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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안 노팅엄 (3/121)

2화. 이안 노팅엄

매들린과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말수가 적었다. 그거 하나는 예전과 같았다. 

이전 생에서도 남편인 그는 말이 없었다. 매들린의 손목을 잡고 추궁할 때처럼 몇 마디 이어서 하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침묵은 전처럼 강요되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천성적으로 과묵한 타입이란 인상을 줄 따름이었다. 덕분에 매들린은 남작이 이탈리아에 대해서 이것저것 떠드는 걸 들어야 했다. 

예전 같았으면 르네상스 화가들에 대해서 기분 좋게 맞장구를 쳤을 텐데… 지금 온통 신경이 전 생애의 남편에 가 있는지라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의 이안 노팅엄은 이안 노팅엄이었으나 이안 노팅엄이 아니었다. 

이 모순 가득한 문장은 매들린이 처한 역설 속에서 참이었다. 

지금 그녀 앞의 남자는 불행에 짓눌려 보이지도, 괴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젊고 잘생긴 데다가 유능하기까지 한, 완벽한 신사의 전형이었다. 고급 융단처럼 사르르 펼쳐질 제 앞날에 최고의 것만을 기대하는 백작의 아들. 그 자체였다. 

자신감이 곧추선 자세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호들갑을 떠는 시골 귀족 로엔필드 남작과는 태도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났다. 

회귀 전의 이안 노팅엄은 매들린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했고 그녀의 손이 제 화상 입은 손등에 닿으면 소스라치며 화를 냈다. 자세는 늘 구부정했다.

두 이안 노팅엄 간의 차이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착각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흘깃흘깃 남자를 곁눈질하던 매들린과 이안 노팅엄의 시선이 마주쳤다. 매들린이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들켜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남자가 살풋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마치 매들린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무감정한 얼굴이 일견 풀어지면서 온유한 미소가 깃들자 훨씬 그럴듯하게 잘생겨 보였다.

‘내가 부끄러워서 입을 다무는 줄 아는 건가.’ 

매들린으로선 차라리 그렇게 오해하면 다행인 일이었다. 풋내기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반한 거라고 생각해 준다면 말이다. 실제로는 지금 상황이 너무 거북해서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지만. 

생리적인 거부반응이라고 해야 할까. 이치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께름칙했다. 

자신이 아는 이안 노팅엄은 불행한 남자였고 불행해야만 하는 남자였는데, 지금 눈앞의 그는 젊고 자신만만한, 전도유망한 젊은이지 않은가. 

시골 귀족 영애 매들린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남성의 모습이었다. 

전쟁이 망가뜨리기 이전의 그가 바로 눈앞의 남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매들린으로서는 굳이 확인하려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실이었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그 진실 앞에서, 눈을 감지도 완전히 뜨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가 맞을 결말을 알고 있었다. 순간 안타까움이 스쳤다. 위험했다. 

그와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매들린은 속으로 되뇌었다. 

* * *

-- 스물두 살의 매들린. 

매들린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제 남편을 증오했던 건 아니었다. 사랑할 수 없으리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잘 해내고 싶었다. 부부 사이에 사랑이 필수 불가결하진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 사랑하지 않더라도 좋은 부부로 지내고 싶었다. 

상처받은 남자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그에게 충성하리라. 그를 낫게 하리라. 사람들이 칭송하는 현명한 아내가 되리라. 

그러나 그녀의 소박한 꿈은 언제나 그렇듯 암초에 부닥쳐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는 첫 단추부터 맞지 않았다. 

백작은 첫날밤부터 그녀의 침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에 안도해야 할지, 괴로워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동침은 미처 상상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거절은 모멸적이었다.

첫날밤뿐이랴, 백작은 매들린과 한시도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식사는 늘 따로 서재에서 했으며, 같이 차를 마시며 소일하는 일도 없었다. 물론 테니스를 치거나, 집안 대소사를 논의하는 법도 없었다. 

결혼식을 치르고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매들린은 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조차도 평범한 대화라기보다는 대거리에 가까웠다. 

서재의 큰 의자에 기대앉아, 자신을 귀신처럼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제 존재를 잊으신 것 같으세요.”

그가 웃었나? 아니, 그는 웃지 않았다. 여윈 창백한 얼굴이 난롯가의 불에 비쳐 명멸했다. 

“잊지 않았어.”

그는 지치고 피로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매들린은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 나를 놀리고 있어.’

그에게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화를 내면 낼수록 제 쪽이 절박해 보일 게 뻔했다. 

“따분해요.” 

그것이 그녀가 낼 수 있는 최선의 항의였다. 따분하다며 심약한 여인의 행세를 하는 것. 

백작이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매들린은 조금 무서워졌다. 정말 소문대로 그가 전쟁 중 참호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가 당장 일어나서 자신을 목 졸라버릴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긴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생기 없이 제 아내를 쳐다봤을 따름이었다. 

씨익. 

일그러진 미소를 머금은 그가 매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대한 흉터와 화상으로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일부분이 드러났다. 

호흡을 할 수 없어진 매들린은 그대로 그 저주받은 방을 나갔다. 복도를 걷는 그녀의 걸음이 가빴다.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매들린은 더는 아이가 아니었다. 

무서워. 아니, 무서운 것보다 수치스러웠다. 

그저 그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위협했고, 그것에 겁이 질려 도망치다니.

겁쟁이.

매들린은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다음 날, 노팅엄 저택의 집사가 그녀에게 작은 아기 강아지를 선물했다. 매들린이 느끼는 모욕감에 쐐기를 박은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너의 남편이 될 수 없으니, 따분하다면 차라리 강아지를 데리고 놀아라.’

그의 선물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매들린은 오들오들 떠는 작은 새끼강아지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작은 공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 * *

지금 열일곱 살로 돌아온 매들린. 그녀는 전쟁이 망가뜨리기 이전의 이안 노팅엄이 바로 눈앞의 남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토록 멀쩡한 사내였다니. 

매들린으로서는 굳이 확인하려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사실이었다.

“어디, 속이 안 좋니?”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살짝 짜증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지금 그는 최대한 눈앞의 이안 노팅엄의 환심을 사고 싶은 모양이었다. 산책하던 딸을 만난 것도 옳다구나 생각할 터였다. 이왕이면 더 빨리 어여쁜 딸을 보여주고 싶었겠지.

그 행동이 남자에게 얼마나 웃길지는 생각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정신적 나이를 먹고 경험도 쌓인 매들린은, 아버지의 행동이 퍽이나 유치하게 여겨졌다. 이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이전의 삶을 반추했다. 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노팅엄 백작 가문은 나라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미 대륙에서의 투자가 크게 성공한 것과 더불어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까지 붙으면서 승승장구했다.

지금 시점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예전에서나 이후에나 대단한 가문이란 이야기였다.

물론 그 강력한 백작 가문의 가주가 무시무시한 은둔자가 되면서 갖가지 소문이 붙었다. 막후에서 세계정세를 조종하고 있다든가 하는 소문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노팅엄 백작 가문과 그 가문의 가족 회사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부유했고 매들린은 그 부를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전 생에도 원하는 물건은 전부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갖가지 디자이너들의 맞춤옷이라든가. 보석도 원한다면 금방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치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금방 질려버려서 제풀에 지쳐 그만두었다. 

각설하고, 아버지가 이안 노팅엄을 데려오는 것은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로엔필드 남작과 노팅엄 가문은 서로 알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일방적인 아는 척에 불과한 얄팍한 교류였다.

매들린이 회귀 전 이안 노팅엄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전부 그가 전쟁에서 크게 다쳤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상대였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왜 그가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들린이 그런 상념에 푹 잠겨 말이 없자, 남작이 몹시 심통이 난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노팅엄이 입을 열었다.

“남작께서는 승마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급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이었으나, 남작은 기껍게 떡밥을 물었다. 

그 즉시 둘은 승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해크니와 서러브레드의 차이에 대해서. 어떤 마구가 더 좋은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남작은 운동에 소질이 없었으나 순전히 미적인 측면에 대해서 승마를 좋아했다. 반면, 이야기를 꺼낸 이안은 스포츠 자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매들린으로서는 뜻밖의 발견이었다. 당연했다. 그는 활동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결혼 생활 내내 저택에 칩거했으니까. 저택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위층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바깥출입은 순전히 사업을 위해서만 했다. 

두 남자가 말의 품종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금방 저택에 당도했다.

* * *

세 사람을 본 하우스 로엔필드의 집사장 프레드릭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좋은 여행 되셨습니까.”

“그래. 좋았어, 프레드. 마스터 노팅엄을 런던에서 만났네. 마침 이 근방에 볼일이 있었다는 분을 내 굳이 잡아서 여기까지 데려온 걸세. 그를 위해 최고의 다과상을 준비해주게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매들린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려고 했다. 그러나 남작은 요지부동이었다. 네가 잘 치는 피아노를 쳐보지 않으련.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련. 그 말에는 은근한 강요와 압박이 들어가 있었다. 10년 만에 보는 아버지이건 말건, 짜증스러울 지경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안 노팅엄 쪽에서 먼저 의사를 밝혔다. 그는 정말 괜찮은 듯 보였고, 부녀의 실랑이가 살짝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그런 사양의 말까지 나오니 로엔필드 남작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난 널 정말 이해할 수 없구나.’ 아버지가 입 모양으로 매들린을 매섭게 쏘아붙인 뒤, 응접실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안 노팅엄은 매들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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