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1년 전으로
-- 우리의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신의 마음은 보답받지 못했다. 나는 당신을 동정할 순 있어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러기로 결심했던 걸지도 모른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당신은 괴물이고 나는 번제의 희생 제물이라 단정했던 걸지도.
처음부터 이 거래에서 순결한 사람은 없었는데 말이다.
웃기지 않은가. 이 모든 걸 인정하면서도 나는 당신을 증오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우리의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 * *
매들린이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꼬박 이틀 정도가 걸렸다. 그녀는 자신이 11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무서워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기쁘다가, 무서웠다가, 다시 행복하다가. 지나치게 강렬하고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친 탓일까. 그녀가 보이는 이상 행동은 로엔필드 저택 사용인들의 주의를 끌기도 했다.
매들린이 집사장인 프레드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린 것도 사용인들의 걱정을 증폭시켰다.
“아가씨. 역시 감기 기운이 있으신 것이…”
넋이 나간 집사와 하녀들의 표정이 볼 만했다. 한참을 난리법석을 피우며 저택 안의 사용인을 반기던 매들린은 결국 의사를 부르겠다는 집사 프레드의 말에 조용히 있기로 했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의 행동이 멋쩍기도 했거니와 지나치게 주의를 끌 것은 없었다.
지금 그녀가 거머쥔 것은 소중한 두 번째 기회였다. 그 소중한 기회를 미친 여자로 살며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흘째 아침. 그녀는 마침내 차분하게 정신을 가다듬으며, 거울 앞의 자신을 바라봤다.
성숙함보다는 앳된, 어린 얼굴이었다. 유순하고 밝고, 어두움이라고는 하나도 몰랐던 시절의 매들린 로엔필드. 꿀색 금발은 찰랑거렸고, 푸르른 눈은 장난기로 반짝였으며, 장밋빛 볼은 곱고 부드러웠다.
연이은 불행으로 인해 침울하고 냉담하기 그지없는 여자였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순진무구하게 살 생각은 없어.’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던 매들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렇게 살다가 다시 불행해지지는 않을 거야.
‘챙길 건 다 챙기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살 거라고.’
로엔필드 남작가의 몰락, 아버지의 도박벽. 얼굴도 보지 않은 상대와 한 결혼… 그 모든 실수들을 다시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열일곱이라면, 시간이 없었다. 로엔필드 남작가는 겉보기에 화려하지만, 재정적으로는 무척이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대로 완전히 실체가 드러나려면 1년 남짓 남았다.
5년 전 매들린의 어머니가 죽고 나서 남작가는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엔필드 남작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돈을 써댔고 시골 귀족 계급의 부는 갈수록 보잘것없어지고 있었다.
냉정한 현실을 인지한 매들린이 한숨을 쉬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하녀 캐시가 들어섰다. 캐시는 수더분하고 착한 성격의 하녀로 오랫동안 매들린을 시중들었다. 주근깨가 난 얼굴이 친근하고 상냥했다.
로엔필드 가문이 파산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해고하지 못한 사용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매들린을 관찰했다.
“아씨. 이제 몸은 괜찮나요?”
“응.”
매들린의 볼이 다시 불그죽죽해졌다. 회귀하고 난 아침, 일어나자마자 캐시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던 게 생각이 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늘은 남작님이 도착하시겠죠?”
“…….”
굳이 날짜를 맞춰볼 이유도 없었다. 지금 아버지는 친구들과 한창 어디 다른 대륙 유람을 하다 돌아오고 있는 길일 터였다. 매들린의 아버지, 로엔필드 남작은 예술과 철학의 애호가를 자처했다.
그는 틈만 나면 그랜드투어를 떠나던 선현들을 본받는다며 남부 유럽을 유람했다.
‘그랜드투어라니, 무슨 17세기마냥….’
매들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당장 집안 회계 장부를 뒤져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게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매들린의 착잡한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캐시가 그녀의 머리를 빗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 이탈리아에서 멋진 신사분을 사귀셨을지도 모르잖아요? 이탈리아 남자들은 참 멋지다고 하더군요.”
“…….”
친구를 사귀어봤자 허우대만 멀쩡한 속 빈 강정이겠지. 로엔필드 남작은 눈이 높고 허영심이 많았다. 남작령의 소출은 갈수록 변변찮아지는데도 거대한 저택을 유지하려고 안달이 나서는…. 점점 꺼져가는 거품 속에서 헤엄을 치는 꼴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후 며칠간 지내면서 알게 된 거지만…매들린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주하기 힘든 진실이었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그 안온한 거품의 수혜자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멋모르는 온실 속 화초로 자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온실 속 화초가 어떻게 혼자 살아남는 법을 알겠는가.
매들린의 기분이 눈에 띄게 가라앉자 캐시가 부러 더 흥을 냈다.
“아마 남작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실 거예요.”
남작과 매들린은 부녀 사이치고도 막역했다. 분별 있고 엄격했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둘은 서로의 공상을 대리하고 채워가며 역할극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둘은 점점 세상 물정 모르게 되어갔다. 빠르게 변모하는 세상 속에서 귀족의 긍지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는 날 버렸지.’
매들린이 차분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유약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지난 생애, 로엔필드 저택이 빚쟁이와 은행에게 몰수당한 날 아침.
남작은 서재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유서에는 매들린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와 인생을 개탄하는 내용이 쓰여있을 따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겉보기에 로엔필드 가문은 완벽했고 지역 사람들이 선망할 만했다. 아들이 없다는 게 옥의 티였지만, 딸은 어여뻤으며 작위와 부도 꽤 잘나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딸을 잘 키워 부유한 집에 시집보내면 수지맞는 장사였다.
이러나저러나 시골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로엔필드는 지역의 터줏대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훤히 아는 매들린의 속만 타들어 갈 따름이었다. 그러나 괜히 눈에 띄게 굴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매들린은 여느 때처럼 옷을 차려입고, 차를 마셨고, 책을 읽으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글줄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심장이 꽉 조이는 듯 답답해하던 매들린은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몰래 집 밖을 나섰다. 집사 프레드는 언제나 산책 친구나 하녀가 동행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했다.
때가 어느 때인데 말이다. 그도 참 고루한 인사였다.
* * *
밖으로 나가니 신선한 공기가 매들린 로엔필드의 폐부를 청소해주듯 시원했다.
하지만 산책하면서도 밝고 명랑하게 굴 수 없었다. 겉은 열일곱 숙녀였으나, 속은 이미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상태인 데다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매들린은 너도밤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번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
가문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딘가 중요한 것을 놓친 듯,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언덕길을 올라갔을까, 저 멀리서 마차가 보였다.
마차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로엔필드 저택이 소유하는 검은 마차였다. 매들린은 마차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마차가 매들린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엉거주춤 서 있었다. 거의 육칠 년 만에 다시 보는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반가울까. 원망스러울까. 아니면….
“오. 매들린. 여기서 홀로 산책 중이었구나.”
…아무렇지도 않을까.
자신을 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게 웃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허무할 지경이었다. 그녀 안에서 미움도 증오도, 그리움도 닳고 닳아서 해진 것 마냥 모든 것이 희미했다.
그가 이런 얼굴이었던가. 균형 잡힌 미남의 얼굴은 그 특유의 경박함으로 인해 빛이 바랐다. 매들린은 그의 금발과 푸른 눈을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매들린이 역시 반사적으로 마주 미소지었다.
“아버지.”
그런데……
“매들린, 오늘은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단다. 자, 제 여식을 소개하겠습니다. 마스터 노팅엄.”
“……”
매들린의 얼굴에 혈색이 빠지기 직전, 그러니까 그 찰나였다. 로엔필드 남작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모자를 손으로 까딱이며, 매들린을 향해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매들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 안 남자는 훤칠했다. 키가 컸고 어깨가 넓었다. 마스터 운운하는 것을 보니 최소한 백작 집 자제인 것 같은데…
칠흑처럼 검은 머리와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인상이었으나 이목구비가 발라 치밀한 분위기를 냈다. 냉엄한 미남이라 할 만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사뭇 닮은 것 같기도 했으나.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그보다 마스터 노팅엄?’
깨달음이 인식에 깃들기 시작하자 매들린의 혈색 좋은 얼굴에서 핏기가 본격적으로 가셨다.
눈앞의 미남자는 바로 자신의 남편, 이안 노팅엄이었다.
“어서 마차에 타렴. 할 이야기가 아주 많구나.”
매들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작이 난감해했다. 원래 같았으면 매들린은 다정한 아이답게 먼저 인사하며 활짝 웃어야 했다. 그러나 어쩐지 입가가 뻣뻣하니 미소조차 쉽게 짓기 힘들었다.
괜히 마차 안의 분위기만 미묘해졌다.
멋쩍은 로엔필드 남작이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원래 이렇게 숫기 없는 애가 아닌데… 매들린, 몸이라도 안 좋니. 마스터, 미안합니다. 아이가 숫기가 없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남자는 매들린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말이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더 꾸물댔다가는 괜히 남자의 이목을 끌기만 할 것 같았다. 매들린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은 채 마부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옆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