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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4/121)

3화.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매들린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두 사람이 차를 마시는 광경을 훔쳐봤다.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아버지가 들이대고 있었다.

남자는 여행으로 인해 지친 듯 나른해 보였고, 일견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숱 많은 검은색 뒤통수. 긴 다리를 꼬고, 손가락을 까딱이며 남작의 말을 듣고 있는 여유로운 모습. 

그런 전 남편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매들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 저택을 떠나면,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녀는 계단 위를 올라가며 되뇌었다. 

‘좋은 인연도 아닌데 이제 꿈속에서라도 만나지 말자고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사이로 남는 게 서로에게 좋으니까. 

남자는 그날 밤이 되기 전, 마차를 타고 저택을 떠났다. 마차가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매들린은 잘 준비를 했다. 

바람이 쌀쌀하다.

‘내가 잘못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으니, 적극적으로 남자의 인생에 개입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고민은 잠깐이었다.

이번 생에서 그를 구원할 여력이 없다. 그와 엮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들린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둘씩 고쳐나갈 생각이었다. 

* * *

-- 스물여섯 살의 매들린.

4년이 지나갔다. 그와 결혼한 4년이. 이 저택에 갇힌 4년이. 그리고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4년이. 

집사가 뻣뻣하게 다려준 신문을 읽으면 그녀는 모든 게 놀라웠다. 

런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매들린의 상상을 초월했다. 여자들이 머리를 소년처럼 짧게 자르고, 무릎이 훤히 드러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 돌아다닌다고 했다. 남녀할 것 없이 한군데 모여 몸을 비비며 춤을 춘다고도 했다. 댄스홀은 옛 사교계의 점잖은 무도회장 같은 게 아니었다. 

미국 재즈가 선풍적인 인기였다. 

아버지가 알았으면 경을 칠 일이었으나, 어찌하겠는가. 그는 죽었고 산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뿐이다.

그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 없었다. 귀족 계급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의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축음기 위에 올려진 판처럼, 회전하는 목마처럼 말이다. 

오로지 매들린만이 종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상영이 끝난 텅 빈 극장에 앉은 관객 같은 기분이었다. 

오히려 이안 노팅엄보다 자신이 더 고립되어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 이 새장 같은 감옥 속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항시 물질적으로 풍족한 이곳에서. 

이곳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매들린은 장미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유치한 기대 같은 것도 있었다. 

언젠가 이 황폐한 저택 정원이 생기있어지면, 백작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몸이 불편한 그가 장미를 보고 즐거워하길 바랐다. 순수한 아름다움과 생기를 느끼고, 조금이라도 고통에서 해방되길 원했다. 장미가 커가는 것을 보며 서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성싶었다. 

지금 와서는 쓸모없는 희망 사항이라는 걸 잘 알았다. 백작은 그녀의 취미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그나마 무시하는 게 그의 딴에는 최대한의 선의라는 게, 서글펐다. 

따라서 이 일은 오로지 혼자의 즐거움을 위한 소일거리에 불과했다. 시대의 소음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는 작은 취미. 그 이상,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다. 

“저기, 호머 씨.” 

벤 호머는 노팅엄 저택의 정원관리인이었다. 정원관리인이 없다는 말에 매들린이 직접 고용한 유일한 사용인이었다.

모든 사용인들을 철저히 자신의 통제 아래에 놓길 원하는 남자가 드물게 허락한 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님.” 

벤 호머가 매들린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불퉁한 생김새와 달리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노인이었다. 투박한 손끝으로 꽃봉오리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양을 보면, 절로 존경심이 샘솟곤 했다. 

“이 가지, 왠지 누군가가 일부러 꺾은 것 같지 않아요?”

화려한 크림색 맨스필드 장미였다. 정성스레 가꾼 꽃의 가지가 꺾여있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꺾은 게 분명했다. 

“허. 그런 것 같군요. 이럴 수가.”

노인이 혀를 찼다. 

“이 주위에 사람들이 돌아다니지도 않는데. 누가….”

게다가 이곳의 장미를 꺾을 간 큰 이는 더더욱 없다. 

노팅엄 저택은 인근 지역에서 ‘저주받은 유령 저택’으로 유명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원혼들이 저주를 걸어 가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거란 이야기에 마을 사람들도 방문을 꺼리는 곳이 되었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의 원혼들보다 가주인 이안 노팅엄이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그는 관심도 없겠지만, 마을에서 백작은 온갖 괴소문의 주인공이었다. 그가 피에 굶주린 사교도라는 소문도 있었고, 죽은 동생들의 유령과 말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고작 장미 하나를 꺾자고 그런 남자의 땅을 침입하는 건 이상했다. 

누굴까. 

장미가 꺾인 게 속이 상하기보다는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가 꺾었다면, 부디 그 한 송이의 꽃이 행복을 가져다줬으면 좋겠다. 매들린은 그저 가볍게 소망하고 말 뿐이었다. 

* * *

-- 열일곱 살의 매들린.

매들린은 하루에도 수십 번 희망과 절망을 오고 갔다. 

열일곱에 그녀는 데뷔탕트를 거친다. 그녀는 곧 런던의 사교계에 자신을 선보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또 이대로라면, 자신의 데뷔시즌은 엉망이 되고 말 게 분명했다. 

알면서도 바꿀 수 없는 미래였다. 매들린 로엔필드의 사교계 데뷔가 망한 이유는, 얼마 안 가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을 앞둔 이 시점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노팅엄 백작이야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다만, 아버지의 파산과 자살은 어떻게 해도 필연처럼 보였다. 

솔직히 인정해야만 했다. 로엔필드 부녀는 시대에 뒤처진 공룡이었다.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그러니, 시대에 맞추어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날밤을 새워가며 집안의 씀씀이와 재산을 기록했다. 

복식부기니 뭐니 하는 회계 방법을 알 턱이 없으니, 그저 목록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한쪽에는 집안의 지출을, 한쪽에는 집안의 자산을 적어내려가는 식이었다. 

결론은 뻔했다…. 씀씀이를 크게 줄여야 했다. 저택을 팔고, 영지도 팔고, 작은 코티지에서 산다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저택도 사 줄 사람이 있을 때 팔아야 한다. 지금 미국인들에게 팔면 괜찮은 값을 받을지 몰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로엔필드 남작의 낭비벽과 도박벽을 고치는 일이었다. 그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바꾸기 힘든 일처럼 보였다. 

응접실에 앉아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매들린에게로 남작이 다가왔다. 

“매들린. 내 딸아. 너도 드디어 스스로를 선보여야 하지 않겠니?”

“…….”

마침 잘됐네요. 저는 방금 우리가 런던의 타운하우스를 처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거든요.

아버지의 눈빛이 묘했다. 혹자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매들린에게는 마치 술수를 꾸미는 듯 음흉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꼭 런던으로 가야 할까요?”

어차피 곧 사교계는 파탄 날 텐데. 그녀의 말을 들은 아버지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너 요즘 우울하니?”

“네?”

“하루 종일 종이와 씨름하질 않나, 자꾸만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질 않나. 얘야, 그건 너답지 않아. 평민 나부랭이들처럼 구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결혼도 안 하겠다니, 금욕주의자가 될 참이냐.”

“전 결혼 안 하겠다는 말은 안 했……”

“사교계 데뷔를 안 한다는 말이야말로 결혼을 안 하겠다는 말 아니니? 우리가 정해둔 정혼자가 있었어? 매들린, 얘야. 정신 차려라. 설마 숨겨둔 연인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그런 거 없다고요!”

매들린은 이제 정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버지를 좋게 보려 해도 그는 도가 지나쳤다. 

“런던에 타운하우스를 마련한 것도 전부 너를 위해서란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그 집은 파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돼!”

“그리고 와인에 투자하시려는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지금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딸이었다. 하지만 이왕 품위며 체통이며 집어치울 작정이면 제대로 집어치워야 했다. 

매들린의 말에 정곡이 찔린 그녀의 아버지는 혈압이 올랐는지 뒷목을 잡았다. 

“아니,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네게 사업 이야기를 한 적이……”

“그 투자는 미래가 없어요.”

“몰래 편지를 읽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정말 비열하고 실망스러운 행동이구나. 곧 변호사 모튼 씨를 통해서 결정할 일이고 네 상관할 바가 아니다. 숙녀가 관심 가질 주제가 아니다.”

매들린이 벌떡 일어났다. 거울을 안 봐도 자신의 얼굴이 어떨지는 뻔했다. 

“아버지가 그 술 사업에 돈을 대시면, 저는 이제……”

“…….”

“사교계 따위 안 나가요. 영원히.”

“허어.”

딸 입에서 나오는 ‘따위’라는 거친 말에 아버지는 완전히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고상하고 품위 있으며 상냥한 매들린 로엔필드는 온데간데없이 악다구니를 쓰는 여인이 눈앞에 있었던 거다.

“결혼도 안 할 거예요.”

“…뭐라고. 지나치구나. 매들린!”

그녀의 아버지가 장황하게 프랑스에서 얼마나 좋은 샤또를 수배했는지, 그 농부가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전쟁 나서 다 잿더미 될 땅인데. 매들린이 똑똑한 발음으로 말했다. 

“계속 고집을 부리시겠다면 어쩔 수 없네요. 수녀라도 되어야지.”

“매들린 로엔필드! 이건 참을 수 없어! 근신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영원히 근신하죠, 뭐. 어차피 지참금도 없어서 독신으로 살 팔자인데.”

매들린은 소리를 빽 내지르고선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2주에 거친 단식투쟁이 시작되었다. 

별수 있겠는가. 사교계 시즌이 곧 시작이 될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딸은 머리를 산발을 한 채로 금식 투쟁을 하질 않나, 정말로 수녀라도 될까 봐 겁이 났는지 남작은 자신의 투자 결정을 철회했다. 그는 매들린이 보는 앞에서 계약서를 불태우고 편지도 부쳤다.

이러나저러나 그는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이였다. 그의 심약함이 이번에는 스스로를 구했다. 

말이야 단식투쟁이었지 밤에 몰래 하인층으로 내려가 빵 부스러기를 먹은 적이 있단 건 비밀이었다.

결정적인 파멸의 단초를 막은 매들린 로엔필드는, 완전히는 아니어도 조금 안심했다. 이제 저택이랑 타운하우스랑 영지만 팔면 되나?

아마도 그러면 파산은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건실한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끝인 걸까.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걸로?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극도로 기분이 찜찜했다.

‘……정신 차려 매들린 로엔필드. 너에게 타인을 구원할 의무는 없어.’

이안 노팅엄의 불행한 운명을 자신이 굳이 나서서 구해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말이다. 이대로 간다면 그는 전쟁에 나가고, 참호에서 포탄 파편을 맞고, 온몸에 화상을 입고, 몸과 마음을 크게 다치게 된다. 

만약 한마디만 해서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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