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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백작가의 사연 (5/121)

4화. 백작가의 사연

-- 스물넷의 매들린. 

눈을 뜨고 일어나서 다시 잠이 들 때까지, 매들린 로엔필드의 삶은 적요했다. 

그녀 주위의 사용인들은 정원관리인을 제외하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에겐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차와, 편안한 잠자리가 제공된다. 한치의 불편함이 없도록 정밀하게 계산된 편의다. 

매들린은 자신이 신화 속 프시케와 처지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프시케는 괴물의 제물로 바쳐진 신전에서 형체 없는 유령들의 시중을 받는다. 그녀 역시 저택 속 말 없는 그림자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비슷한 형편이었다. 

신화적인 비유는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녀는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크레타의 미궁을 생각했다. 흉악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수많은 방들이 있고, 방마다 가지각색의 사연이 있었다. 

그녀가 알아서는 안 될 비밀들. 먼지의 더께 밑으로 사라질 기억들. 

그리고 미궁의 중심에 미노타우르스가 있듯이, 저택의 심중에는 백작이 있었다. 

백작이 기거하는 층은 금기의 장소였다. 사용인들도 오로지 정해진 소수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매들린은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층을 방문하지 않았다. 

백작이 따로 매들린의 출입을 금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이곳은 너를 위한 곳이 아니야.’라는 압박이 있었다. 

백작이 그녀에게 관여하지 않듯이, 그녀 역시 백작에게 관여해선 안 된다는 것이 이 노팅엄 저택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저택에는 초상화가 많았다. 이안 노팅엄이 10대 백작이었으니 거슬러 올라가도 몇백 년은 족히 가야 했다. 튜더식 옷을 입은 남녀의 초상화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가장 끄는 것은 사진이었다. 역대 가주들의 화려한 초상화 옆 켠에 놓인 작은 흑백 사진들. 

개중에는 밝게 웃고 있는 세일러복 소년의 사진도 있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뻗쳐있고, 표정은 잔뜩 신이 나 있는 모습. 엄숙한 초상화들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인 사진이었다. 

환한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에는 짓궂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남자아이가 백작의 남동생인 에릭 노팅엄이란 건 저택에 온 지 3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는 스무 살의 나이에 전쟁에 나가 벨기에에서 사망했다. 이안 노팅엄은 참호에서 그 소식을 접했을 터였다. 

남자아이의 사진 옆에는 아름다운 여자의 사진도 있었다. 흑발의 차가운 미녀. 이사벨 노팅엄. 그녀도 마찬가지로 백작의 여동생이었다. 

오만하고 고고한 콧대와 꾹 다문 입술이 그녀의 자존심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그녀는 매들린과 동갑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연인과 함께 탄 차가 뒤집어졌다고 했다.

물론 거기에는 뒷이야기가 더 있었다. 사교계에서 암암리에 가십처럼 전해지는 이야기. 이제는 전설이 된 이야기 말이다. 

그 가십에 따르면, 이사벨 노팅엄은 일부러 핸들을 꺾어 다리 아래로 차를 빠트렸다. 노팅엄가 삼 남매의 연이은 불행은 사교계에서 꽤 유명한 대화 소재인 모양이었다. 저택에 서린 저주 때문이라느니, 선조가 파헤친 가톨릭교도들의 무덤 때문이라느니 말이 많았다. 물론 그걸 매들린에게 대놓고 묻는 염치 불고한 인간은 없었으나, 그녀가 사교계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소문은 소문을 낳고 몸집을 키워갔다. 

매들린이 보기에 그들의 불행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특별한 불행이 아니라고 해서 사소한 불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백작을 동정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이곳은 미궁이었다. 부와 명성과 역사가 부식하는 오래된 잔칫상. 이안 노팅엄은 그 미궁 속에서 하염없이 배회하는 유령이었다.

그리고 내려진 결론은 언제나 같다. 매들린은 테세우스가 아니었다. 그 누구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값싼 동정심은 필요 없었다. 

* * *

매들린이 처음부터 호기심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잘 해내고 싶었다. 남자를 돕고 싶었다. 그것이 희망사항일 뿐이란 걸 결국 깨쳤지만, 그전까지 그녀는 의욕에 차 있었다. 

그녀는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초상화와 사진들을 뒤적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노팅엄 저택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아직 실감하지 못했던 때였다. 

매들린은 심지어 백작이 기거하는 3층을 몰래 돌아다니기도 했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 그를 최대한 잘 알아야 한다 생각했다. 

집사나 나이 든 사용인들에게 물어봤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네,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이 세 가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백작이 있는 서재를 제외한 방들에는 하나같이 그녀가 모르는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비워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용감이 있는 것을 보아 한때 누군가가 살았던 게 분명했다. 

그녀는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방의 주인을 유추해 보려 했다. 이 방은 에릭 노팅엄의 방이 분명하다. 모형 비행기와 지구본이 여러 개 놓인 것을 보니…. 이런 식으로.

매들린이 저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방은 피아노가 있는 방이었다. 이사벨의 방이 아닐까 싶은 그곳은, 무척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크림색 벽지와 고급 피아노, 곳곳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로코코풍 그림들이 이사벨의 취향을 나타냈다.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 

어쩌면 그녀와 이사벨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매들린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매들린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꽤 열심히 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름다운 게 좋았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숭배했다. 아버지와 함께 예술과 낭만에 대해서 토론하는 걸 즐겨 했다. 

매들린은 주제넘게도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단 생각도 했었다. 

일곱 살 때였나. 왕립 오케스트라 연주가가 매들린이 절대음감이라며, 천재라며 입이 마르게 칭찬할 때였다. 아버지의 냉소만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음악가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무어라고 했었는지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매들린의 재능이 어중간해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없을 거라 했다. 비틀린 냉소요, 질투였다. 귀족 여성에게 정신을 혼란케 하는 예술 활동은 장려할 수 없다고도 했었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한동안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얼마 안 가 괜찮아졌지만, 피아노에 대한 열정도 식어버릴 정도의 일이었다. 

‘맞는 말이겠지.’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맞는 말을 했다 싶었다.

어차피 그 정도 재능이었으니, 그만둔 게 아니겠나. 자신이 정말 천재였더라면 끝까지 놓지 않았을 것이다. 

씁쓸한 상념을 뒤로한 채, 매들린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손가락은 절로 위치를 찾고, 그녀는 자신만의 작은 거품 속으로 침잠했다. 

프랑수아 쿠프랭의 ‘신비한 바리케이드’. 매들린은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가 음률을 짜내기 시작했다. 

거품이 점점 공고해진다. 그녀는 자신이 저택에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연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매들린이 황급히 건반에서 손을 뗐다. 뒤를 돌아보자 문간에는 뱀파이어 같은 형상의 백작이 서 있었다. 

“나가.”

“……”

매들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백작의 찬 서리 같은 호령이 재차 내려왔다. 

“나가란 말, 못 들었나.”

그가 굵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절뚝거리는 남자가 매들린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고서도 거대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들린의 심장이 조여왔다. 

“내가 직접 끌고 나와야 하나.”

“…제가 뭘 잘못했죠?”

매들린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저는 이 집의 안주인이고, 이곳의 물건은 제 물건이기도 해요. 

“당신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남자가 동굴같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눈빛이 주저함으로 흔들렸다. 처음으로 남자에게서 인간다운 고뇌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매들린에게 다시 명령했다.

“이곳에 다시는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마.”

다음날, 피아노 방의 문은 잠겨있었다. 매들린은 너무 분하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간신히 찾은 인생의 낙이 다시 빼앗긴 기분이었다. 

백작에게 당장이라도 대거리를 하고 싶은 마음과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저를 바라보며 착잡해하던 얼굴을 생각하면 얼굴이 분노로 익었다. 

분노는 이내 체념이 되었다. 입이 썼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뒤, 저택 앞마당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매들린이 의아해하며 나아갔다. 

인부들이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저택 안으로 운반하고 있었다. 당황한 매들린이 풋맨인 찰스에게 따져물었다. 

“저게 뭐죠?”

“피아노입니다. 마님.”

“피아노인 건 나도 알아요. 저게 무슨 연유로 있는지를 묻는 거잖아요.”

매들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백작이 무슨 수작인지 알아야만 했다. 찰스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백작님께서……”

“…….”

그가 뭔가 되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한다는 듯, 매들린에게 속삭였다.

“백작님께서 마님께 드리는 겁니다.”

알 수 없는 이였다. 화를 내고서는, 늘 선물을 준다. 매들린은 속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아만 갔다. 

미안하다는 건가? 아니야. 사과는 직접 사람을 보고 하는 거지. 이래서야 애완견 취급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녀의 발치 옆에서 코리가 낑낑거렸다. 낯선 사람들로 인해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강아지를 안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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