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됐어. 내가 할 거야.]
이리아는 무녀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먼저 구두를 침실 한구석으로 벗어 던졌다. 이어 화관을 내팽개치고, 베일까지도 쥐어뜯듯 거칠게 걷어 냈다.
만일 화장을 지우겠다는 이유로 또 6시간을 욕조에 앉아 있어야 했다면, 비명을 지르며 이 침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목욕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비센티움인들은 도서관이 자리한 서쪽 첨탑 부근에서 밤을 지낸다고 들었다. 한참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이리아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내일 아침에 열릴 회담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절로 어지러워졌다. 뒤숭숭한 이 기분을 어떻게든 정리하지 않으면, 밤새 내내 한숨도 못 잘 게 분명했다.
에즈메릴다가 핀잔을 주지 않고, 루 아휜도 잠자코 넘어가니 무녀들 또한 더는 방 밖을 나서는 이리아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비가 오네.’
잔잔한 빗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제외하곤 루퀼렘 성은 변함없이 고요했다. 카즈웰 3세를 포함한 비센티움인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할 정도다.
이리아는 연회장에서 보았던 카즈웰 3세를 떠올렸다.
카즈웰 3세의 풍채는 6년 전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이기 때문일까, 수많은 민족을 꿇린 사냥꾼의 눈빛이 일전보다 조금 사그라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덱스터의 생각은 맞았다. 에즈메릴다와 카즈웰 3세는 연회가 진행되는 내내 황위 계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카즈웰 3세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곧 황위를 물려줄 준비를 할 거야.’
그리고 아무래도, 황위를 받을 자는 카즈웰 4세일 가능성이 제일 크지.
만일 카즈엘 4세의 아이가 그가 바라는 대로 ‘정상적’으로 태어난다면, 황위의 다음 대 주인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비센티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던햄 공의 세대 때부터 지금까지 직계 장남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만일 카즈웰 4세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면, 그는 분명 엘퀸즈 산맥을 위해 우리나라와의 전쟁을 강행할 텐데…….’
이리아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은연중에 황태자비의 배 속 아이가 ‘정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괴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디를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리아는 기다란 성 복도를 하염없이 걸었다.
복도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에즈메릴다의 침실까지 향했을 터다.
[앗……!]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찰나, 갑자기 뜨거운 힘이 이리아의 팔뚝을 휘감아 왔다. 그녀가 옆을 돌아보기도 전에, 몸은 이미 어두운 복도 안쪽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파묻히기 무섭게 지독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헉.’
루퀼렘인의 빈약한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안광이 빛나는 두 새까만 눈동자였다.
[아아!]
이리아의 잇새서 반사적으로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어둠 속의 인영은 그녀의 비명에 잠시 당황한 듯싶더니, 거대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쉬이-.”
담배 냄새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부터 들려왔다.
“이리아, 나야.”
……하워드 공?
단번에 긴장이 풀리며, 이리아의 어깨가 푹 내려앉았다.
어둠에 차차 두 눈이 익숙해지며, 보조개를 드러내고선 웃고 있는 덱스터가 보였다.
그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맞이하자마자, 이리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 튀어나왔다. 그녀가 조그마한 주먹으로 덱스터의 어깨를 콩 때렸다.
“미안. 놀랐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순간, 카즈웰 4세인 줄 알았다.
비센티움인들과 함께 있다가 온 탓에 그들의 냄새가 몸에 뱄나 보다. 이리아는 몹시도 뒤늦게 담배 냄새 사이의 상쾌한 박하 향을 찾아냈다.
그녀가 숨통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이런 장난은 치지 마세요, 공.”
“미안해. 당신이 이 정도로 놀랄 줄은 몰랐어.”
“정말로, 정말로 큰일 날 뻔했어요…….”
덱스터가 만일 조금만 늦게 입을 열었다면 그에게 마법을 쏘고 말았을 거다. 아마 어떤 종류의 마법이건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힘을 날렸을 테지.
이리아는 벌어지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덱스터는 그녀가 다른 의미에서 몸을 떤다고 착각했는지, 열이 오른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분명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도 그는 여전히 연회장에서 입었던 군단장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망토까지 풀지 않은 것을 보아선 지금껏 줄곧 바빴던 듯했다.
덱스터는 현재 비센티움의 공작으로서 루퀼렘에 방문한 입장이니, 왕실의 허락 없이 함부로 성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군단장 제복을 입은 모습으로는 더더욱.
이리아가 조용한 복도를 살피며 속삭였다.
“내일 아침에 곧바로 회담이 열리는데, 공께서 홀로 성을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에즈메릴다 여왕님이나 루가 알기라도 하면 크게 혼을 낼 거예요.”
“알아. 당신 얼굴만이라도 잠깐 보려고 온 거야. 우리 너무 오랜만에 다시 만났잖아.”
“그, 그러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비센티움인들이 거주하는 서쪽 첨탑으로 보내야 한다.
이리아가 덱스터를 밀어내기 위해 두 손에 힘을 주었지만, 다 부질없었다. 목덜미를 문질러 주던 뜨거운 피부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니, 구멍 난 풍선처럼 그녀의 몸에서는 절로 힘이 빠져 버렸다.
“……얼굴만 보시겠다면서요?”
“당신이 너무 그리워 미치는 줄 알았으니 이 정도는 좀 봐줘.”
이윽고, 물기가 다 마르지 않아 촉촉한 뺨 위로 입술이 여러 차례 내려앉았다.
복도는 조용했고, 이리아 또한 덱스터가 너무나도 그리웠었다. 잠시 갈등하던 그녀는 천천히 덱스터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양 볼에 자리 잡은 보조개가 절로 진해졌다. 덱스터는 사랑이 다 담기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눈으로 이리아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키스했다.
간만의 키스는 부드러웠고, 그만큼 달콤했다.
살짝 열린 이리아의 입술 사이로 진한 박하 향기가 가득 찼다. 그녀는 고운 손끝으로 덱스터의 두 뺨을 쓰다듬으며, 고대했던 박하 향을 전부 들이마셨다.
단단히 맞붙은 두 입술 사이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참 정신없이 덱스터의 온기를 마음껏 만끽하던 이리아는 멀리서부터 희미한 인기척이 들리자 퍼뜩 눈을 떴다.
그녀가 거친 호흡 사이사이로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누, 누군가가 오는 것 같아요.”
오래간만의 키스가 제정신을 앗아 간 건 덱스터도 마찬가지였다. 인기척을 채 읽지 못했던 그는 몹시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리아의 시야에 가장 가까운 문 하나가 들어왔다.
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 방은 외국에서 들여온 미술품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분명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덱스터의 손을 잡고 방문을 향해 내달리는 중이었다.
다행히 이리아의 예상은 맞았다.
무작정 들어온 방은 갖가지 비단에 덮인 미술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벽 등 위에 먼지가 쌓인 것으로 보아서는 사람들이 아주 오래 드나들지 않은 듯했다.
어두운 방을 둘러보는 이리아의 뺨 위로 다시 뜨거운 손바닥이 닿아 왔다. 말을 할 틈도 없이 그녀는 또 한 번 덱스터에게 온 입술을 내어 준 채였다.
이번의 키스는 훨씬 더 거칠고, 훨씬 더 길었다. 처음의 키스가 단순한 환영의 인사였다면, 두 번째 키스는 아주 긴 시간 잃어버렸던 입술의 탐닉이었다.
“하, 하워드 공. 다…… 다리가…….”
“으응-.”
다섯 손가락이 제멋대로 검은 머리칼 안쪽을 파고들며, 까치발을 든 다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숨을 헐떡이는 이리아가 계속해서 넘어지려 하자, 덱스터는 그녀를 번쩍 들어 두 다리를 제 허리께에 감아 버렸다.
키스는 이리아의 가슴께서 앓는 소리가 튀어나온 후에야 끝이 났다.
겨우 드러난 그녀의 입가는 온통 젖어 엉망이었다. 덱스터는 순식간에 피로에 휩싸인 이리아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살살 웃으며 능숙히 입가를 닦아 주었다.
처음부터 미술품 보관을 목적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방구석에 조그마한 소파가 있었다. 덱스터가 소파 위에 궁둥이를 붙이기 무섭게, 이리아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목덜미를 힘껏 끌어안았다.
어느 나라에서 온 건지도 모르는 미술품들 사이에 앉아 서로를 부둥켜안는 기분은 참 묘하면서도 좋았다.
입술이 닿는 대로 이리아의 얼굴에 자잘한 입맞춤을 퍼붓던 덱스터는 곧 창백한 어깨선 위로 코를 파묻었다.
그가 감미로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 피부에서 너무 좋은 향기가 나.”
“무녀들의 작품이에요. 오로지 오늘의 연회를 위해서 저를 하루에 무려 6시간씩이나 욕조에 담가 뒀었다고요.”
“많이 힘들었겠구나, 내 사랑. 목은 어때? 화관이 상당히 무거워 보이던데.”
“아무래도 근육통이 온 것 같아요. 과장을 조금 더 해서, 머리에 올리는 화관 무게가 거의 소총 급이라니까요?”
“소총이라니.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무거웠군?”
이리아는 순진한 아이처럼 덱스터를 따라 배시시 웃고선, 그의 뺨 위에 쪽 입을 맞추었다.
벽에 난 창문의 모양대로 루퀼렘의 달빛이 들이찼다. 새벽하늘 위 달이 두 개인 만큼, 달빛 또한 비센티움에서보다 두 배로 더 밝았다.
이리아는 덱스터와 함께 있을 때 찾아오는 고요를 사랑했다. 한참 흔들리는 달빛을 구경하던 그녀가 덱스터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공과 함께 있으면, 가끔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아니야. 시간이 막힘없이 계속 흘러서, 당신과 늙어 가고 싶어. 10년, 20년, 30년이 지난 후의 미래를 우리가 함께 맞이했으면 좋겠어.”
이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덱스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언젠가부터 왼쪽 종아리에 난 흉터를 쓰다듬고 있었다.
군대의 검은 숲에서, 마물에게 물려 생긴 흉터였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예전에 많이 빌었단 말이야.”
“아…….”
이리아의 눈썹 끄트머리가 제멋대로 축 처졌다.
그녀는 왜인지 물기가 서린 것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깊이 살피다가, 덱스터의 목덜미를 더 세게 껴안았다.
길을 잃은 듯 잠시 머뭇거리던 두 손이 이리아의 등에 살며시 닿아 왔다. 덱스터는 관자놀이에 닿아 오는 여인의 숨결을 느끼며 나직이 귓속말했다.
“나는 가끔 지금의 모든 순간이 꿈이라는 착각에 빠져. 꿈에서 깨면 당신은 다시 빨간 머리를 가지고,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공의 온도가 이렇게도 선명한데, 지금의 순간이 꿈일 리 없잖아요.”
“응.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덱스터가 슬피 웃었다.
이리아가 덱스터의 턱 끝에 긴 키스를 남겼다. 그리고 이어, 서로의 가슴을 단단히 맞대었다.
두꺼운 제복으로 앞이 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덱스터의 심장 박동은 어김없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마 덱스터도 이리아의 심장 박동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 터다.
이리아가 그의 이마 위로 제 이마를 살포시 붙이며 속삭였다.
“내일이 지나면 과거의 어긋남 정도는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완벽해질 거예요, 공.”
기필코. 기필코 완벽해질 거예요.
덱스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달빛이 드리워진 이리아의 입술 위로 조심스레 키스했다.
둘의 손은 저절로 서로를 찾아 강하게 깍지를 꼈다.
덱스터의 엄지손가락이 이리아의 엄지손가락 위 금반지를 살살 쓸었다. 한때는 낯설었던 금반지도 이제는 제대로 자리를 잡아, 창백한 손 위에 없으면 서로가 허전하게 느낄 정도였다.
거의 다 왔어.
내일만 무사히 지나면 끝이다.
‘그래, 내일만 지난다면…….’
덱스터의 뜨거운 온기 속에서, 이리아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걱정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걱정에는 내일 열릴 정상회담이, 황태자비의 배 속 아이가, 카즈웰 4세가, 그리고 덱스터와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가 있었다.
이리아의 인생은 언제나 예상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마지막에는 꼭 알맞은 곳에 도착했었다.
한때는 자유를, 그다음에는 사랑을, 그리고 이제는 결혼을 기도한다.
자유와 사랑을 찾았으니, 이제는 덱스터와의 결혼까지도 무사히 쟁취해 낼 것이다.
세상이 차차 고요해졌다.
드디어, 루퀼렘을 적시던 비가 완벽하게 멈추는 순간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