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에즈메릴다가 더 이상 회담을 기록하지 말라는 의미로 루 아휜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잠시 주름이란 하나도 없는 이리아의 뽀얀 뺨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은 참 빨라, 카즈웰. 우리는 자네가 태자이던 젊은 시절에 만났었는데, 이제는 황제가 되어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있군.”
카즈웰이 고개를 들어 에즈메릴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깊은 황금빛 눈동자는 지나간 추억을 되짚으며, 다른 때보다도 더욱 아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도, 그대도 너무 많이 늙어버렸어. 이만 무대에서 퇴장할 때가 된 거야.”
“에즈메릴다…….”
“그러니 곧 비센티움을 이끌 다음 세대 젊은이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만 그 자존심을 내려 두는 것이 어떤가?”
카즈웰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게 떨리는 새까만 눈꺼풀에서부터 생생한 갈등의 흔적이 드러났다.
“그대와 나의 일생을 통틀어 우리의 대화는 아마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네. 이번만큼은 부디 함께하지, 카즈웰.”
또 한 번 회담장에 긴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카즈웰 3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
창밖으로 보이는 두 개의 달이 다른 때보다 더욱 밝은 듯하다.
이리아는 달빛에 홀린 듯, 잠시 루퀼렘의 새벽하늘을 멀거니 응시했다.
‘이번 회담은 성공적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겠지. 아마 덱스터와 그녀의 결혼이 엎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적이라 해야 할 터다.
비록 엘퀸즈 산맥의 협상은 실패했지만, 양국은 각자 나름의 이득을 취했다. 루퀼렘은 카즈웰 3세에게 공식적으로 대마법사의 결혼을 인정받았고, 6년 전에 한 번 실패했던 차별 금지 법안을 다시 발의하기로 합의했다.
비센티움은 제국 동쪽에서 판을 치는 마물들을 루퀼렘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완벽하게 척결하기로 했다. 비센티움으로 출동할 성기사단은 이리아의 결혼으로 인해 업무량이 줄어 버린 루 아휜이 직접 이끌 것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카즈웰 3세는 비센티움의 다음 대 황제 즉위식에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이 오기를 바랐고, 에즈메릴다는 흔쾌히 참석을 약속했다. 120년의 긴 세월 동안 에즈메릴다는 비센티움의 즉위식에 참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카즈웰 3세에게 이 약속의 의미는 상당히 컸다.
회담이 예상보다 빠르고 간결하게 끝났기 때문일까, 이리아는 아직 현실을 제대로 실감할 수가 없었다. 눈을 세게 감았다 뜨면 다시 오늘의 아침으로 돌아가 있을 것만 같다.
덱스터는 결혼을 하기 전, 제국의 군단장으로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기 위해 카즈웰 3세를 찾아간 참이었다.
아주 긴 시간 창밖을 빤히 바라보던 이리아는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
익숙한 목소리에 이리아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카즈웰 4세?’
널따란 복도 한가운데 카즈웰 4세가 우뚝 서 있었다. 급히 달려온 탓에 언제나 정갈하던 머리는 엉망이었고, 숨소리 또한 거칠었다.
이리아는 반사적으로 허둥지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성을 돌아다니던 기사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건지, 그녀 자신과 카즈웰 4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숨이 제멋대로 턱 막혀 오며, 척추가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어…… 어떻게 하지? 이리아가 양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아마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마법을 쓰는 게 훨씬 빠를 터다.
하지만 그녀가 마법의 힘을 끌어올리는 찰나, 카즈웰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루퀼렘인들은 너를 여신의 현신이라고 칭하더군. 정말로 네가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면, 보통의 인간들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의 답도 알 수 있나?”
이리아의 어깨가 멈칫했다.
그녀는 말라 가는 눈을 깜빡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카즈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뒤늦게 제대로 마주한 카즈웰의 두 새까만 눈 속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이리아는 그가 알고 싶은 답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질문을 던졌다.
“……알고 싶은 답이 무엇이죠?”
“내 아내의 배 속 아이는 정상인가?”
이리아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다급히 덧붙였다.
“이에 관한 답을 알려 주면, 훗날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루퀼렘과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어.”
이어, 복도 가득히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하지만 참 신비롭게도 이리아는 이 마지막 순간, 마치 숨겨졌던 세 번째 시야가 트이듯 황태자비의 배 속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숨 쉬는 아이는 맑고 건강했다. 장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완벽한 육체였다.
‘그래, 아가야. 카즈웰 4세와 함께 네가 운명을 거스르는 것을 희망하기보단 이게 낫겠지.’
아무리 황족이라 하여도,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 긴 인생을 살아가기는 분명 힘들 터다.
이리아는 곧 태어날 아름다운 새 영혼을 위해서 그녀의 개인적인 욕심을 깔끔히 치워 냈다.
“아이는 그 어떤 장애도 없이 태어날 거예요. 여신께 맹세하죠.”
“아…….”
절박함이 가득했던 카즈웰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양쪽 뺨에 깊은 보조개가 잡혔다.
카즈웰은 복도를 비추는 화려한 샹들리에를 아주 긴 시간 넋 놓고 응시하다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 아하하-!”
그 웃음 속에는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희열뿐. 태아의 건강을 확인한 아버지의 행복 따위는 없었다.
권력으로 완벽하게 타락하지 않고서야, 아비라는 작자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일그러진 미간을 숨기지 않은 채로 카즈웰을 응시하던 이리아는 그대로 등을 돌려 버렸다.
지금껏 꽤 많은 비센티움인들을 만나 오며, 시간이 지나면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길고 긴 시간이 지난다 한들, 카즈웰 4세만큼은 영원토록 이해하지 못하리라.
쉼 없이 움직이던 이리아의 다리가 복도 한가운데서 우뚝 멈추었다.
공기 중에서 희미한 박하 향이 풍겨 왔다.
왜인지, 성의 불빛 아래 선 덱스터는 카즈웰 4세와 평소보다 더 닮아 보였다. 덱스터도 카즈웰과 마찬가지로 환히 웃고 있었지만, 그의 미소는 카즈웰의 것과 달랐다.
저 미소는 오로지 순수한 행복만이 담긴 미소다.
“이리아.”
덱스터가 망토를 펄럭이며 이리아에게로 달려왔다.
그러나 이리아를 급히 끌어안으려던 그는 생각만큼 밝지 않은 이리아의 표정에, 함께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당신, 표정이 왜 그래? 혹시 다른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그냥 저 인간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워드 공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네. 이리아가 덧붙이며 덱스터의 손바닥 위로 제 뺨을 문질렀다.
손등에 스며든 박하 향을 맡을수록, 창백한 피부 위로 더 진한 생기가 감돌았다. 참다못한 이리아가 입술을 찾기 시작할 때 즈음, 멀리서부터 한 기사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델리어 님께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건넨 것은 하얗고 조그마한 봉투였다.
봉투 위에는 단 두 문장의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 우아한 필체는 누가 봐도 에즈메릴다 여왕의 것이었다.
<의미 있는 반지인 것 같지만, 너무 낡았더구나.
20대의 새신부라면 의미보다 아름다움을 중시해도 되는 법이야.>
“에즈메릴다 여왕님께서 보내셨네요.”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어.”
이리아가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아름다운 반지 한 쌍이 튀어나왔다.
봉투의 뒷면에는 문장 하나가 더 적혀 있었다.
<결혼 축하한다.>
정확히 찍힌 문장의 마침표를 보는 순간, 이리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이 기쁜 날,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너무 아름다운 반지예요.”
“나도 동감해.”
이리아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들어 덱스터의 왼손 약지에 천천히 끼워 주었다. 덱스터 또한, 이리아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리아는 각자의 왼손 위에서 함께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며 작게 웃었다.
“둘 다 알맞게 들어가네요.”
반지를 끼우니, 이제야 뒤늦게 현실이 실감이 났다. 그녀는 곧 덱스터와 결혼을 할 테고, 앞으로의 인생을 그의 아내로서 살아갈 거다.
‘우리 둘이 함께.’
함께. 행복하게.
이리아가 수줍게 웃으며 덱스터의 가슴팍에 뺨을 기대었다. 그리고 덱스터는 언제나 그랬듯, 그녀의 작은 어깨를 꽉 껴안아 주었다.
“영원히 사랑해요.”
“이런. 내가 할 말인데, 순서를 뺏겼군.”
쿵쿵. 덱스터의 힘찬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고동쳤다.
지난 추억들이 이리아의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루퀼렘을 나와 비센티움으로 도망친 순간, 그리고 숲에서 나오던 덱스터를 처음 보았던 그때.
의심, 편견을 지닌 채 그와 실수로 하룻밤을 보내고, 그 밤의 모든 기억을 잃고선 저택에서 함께 생활했던 지난 3개월. 비가 무수히 쏟아지던 날 루 아휜을 만나고, 끙끙 앓으며 전해 들었던 덱스터의 마음속 과거의 기억들.
지난날, 이리아와 덱스터는 지름길을 옆에 두고 너무나도 복잡한 길을 걸어왔었다. 하지만 설령 긴 길을 걸을지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하는 법이다.
이제 오해와 오해를 거듭했었던 과거 따위는 웃으며 넘어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비로소, 둘은 완벽해졌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