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完)
아. 속이 긴장으로 부글거린다. 미칠 것 같아.
참다못한 이리아는 끝내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하녀들이 다급히 달려와 턱 아래에 손을 대 주었다. 다행히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쏟아지지 않았다.
“아아…….”
로샨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줄 알았어요, 아가씨. 방금 제 하늘이 와르르 무너질 뻔했네요.”
“미, 미안해요. 너무 긴장되어서 몸을 주체할 수가 없네요.”
“아가씨의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토를 하시면 정말로 큰일 나요! 저를 따라서 천천히 심호흡을 해 보세요. 자. 하나, 둘…….”
이리아는 로샨이 시키는 대로 그녀를 따라 공기를 들이마셨다.
원래 심호흡을 하면 몸의 긴장이 사그라드는 게 정상 아니었던가. 왜인지, 이리아는 로샨을 따라 공기를 들이켤수록 속이 더 울렁거리는 듯했다.
그녀가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이, 하녀들이 다가와 정수리 위에 긴 베일을 씌워 주었다.
이리아와 덱스터의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둘은 에즈메릴다의 양해를 구해 식은 루퀼렘에서 진행하되, 양식은 비센티움의 것을 따르기로 했다. 루퀼렘의 양식대로 식을 올린다면 이리아에게 걸리는 제약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덱스터가 사치스러운 결혼식도 좋다고 했으나, 이리아는 보이는 것보다 의미를 더 중요시했다. 그녀는 덱스터의 어머니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고수했고, 낡은 금반지를 낀 채로 예식장에 오르겠다고 알렸다.
‘하워드 공은 지금쯤 저 너머에서 턱시도를 입고 있겠지…….’
웨딩 턱시도를 입은 덱스터의 모습을 상상하니 겨우 진정되었던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이리아가 급히 물을 찾을 때, 대기실 밖에서부터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뒤늦게 알아챈 사실이지만, 콘라드 메이필드는 저택의 하녀들까지도 말로 구워삶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대기실 앞을 막아선 하녀들을 능숙히 제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우-웨딩드레스가 생각보다 더 화려하군?”
“정말 오랜만이네요, 부단장님. 얼굴을 통 볼 수가 없던데, 최근 며칠 동안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성 구경. 이 성이 생각보다 훨씬 더 넓더라, 야. 심지어 저 첨탑 너머에는 신전까지 붙어 있던데?”
“과거 마법사들이 신전과 함께 이 성을 세웠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넓은 성에서 용케도 길을 안 잃어버리셨네요?”
“내가 군 경력이 몇 년인데, 인마. 난 나무의 이끼로도 방향을 구분할 수 있다고.”
모두가 정장을 입은 이 순간에도 콘라드만은 한없이 편한 옷차림이었다. 그가 다 닳아진 신발 밑창을 질질 끌며 다가와 이리아의 옆에 앉았다.
그토록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도, 콘라드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매캐한 담배 냄새가 훅 풍겨 왔다.
콘라드의 얼굴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려 버린 이리아는 그에게 핀잔 한마디를 하려다가 관두었다. 한마디가 아니라 수천 마디를 해도 그는 듣지 않을 게 뻔했다.
콘라드가 투명한 베일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나 이 나라에 완벽하게 익숙해진 것 같아. 저 앞의 호수에 호랑이만 한 잉어가 헤엄치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니까?”
“혹시 그 잉어에게 인사는 해 보셨나요?”
“아니? 내가 미쳤냐? 잉어한테 인사를 왜 해?”
“……아무래도 부단장님께서 이 나라에 익숙해지시기까지는 한참 먼 듯하네요.”
그 잉어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데다가 이름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 아마 부단장님은 까무러치겠지. 당장 이 성을 박차고 나가버릴지도 몰라.
이리아가 은연중에 콘라드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는 동안, 밖에서 또 한 번의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이번에 대기실을 들어온 이는 루 아휜이었다.
루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리고선, 한쪽 귀에 장미를 꽃은 채였다. 예복을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평소보다 더욱 빛이 났다.
루가 이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가씨.]
드디어, 새신부가 예식장에 입장할 시간이었다.
루의 손을 잡으려던 이리아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 위에 궁둥이를 붙인 콘라드는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부단장님께서는 안 들어가세요?”
“난 결혼식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런 고아한 행사는 나랑 별로 안 맞는 듯.”
너도 알잖아, 그가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리아는 잠시 콘라드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루의 손을 잡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루는 능숙하게 그녀를 이끌었다.
예식장으로 향하는 길목은 꽃으로 가득했다. 꽃 사이에 종종 끼워져 있는 보석 다발에서부터 에즈메릴다의 고지식한 취향이 느껴져, 이리아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문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이리아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7번의 괘종소리가 끝나자마자 곧장 예식장 문을 열기 시작했다.
환한 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리아의 시야는 잠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얘졌다가, 무척이나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의 눈 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식장 양쪽에 앉은 하객들이었다. 지금은 그들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가지각색인 머리카락 색을 보아서는 꽤 많은 비센티움인들이 참석한 듯했다.
아마 나의 결혼식이 비센티움인과 루퀼렘인이 함께 앉은 최초의 결혼식일 테지. 이리아가 마음속으로 킥킥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식장 가장 앞에 서 있는 덱스터를 보았다.
‘……하워드 공.’
순간, 모든 빛이 탁 꺼진 듯한 느낌이 들며 오로지 덱스터만이 그녀의 세상에 존재하는 듯했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턱시도를 입은 저 남자가, 왼손에 같은 반지를 끼운 저 완벽한 남자가 남편이라는 사실이 심장을 제멋대로 쿵쿵 뛰게 했다.
아.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태어난 것 같다.
루가 단단히 손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이리아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예식장 한가운데서 털썩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루가 제 손을 덱스터의 손 위로 포개 줄 때까지 힘겹게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예식장의 빛을 받아 덱스터의 새까만 두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는 투명한 베일 속 이리아의 얼굴을 넋을 놓은 채 내려다보다가, 보조개를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너무나도 큰 행복에 빠진 한 남자의 미소였다.
이후, 이리아는 대체 어떻게 예식이 흘러갔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에즈메릴다가 축복을 내려 주고, 축복이 끝나자마자 교향곡이 흘러나왔던 것 같다. 덱스터가 자신이 아니라 앞을 보라고 몇 번 속삭여 준 것 같기도.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내내, 이리아는 온몸이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아득한 곳으로 향했던 정신은 예식장 문가를 보고 난 후에야 퍼뜩 돌아왔다.
저 멀리 예식장 문가에, 콘라드가 서 있었다.
콘라드는 다른 하객들처럼 박수를 보내지도, 그렇다고 장미꽃을 던지지도 않았다. 문가에 선 채 가만히 이리아와 덱스터를 응시하던 그는, 곧 예식장을 들어왔던 때만큼이나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언뜻 보인 그의 입술은 분명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루퀼렘 성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연 만큼 피로연을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기에, 덱스터와 이리아는 곧바로 신방으로 향했다. 신방으로 향하는 길목도 역시나 꽃으로 가득했다.
신방의 문이 닫힌 후에도 주변이 조용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덱스터는 첨탑 위에 앉은 독수리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나직이 이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덱스터가 천천히 이리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올렸다. 이리아는 변함없이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하얗고 긴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렸다. 예식장에서 보았던 덱스터의 미소를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던 그녀는 끝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슬퍼서 나온 눈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덱스터의 어깨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는 몇 방울의 눈물이 더 떨어져 이리아의 양 볼을 흠뻑 적신 후에야 허둥지둥 그녀를 끌어안았다.
덱스터가 창백한 이마 위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울지 마. 좋은 날이잖아, 응?”
“지, 지금이 꼭 꿈만 같아요. 공이 제 뺨을 한 대 세게 때려 주면 이 현실이 실감이 날지도……”
“제발 그런 큰일 날 소리 마.”
이리아가 웃으며 양팔로 덱스터의 허리께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만을 위해 준비한 값비싼 턱시도가 눈물과 화장으로 엉망이 되어 갔지만,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덱스터는 아무렴 좋다는 듯 이리아의 작은 몸을 더 세게 껴안았다.
덱스터의 품속에서 이리아는 뒤늦게 푸르스름한 신방을 돌아보았다.
신방 또한 비센티움의 형식대로 꾸민 건지. 하녀들의 손길을 듬뿍 받은 침대에 관해 참 할 말이 많았으나,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리아의 시선을 잡아끈 건 침대보다 그 옆에 놓인 한 물건이었다.
“축음기네요. 저게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내가 루시어스에게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했어. 당신의 기억에 남을 순간이니 아무래도 그, 부, 분위기가 중요할 것 같아서…….”
내가 살아생전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덱스터가 손바닥에 얼굴을 푹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까만 머리 아래 두 귀는 어느덧 터질 듯 새빨개져 있었다.
그가 축음기를 만지작거리는 이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왼손 약지에 자리한 결혼반지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함께 한 곡 출까, 이리아?”
“저는 춤 잘 못 춰요, 공. 아시잖아요.”
“못 춰도 좋아.”
덱스터가 천천히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비센티움의 저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리아의 양쪽 구두를 벗겨 냈다.
이윽고, 축음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레스가 무거울 텐데…….”
“하나도 무겁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덱스터의 손길에 이끌려, 창백한 발끝이 잘 닦인 구두 위에 올랐다.
부부의 입가에 동시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홍조를 두 볼 가득 띄운 이리아가 수줍게 키득거리자, 덱스터는 그녀의 이마 위로 긴 키스를 남겨 주었다.
춤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우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렴 좋았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발 위에 선 채 제 몸을 좌우로 작게 흔드는 둘만의 춤을 즐겼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이리아. 나, 당신에게 고백할 비밀이 하나 있어.”
“그게 뭔데요?”
새까만 머리칼 아래 귀가 또 한 번 새빨개지는 순간이었다.
덱스터는 그답지 않게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멋쩍은 듯 살며시 웃어 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정절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어. 그건 그저 당신을 잡기 위한 핑계였을 뿐이야.”
이리아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깊은 황금빛 눈동자로 덱스터를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더 높이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달콤히 입맞춤하며 속삭였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내 사랑.”
***
탁, 타닥. 탁-.
머리 위에서부터 가벼운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몇 차례 더 이어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 한 쌍이 난간 사이서 삐죽 튀어나왔다.
덱스터의 새까만 정수리를 확인한 아이가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오늘은 먼저 와 있었구나!]
[네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거야.]
언제나 그랬듯,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난간 사이로 다리를 넣어 걸터앉았다.
덱스터는 앞뒤로 흔들리는 창백한 다리를 가만 응시하다가, 루퀼렘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달이 뜬 영원한 새벽의 하늘.
마법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였지만, 루퀼렘의 하늘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름답다고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