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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프롤로그 (1/121)

0화. 프롤로그

“그렇게 창부처럼 굴면, 멋들어진 왕자님이라도 나타날 줄 알았나?” 

노팅엄 백작이 냉정한 얼굴로 조소했다. 그가 한쪽 다리를 목발로 짚으면서 다가왔다. 매들린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치자 그가 더 크게 웃었다. 어금니가 달달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 

“왜,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 병신 같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러나 매들린의 목소리에는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마른 나뭇잎처럼 버석거리는 목소리는 흐트러졌다. 

매들린 노팅엄의 나이는 스물여덟. 눈앞의 노팅엄 백작과 결혼한 지는 6년이 지났다. 말로는 결혼이었지만, 사실은 강요된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매들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된 결혼이 이럴 리는 없다. 남편이라는 자가 이렇게 잔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자신에게 이제 남은 거라고는 괴물 같은 눈앞의 남자와 귀신들린 저택뿐인 현실이, 진짜일 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또 부정해봐도 소용없었다. 현실은 냉엄했고, 남편은 그보다 더 냉정했다. 

그는 원체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사랑스럽거나 인간적인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매들린으로서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증오하는 게 쉬웠다. 

한쪽 다리가 없는 노팅엄 백작이 점점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얼굴에 종횡으로 그어진 거대한 상처는 다가올수록 선연해서 소름이 끼쳤다. 그는 몹시 말랐으나 뼈대 자체가 거대해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잡종. 흡사 존재해서는 안 될 유령 같았다. 

매들린이 비틀거리는 남편의 모습에 파르르 떨며 소스라쳤다. 

어느새 그녀에게로 바투 붙은 백작이, 자유로운 한 손으로 매들린의 앙상하고 흰 손목을 잡아챘다. 

“그 허우대 밑에서 어떻게 울었는지 궁금하군.”

명백한 조롱조의 목소리와 달리,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이미 살의와 광기로 이글거렸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는 야수 같았고, 푹 패인 볼은 창백했으며, 흉터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괴물 자식.’

“손 놓아요!” 

공포와 역겨움에 질린 매들린이 억눌린 신음성을 냈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작이 잘해주던가? 너에게 사랑이라도 속삭였나 보지? 그 뱀 같은 혓바닥으로…….”

“그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 

그 말을 들은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통 때문에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기야, 아무리 노팅엄 백작이 그녀를 냉대했으나, 매들린이 저지른 일은 잘못이 맞았다. 

그녀 자신도 남작과의 밀회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육체적 관계를 맺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남편인 백작을 배신하고 배신했다. 알링턴을 사랑했던가. 그보다는-.

‘복수라고 생각하세요.’

매들린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남자에게 상처 주고 싶은 증오심뿐이었다. 매들린은 그가 역정을 내고 무너져내리기를 바랐다. 상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대가는 치를 생각이었다. 매들린은 모든 치욕과 불명예를 자신이 짊어지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결기가 오히려 눈앞의 남자를 자극할 줄은 미처 몰랐다. 

“…너는 못 벗어나.” 

동굴 같은 저음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네가 죽어도, 내가 죽어도. 이 빌어먹을 흉가가 무너져내려도. 너는 이곳을 못 벗어날 거야.”

그 말이 너무나 무섭고 사특하게 들렸다. 남자가 쥔 손목이 아팠다. 

“싫어요. 이 손 놔!”

개자식. 매들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사용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나오질 않았다. 그들은 노팅엄 저택의 유령들이었고, 남자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광경을 듣고도 듣지 않는 게 그들의 직분이었다. 

끔찍한 고독과 수치심이 매들린을 목 죄었다. 

“난 도망칠 거예요! 당신에게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매들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증오심이 드디어 두려움을 이겼다. 그녀는 자유로워지리라. 저 역겨운 남자의 손아귀에서 진정으로 벗어나리라. 

“너 같은 건 날 가둘 수 없어.” 

난 이곳을 나갈 거야. 이 지독한 저택에서. 이 흉가에서. 그녀는 다시 뒷걸음질 쳤다. 이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빠르게 내려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뒤로 뺀 발이 허공을 맴돌더니, 그대로 쑥 내려앉았다. 

추락이었다. 

쿵.

쿵.

쿵.

소리가 나면서 그녀는 나선 돌계단 밑을 하염없이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택의 헌팅트로피들(말, 사슴, 호랑이, 늑대, 사자)이 그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충격이 반복되면서 매들린의 머릿속이 암전되기 시작했다. 고통이 그녀를 파멸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 것이었다. 

매들린 노팅엄, 아니, 매들린 로엔필드는 불륜으로부터 도망치다 결국 개죽음당하는 신세였던 것이다.

명멸하는 의식 속에서, 매들린은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끔찍했으나 한편으로는 후련했다. 자신이 이렇게라도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선 계단을 굴러가는 공처럼, 운명이 어딘가로 떨어져 내려간 것일까. 

눈을 뜬 그녀는 천국도(당연히 갈 리 없다 생각했다), 연옥도, 그렇다고 지옥도 아닌…

열일곱 살로 돌아와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엔필드 저택에서. 

열일곱 살 봄. 미처 죽지 못한 것이 다시 소생하듯, 그렇게 매들린의 열일곱 살의 봄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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