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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7/109)

106화

아주 오래도록 이리아를 안고 있던 덱스터는 창밖에서 퀸트라의 울음소리가 들린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리아는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리라는 말을 남기고선 그를 떠났다.

‘……고요하다.’

비가 그쳤기 때문일까, 왜인지 루퀼렘 성 복도가 더더욱 조용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흘러온 자신의 인생이 한 편의 이야기라면, 이리아는 드디어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덱스터의 온기와 박하 향은 두 손에 진하게 남아 다음 날 아침이 도래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온기를 꼭 쥔 채 잠에 빠졌던 이리아는 어깨를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로 인해 눈꺼풀을 치켜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찬찬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일 처음으로 보인 건, 걱정이 흠뻑 스며든 루 아휜의 얼굴이었다.

[아가씨. 도통 눈을 뜨지 않으셔서 의사를 부를 뻔했어요.]

[지금 몇 시야?]

[8시가 되기 5분 전이에요. 슬슬 회담에 가실 준비를 하셔야 해요.]

이리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루가 그녀의 등 뒤를 부드럽게 받쳐 주었다. 이리아는 흔들리는 새하얀 머리칼 사이서 루의 입술을 언뜻 볼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부드럽지만, 슬픔이 배인 미소.

루는 애처롭게 웃고 있었다.

[만일 오늘의 회담이 큰 탈 없이 무사히 끝난다면, 제가 아가씨를 깨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네요.]

[마지막…….]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리아의 입 안에서 길게 맴돌았다. 그녀는 변함없이 곱고 아름다운 루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새하얀 정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이리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언젠가부터 그의 입 속에서도 맴돌고 있었다.

[비센티움에서도 말씀드렸었죠? 반드시 행복하셔야 해요, 아가씨.]

[응. 그럴게.]

둘은 아주 오랫동안, 무녀들이 들어올 때까지 서로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제와 달리 무녀들이 가져온 옷은 상당히 편했다. 쓸데없는 화려함을 위해 치맛단의 옆이 트여 있지도 않았고, 혼자서 걸을 수 없을 만큼 무겁지도 않았다.

무녀들이 새하얀 머리칼을 틀어 올려 주는 내내 이리아는 거울 속의 여인과 눈을 마주했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울 속 그녀 자신이 갑자기 몹시도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치장은 생각보다 금방 끝이 났다. 이리아가 몸을 일으키자, 루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아 주었다.

[갈까요, 아가씨?]

[응.]

무녀들은 이리아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이리아는 오로지 루와 함께 어젯밤 거닐었던 루퀼렘 성 복도를 그대로 되돌아 가로질렀다.

회담장으로 향하는 길이 참 길고도 짧게 느껴졌다. 성의 거대한 회담장은 6년 전에도 한 번 가 보았지만, 왜인지 처음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루는 긴장하여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이리아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에즈메릴다, 그리고 카즈웰 3세를 포함한 비센티움인들은 한참 전에 도착하여 이미 정해진 자리에 모두 앉은 채였다. 이리아는 루가 이끄는 대로 에즈메릴다 여왕의 바로 옆에 착석했다.

자리의 건너편에는 카즈웰 3세와 카즈웰 4세, 회담의 내용을 기록할 호크 로슨과 덱스터가 앉아 있었다. 6년 전의 정상회담과 비교하면 확실히 단출한 구성이었다.

어제와 다름없이 군단장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덱스터는 이리아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리아는 긴장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을 옷자락에 닦아 내면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9시를 알리는 괘종이 성을 울렸다.

동시에, 에즈메릴다의 능숙한 비센티움어가 회담의 시작을 알렸다.

“우선, 루퀼렘에 와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예상치 못한 소식에 당황했을 텐데, 선뜻 회담 신청을 받아들여 주어 고맙네.”

“당연한 말을. 우리 제국의 공작이 대마법사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루퀼렘에 찾아오지 않는 황제는 없을 걸세.”

“이미 하워드 공작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겠지만, 혹시 이 둘의 결혼에 관해 더 할 말이 있나?”

“충분하다 못해 정말 긴 대화를 나누었네. 신경 써 주어서 고마워.”

“나는 처음에 이 결혼을 반대했었는데, 그대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나 보군.”

“비센티움은 신앙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루퀼렘과 달라. 설령 신부가 루퀼렘의 대마법사라 하여도, 나는 최대한 개인이 가진 결혼의 자유를 존중하네.”

“아. 그렇군?”

아비와 뜻이 다른 건가. 저 꼬맹이는 딱히 존중하는 듯하지 않은데.

에즈메릴다가 서늘한 조소를 머금고선 카즈웰 4세를 힐끗거렸다. 회담장 한가운데서 그와 눈이 마주치니,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카즈웰 4세는 여전히 막 묘지 속에서 일어난 사람 같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풍채가 어마어마한 그의 아비가 옆에 있는 탓일까, 퀭한 모습이 어제보다 더욱 두드러졌다.

자기도 모르게 카즈웰 4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이리아는 그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마치 시체의 것처럼, 빛이 하나도 들지 않은 두 새까만 눈동자는 절로 심장을 쿵쿵 뛰게 했다.

이리아가 어깨를 수그린 와중에도 회담은 계속되었다. 코끝에 안경을 걸치며, 에즈메릴다는 재차 입을 열었다.

“예상하였겠지만, 내가 비센티움에 원하는 사항은 6년 전과 같네. 우리의 대마법사께서 곧 비센티움인과 결혼까지 하시니, 루퀼렘인의 비센티움 내 차별 금지 법안 발의는 이번에 반드시 통과되었으면 좋겠어.”

“법안은 황실이 재량껏 통과시킬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대신들의 동의와 긍정적인 국민 여론이 뒷받침되어야만 법안은 통과되고, 통과된 법안에 따른 사회 질서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다네.”

“그 정도는 나도 알지, 카즈웰. 나는 단지 6년 전처럼, 비센티움 황실이 자국민들의 여론에 손을 쓰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네.”

“이런, 당했군.”

카즈웰이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가 조금 전의 대화는 지우라는 의미로 손짓하자, 호크 로슨이 재빨리 양피지 위로 북북 선을 그었다.

에즈메릴다는 손짓의 의미를 알았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호크 로슨이 엉성하게 회담 기록을 지워 내는 모습까지도 6년 전과 참 똑같다고 생각했을 뿐.

“혹여 카즈웰, 그대는 우리 루퀼렘에 바라는 점이 있는가?”

“국경선을 함께 나누어 쓰는 국가에 요구 사항이 없을 리가.”

“그래. 그럼 그 내용이 뭐지?”

“참 싱거운 질문이군. 우리의 요구 사항은 그대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다른 것들은 모두 양보할 수 있건만, 엘퀸즈 산맥만은 절대로 불가능하네. 나는 엘드리지 님의 유언에 따라, 살아 있는 동안 끝까지 그 산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을 지킬 거야.”

“여전히 우리의 뜻이 맞지 않는다니, 참으로 유감일세.”

“큰일이네. 앞으로 이어질 나의 말을 들으면 더 유감스러울 텐데.”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카즈웰 3세의 눈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에즈메릴다는 건너편에 앉은 덱스터를 한 번 살피고선, 엉성하게 걸쳤던 안경을 벗어 내려 두었다.

대마법사에게 미래를 보는 능력 따위는 없지만, 이리아는 왜인지 곧 에즈메릴다의 입에서 나올 대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에즈메릴다는 그녀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 한 국가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 비센티움과 루퀼렘은 영원히 서로에게 맞붙어 살아야 해.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되지 않는 갈등은 더 깊어지고, 갈등이 깊어질수록 양국의 국민들은 고통받지.”

“말의 요점이 뭔가?”

“루퀼렘은 과거 그대의 나라에 큰 실수를 저질렀어. 이만 그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지 않겠나?”

“에즈메릴다.”

카즈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협상이 결렬될 것 같은 분위기에 이리아가 급히 에즈메릴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경을 벗은 눈이 피로해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새하얀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렸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로 옆에서 바라본 에즈메릴다는 새삼 늙어 보였다.

그녀는 마치 비센티움의 환한 보름달 아래서 눈물을 흘리던 루 같았다.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로 지나간 세월을 후회하는, 고독한 노장의 마법사…….

‘어어……?’

순간, 정체 모를 감정이 솟아오르며 이리아의 숨통이 턱 막혀 왔다. 분명 어떤 말을 하려고 에즈메릴다를 돌아본 것인데도,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카즈웰 3세를 보는 에즈메릴다의 눈빛은 8년 전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비센티움과 원만한 합의를 마치기 위해서 저런 눈빛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냥, 이제는 늙어서 카즈웰 3세를 노려볼 힘조차 없는 거였다.

세 자리를 넘어간 에즈메릴다의 나이가 새삼 뼈저리게 와닿았다. 겉모습은 젊으나, 에즈메릴다는 늙었다.

그리고 이는 루 아휜도 마찬가지였다.

줄곧 외면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언젠가 에즈메릴다와 루 아휜도 이 세상을 떠날 거다.

며칠 전, 에즈메릴다가 내질렀던 호통이 갑자기 이리아의 두 귓가에서 제멋대로 메아리쳤다.

[나는 여왕의 운명을 타고나 일평생 정계에서 떠나지 못했고, 루 아휜은 대마법사를 수호하는 운명을 타고나 일평생 너를 떠나지 못했어! 나도, 루 아휜도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는데, 너는 대체 왜 그러지 못하는 게야!]

그녀의 호통은 매서웠지만, 분명 그 안에 울분이 스며들어 있었다.

에즈메릴다와 루는 사실, 이 회담장에서 이런 고지식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긴 세월을 살아오며, 이 둘 또한 이리아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꿈꿨을 때가 있었을 테지.

운명에 발이 묶인 채 기나긴 삶을 살아온 두 늙은 마법사.

이리아가 허벅지 위에서 거세게 쥔 두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운명이라는 게 대체 뭔지…….’

신은 어째서 운명 따위를 만들어 가혹한 삶에 인간들을 엮어 두었는지.

괜스레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이리아가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카즈웰 3세를 마주한 그녀는 혹여 그 또한 황제의 운명에 엮여 저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한 생각을 해 보았다.

‘카즈웰 4세와 황태자비의 배 속 태아도 마찬가지로 운명에 엮여 있는 걸까.’

카즈웰 4세의 황위 계승 여부를 떠나 이리아는 문득 순수하게 태아의 건강이 궁금해졌다.

태아가 만일 ‘정상’적이지 않게 태어난다고 함에도 카즈웰 4세가 황위를 물려받는다면 그들은 이 세상의 운명을 거스르는 것일까?

루퀼렘을 위해서라면 카즈웰 3세가 황위를 물려받지 않길 바라야 한다. 하지만 이리아는 순간, 참 바보 같게도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회담장에서는 긴 침묵이 흘렀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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