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이리아가 실수로 신음성을 흘리지 않은 것이 가히 기적이었다.
그도 그럴 게, 오랜만에 마주한 카즈웰 4세의 모습은 그녀의 예상과 전혀 딴판이었다.
‘이, 이럴 수가. 황태자비의 임신이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검은 머리칼과 그만큼 새까만 눈, 번듯한 어깨와 잘생긴 이목구비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최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눈 아래는 움푹 파였고, 피부는 생기를 잃어 회색빛이었다. 누군가와 싸운 걸까, 양 볼에 옅은 생채기들까지 나 있었다.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지금의 카즈웰 4세는 딱 그 꼴이었다.
초점이 없던 두 새까만 눈동자가 스르르 내려왔다. 거대한 화관, 그리고 그 밑의 익숙한 얼굴을 본 카즈웰의 미간이 말없이 일그러졌다.
결국, 대마법사의 형상을 직접 마주하고 만 카즈웰 4세의 눈이 분노로 반득거리기 시작했다.
‘아…….’
사냥대회의 마지막 날, 카즈웰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눌렀던 기억이 떠오르며 이리아의 입 안은 제멋대로 메말라 갔다.
카즈웰의 이마 위에 갖다 댄 손끝은 언젠가부터 아주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꿀꺽. 힘겹게 침을 삼킨 이리아가 파르르 떨리는 턱을 애써 움직였다.
[대(大)제국 비센티움의 고귀한 천상, 태자 카즈웰 4세께 여신의 축복을 드립니다. 하늘에 귀를 기울이면 겨울에 황금의 비가 내릴 것이고, 땅에 귀를 기울이면 봄에 불멸의 꽃씨가 나타날 것입니다. 자비를 만나거든 마음을 다스리고, 시련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소서.]
카즈웰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졌다.
그는 한참 아무 말 없이 이리아를 내려다보더니, 간드러진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대의 축복을 받다니 영광입니다, 대마법사시여.]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이리아는 문득 이 순간 카즈웰이 달려들어 자신의 목을 조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녀는 루 아휜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 가장 앞의 단상에 올랐다.
쿵쿵-. 거센 심장 박동이 무척이나 뒤늦게 이리아의 두 귓등을 울렸다.
오로지 루퀼렘의 대마법사를 위해서만 준비된 왕좌.
이리아가 그곳에 앉으니, 본격적인 환영식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
오랜만에 입어서이기 때문일까, 군단장 제복이 참 낯설게 느껴졌다.
덱스터는 손안에 술이 출렁이는 잔을 쥐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입을 대지 않았다. 그는 단상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에즈메릴다와 카즈웰 3세를 바라보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은연중에 ‘태자’, ‘나이’란 단어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선 황위 계승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한참 에즈메릴다와 카즈웰 3세에 머물던 눈동자는 천천히 움직여 단상 위를 향했다.
단상 위, 화려한 왕좌에는 이리아 아델리어가 앉아 있었다. 머리 위 화관이 분명 무거울 텐데도, 그녀는 곧게 허리를 세운 채 거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에즈메릴다와 카즈웰 3세를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긴 시간 이리아에게서 머물렀다.
‘이리아…….’
반투명한 베일 안쪽으로 언뜻 이리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원래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무녀들의 손길을 거쳐 더욱 곱게 피어난 상태였다.
사람들이 술잔을 들고 연회장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이리아는 조각상처럼 왕좌 위에 가만히 앉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눈동자만을 돌려 덱스터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루 아휜의 만류하는 말 때문에 길게 가지 못했다.
연회장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왕좌. 가장 화려하지만, 그만큼 자유롭지 못한 대마법사의 자리는 마치 이리아의 인생과도 같았다.
단상 위에서부터 도통 시선을 돌리지 않는 덱스터를 향해 다른 비센티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이리아와의 결혼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으나 애써 모른 척했다.
이리아 아델리어와 덱스터 하워드.
사실, 세상에는 이 둘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보다 불쾌하게 여기는 자들이 더 많았다. 이들의 대부분은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비센티움의 높은 귀족들이었다.
덱스터가 황궁을 방문한 이후, 카즈웰 3세는 다른 때보다 급히 루퀼렘과의 정상회담 날짜를 발표했다. 발표를 들은 귀족들은 곧장 루퀼렘과 덱스터가 어떤 사건에 크게 엮였다는 점을, 그리고 이 사건이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와 그의 약혼이라는 점을 눈치챘다.
덱스터의 말이 맞았다. 제아무리 그가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다고 한들, 이리아의 정체가 저택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온 세간의 관심이 하워드 가문으로 쏠리며, 이리아의 정체는 금세 모두에게 들통났다.
귀족들은 덱스터가 새로이 맞은 빨간 머리의 약혼자가 실은 하얀 머리의 대마법사였다며 그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영원한 비센티움의 영웅일 것만 같던 하워드 대공작이 적대적인 루퀼렘 대마법사를 약혼자로 맞았다는 사실은 제국민들의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제국민들의 반감을 모두 합친다 한들, 한 사람이 지닌 분노에 비하면 이 또한 새 발의 피였다.
카즈웰 4세.
덱스터가 황궁에 다녀간 이후, 카즈웰 4세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편지에 모든 순간이 고요했다고 적었으나, 사실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황궁을 빠져나오며, 카즈웰 4세의 거친 비명과 도자기들이 깨지는 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으니까.
언젠가부터 덱스터의 새까만 눈동자는 이리아가 앉아 있는 왕좌에서부터 내려와 카즈웰 4세에게 단단히 박힌 채였다.
그의 시선을 느낀 카즈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참 많이도 상했군, 카즈웰…….’
덱스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연회장의 조명이 두 남자의 검은 머리칼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름다운 선율이 가득 찬 연회장 한가운데서, 덱스터와 카즈웰 4세는 서로를 한참 바라보았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발걸음을 뗐다.
카즈웰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면 덱스터도 그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덱스터가 가까이 다가가면, 카즈웰도 그만큼의 보폭을 내디뎠다.
신장이 거대하면서도 비슷한 두 남자는 겨우 몇 번의 걸음만으로도 서로의 가슴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다.
“덱스터 하워드…….”
카즈웰의 두 눈동자는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덱스터는 멀리서부터 루 아휜과 이리아의 걱정 어린 눈빛을 느꼈지만, 일부러 카즈웰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른 가슴께서 짐승의 고동이 흘러나왔다.
카즈웰의 입술이 삐딱하게 늘어지며, 양 볼에 덱스터와 같은 보조개가 잡혔다.
“그대가 이렇게 나를 농락하는군, 하워드 공작.”
“농락이라니요. 저는 그저 한 여인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 여인이 ‘이리아 아델리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렇지 않나?”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하! 카즈웰이 매서운 호흡을 내뱉었다.
화를 삭이는 듯, 두어 번 심호흡을 한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미소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니, 그대는 그대의 약혼녀가 이리아 아델리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
“예.”
“그런데 감히 약혼녀의 정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척, 이 나를 속여?”
“그럼요. 전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대는 우리의 제국을 배신했어, 공작.”
“이웃 나라의 여인을 사랑하는 게 제국을 배신하는 행위였군요. 방금 처음 알았습니다.”
악사들이 온 정성을 다하여 연주하고 있는데도, 서로를 마주한 두 남자의 귀에 우아한 노랫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긴장에 휩싸인 둘만의 세상은 새까맣고 잠잠했다.
문득, 카즈웰이 들고 있는 잔이 크게 흔들렸다. 덱스터는 순간 그가 화를 못 이겨 연회장 한가운데서 고함을 지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카즈웰 4세는 그리 쉽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충분하게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카즈웰 4세가 앞서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덱스터는 곧 가슴께에 닿아 오는 서늘한 손끝, 그리고 간드러진 황태자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15년 전에 네놈을 진작 죽여 버려야 했어. 황제께서 너를 독살하려던 황후 폐하를 말렸을 때, 그대로 몰아붙여서 공작 부부와 함께 네 시체까지도 땅 아래에 파묻어 버려야 했었는데.”
“과거가 후회되십니까?”
“그래, 후회돼. 이토록 과거가 후회된 적은 처음이야.”
아아…….
대답을 들은 덱스터의 입술 끝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양 볼의 짙은 보조개 자국과 함께, 그는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환히 웃었다.
“지금껏 전하께서 하신 말 중에서, 방금이 제일 기분 좋은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잔혹하게 일그러지는 카즈웰의 얼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선 그대로 등을 돌려 버렸다.
분노에 찬 카즈웰의 표정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머릿속 그의 얼굴이 뒤틀릴수록, 덱스터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억울하게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 황실에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고 살아왔다. 카즈웰 4세의 측근들이 음식에 몰래 독을 탔을 때도, 밤중에 암살자를 보냈을 때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었다.
카즈웰의 진심 어린 사죄 따위는 단언컨대 바란 적 없다. 황후의 비호를 받으며 태어난 그를 이기리라는 기대 또한 한 적 없다.
하지만, 기대 따위 한 적 없음에도 덱스터는 카즈웰을 이겼다.
생애 처음으로 ‘과거’라는 이름의, 그가 절대로 손쓸 수 없는 영역에 도달했다.
수많은 민족의 무릎을 꿇리고 한 제국을 물려받을 황태자도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법. 아마 카즈웰은 두 나라의 군주 아래서 이루어지는 결혼식을 보며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한 인간의 후회가 이토록 기분 좋을 수 있다니…….’
웅장한 결혼 행진곡이 울리는 내내, 카즈웰은 죽이고 싶었던 이리아 아델리어를 죽이지 못해 분노하겠지. 그리고, 과거 10살이었던 나를 나의 부모와 함께 땅에 파묻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후회하리라.
카즈웰 4세는 황위를 얻어 내야 하는 만큼, 여론을 필사적으로 신경 쓰는 작자다. 그에게 비센티움의 온 귀족과 황제가 알게 된 신부를 건들 용기 따윈 절대로 없었다.
이리아는 루퀼렘에 돌아옴으로써, 그녀의 목표를 이루어 낸 것으로 모자라 카즈웰의 후회를 얻어 냈다.
덱스터가 척추를 쓸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끼며 연회장 가장 앞쪽 단상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루퀼렘의 또 다른 군주, 이리아 아델리어가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왕좌에 앉은 채였다.
이리아 아델리어.
영원불멸한 사랑의 주인.
나의 유일한 여신.
‘당신이 방금 내게 너무나도 큰 선물을 하나 줬어, 이리아.’
비록 베일로 눈을 가렸음에도, 덱스터는 제 몸에 와 닿는 이리아의 걱정 어린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양을 맞이한 노예처럼, 아름답고도 새하얀 얼굴을 멀거니 응시하다가 등을 돌렸다.
가슴속에서부터 뜨겁게 끓어오르는 이 희열을, 이리아와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울 뿐이었다.
***
덱스터와 카즈웰의 신경전을 제외하면, 연회는 예상보다 고요하고 순조롭게 지나갔다.
비센티움의 연회에서는 대부분 사교댄스를 추는 시간이 따로 주어지지만, 루퀼렘의 연회에서는 아니다. 특히나 이런 환영 연회 같은 경우에는 루퀼렘의 춤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을 배려해서라도 댄스 타임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나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
만일 댄스 타임이 있었다면, 그 딱딱한 의자에 2시간을 더 앉아 있어야 했을지도 몰라.
이리아의 목청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무녀들이 양손을 힘껏 잡아 부축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성 복도 한가운데서 진즉 쓰러져 버렸을 터다.
목이 부러질 듯한 무거운 화관, 얼굴을 간지럽히는 베일, 불편한 의복과 높은 구두를 신은 상태로 장장 2시간을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 한 번 까딱이지 않았는데도,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