸까. 이전에도 매들린은 이 파티에 참석했었다. 그때 그녀는 이안 노팅엄을 만나지 못했다.
매들린에게 이안은 넘볼 수 없는 상대였고, 이안에게 매들린은 사교계에 갓 데뷔한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이전에 둘이 서로에게 말을 섞지 않은 이유는 당연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그가 왜 자신에게 말을 건단 말인가? 게다가 일전의 로엔필드 저택에서의 만남도 꽤 불유쾌한 것이지 않았는가. 남자가 갑자기 자신에게 접근하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이안 노팅엄의 등 뒤에는 일군의 신사들이 모여 저들끼리 웃고 있었다.
노팅엄의 동료들로 보이는 그들은 하나같이 우아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정재계의 유력인사들로 추정됐다.
“…….”
아. 그제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지금의 남자에게는 별다른 의도가 없는 것이다. 그는 태생적으로 자신만만한 성격이었다.
매들린이 구석에 서서 연거푸 사내들의 청을 거절하는 모습이 꽤 재밌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그녀를 설득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지. 일종의 내기였다.
그의 동기는 그저 단순한 호기심, 또는 호승심이었다.
저택에서도 제게 쌀쌀맞던 숙녀가 파티에서도 냉랭하게 구니, 저 여자는 도대체 뭘까 싶기도 했을 터. 기왕 파티에서 봤으니, 주위 사람들에게 과시라도 할 겸 말을 붙여보자는 심사가 아닐까?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술기운도 올랐겠다, 매들린이 안정된 호흡으로 그를 상대했다.
“마스터 노팅엄께서는 이 광경이 이상해 보이진 않으세요?”
“이상하다니. 지극히 보기 좋은 모습 아닙니까?”
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측면으로 기울였다. 굵은 눈썹이 기분 좋은 경사를 그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데요.”
전쟁도, 질병도, 닥쳐올 불운도 모르는 채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상해요. 매들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안 노팅엄이 하하, 웃었다. 그는 매들린을 역시 이상한 여자라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가 즐겁게 대답했다.
“영애의 말이 맞아요.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감히 짐작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더더욱 현재를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매들린의 목소리에 켜켜이 쌓인 회한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마스터 노팅엄.”
“영애께서는 지난 시대의 엄숙주의에 빠져있는 것 같군요. 긴장을 좀 푸시죠. 즐기지 않는다고 불행을 피할 순 없으니 말입니다.”
“긴장하고 있진 않아요. 그저 허례허식뿐인 사교에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매들린이 뒤늦게 항변했다.
“흠.”
“이 모든 게 가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춤추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저 제가 원하는 게…이런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요.”
매들린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왈츠가 두 남녀 사이의 침묵을 메웠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 앞에서 너무나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침묵을 남자가 먼저 깼다. 그가 나른하게 제안했다.
“영애께서 원하는 게 저와의 춤이라면 어떻습니까.”
“네?”
매들린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곳에는 남자가 있었다. 명멸하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 한 점의 콤플렉스도, 의도도 없이 해맑게 그녀에게 춤을 권하는 이안 노팅엄이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새까맣게 모르는 채 남자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었다.
그가 매들린의 장갑 낀 손끝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지극히 평연하고 다소 즐거운 투로 그가 청했다.
“진중한 매들린 로엔필드 양.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