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4/109)

103화

사실, 대(大)제국 비센티움에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고도 남았다.

비센티움과 루퀼렘은 같은 국경을 공유하며 다양한 갈등을 겪었다. 6년 전의 정상회담은 쌓이고 쌓인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지만, 이번은 아니다.

이번 정상회담은 덱스터와 이리아의 원만한 혼인을 위해 만나는 자리이기에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카즈웰 3세는 선물을 넉넉하게 준비하되, 과감히 수행원의 수를 줄이고 필요한 인원만 루퀼렘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렇게, 비센티움 황실은 단 일주일 만에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비센티움 수행인들은 카즈웰 3세와 카즈웰 4세를 중심으로 두 무리로 나뉘어 각각 다른 경로를 타기로 했다. 호위하는 군인과 기사의 수가 만만찮은 탓에 과감하게 수행원의 수를 줄였다고 하여도 그들이 오는 길은 꽤 성대했다.

당연히 루퀼렘 왕실도 비센티움인들이 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에즈메릴다는 마지막으로 성의 단장을 확인했고, 루 아휜은 수행원들이 안전하게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5마리의 독수리를 하늘에 날려 보냈다.

먹구름이 껴 우중충한 하늘 위를 활공하는 독수리들에는 퀸트라도 포함이었다. 언제나 에즈메릴다의 옆을 지키던 그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널따란 두 날개를 펼쳤다.

수많은 성기사들을 뒤로하고선, 에즈메릴다는 루퀼렘 성에서 비센티움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비센티움의 카즈웰 3세가 온 대륙이 두려워하는 전쟁의 신이라면,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는 120년째 루퀼렘을 다스리는 명예로운 고목이었다. 카즈웰 3세가 엘퀸즈 산맥을 가로지르는 중인데도 그녀는 긴장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비센티움인들의 도착은 요란했다. 비록 규모는 훨씬 작다고 하나, 6년 전과 다름없는 소란스러움에 에즈메릴다는 작게 웃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은 선두의 비센티움인들을 보자마자 더욱 짙어졌다.

피츠윌리엄 웬트워스 후작, 아리엘 리에스, 벤 로하임, 호크 로슨…….

‘다 아는 얼굴이군.’

6년 전의 ‘그’ 정상회담을 한 번 더 겪는 기분이구나.

피츠윌리엄 웬트워스 옆에는 퀸터의 등에 오른 덱스터가 있었다. 군단장 제복과 더불어 망토까지 갖춰 입은 그는 다른 때보다 더욱 당당해 보였다.

에즈메릴다는 덱스터와 눈인사를 한 후, 새하얀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어깨 뒤로 넘겼다.

에즈메릴다의 손짓에 따라 성기사들이 일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성의 거대한 샹들리에 위에 앉은 새하얀 독수리들은 카즈웰 3세의 모습이 드러나기 무섭게 일제히 퍼덕였다.

6년이라는 간격 동안 에즈메릴다가 늙지 않은 만큼, 카즈웰 3세의 풍채도 여전했다. 호화스러운 마차에서 내리는 비센티움의 황제는 변함없이 거대하고 무시무시했다.

그의 걸음에 따라 어깨 위 검은 털가죽이 흔들렸다. 에즈메릴다는 후광이 비치는 비센티움의 황제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오랜만이구나, 카즈웰…….’

여왕의 황금빛 눈동자 깊은 곳에서부터 이채가 번쩍였다. 그녀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카즈웰 3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검을 오래 잡아 굳은살이 가득 박인 손가락들이 에즈메릴다의 창백한 손을 마주 움켜쥐었다.

[간만의 방문인데도, 이 나라는 변한 부분이 하나도 없소.]

[고지식하고 예스러운 마법사들은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네. 하지만 이제 대마법사께서 비센티움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으니, 이 나라도 조금씩 변화하겠지.]

[그렇군. 나는 이 나라의 변화를 축복해야 하는 상황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대가 이 결혼을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정해질 거야.]

[여왕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참으로 싱거운 대사가 아닌가.]

에즈메릴다의 입가에 가벼운 비소가 걸렸다. 양국의 군주는 각자의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가, 동시에 놓았다.

루퀼렘 영공을 가볍게 살핀 후 성으로 복귀하는 퀸트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울음소리가 세상을 울리기 무섭게,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는 비센티움인들을 성안으로 이끌며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내리는 저 비는, 대마법사의 결혼을 맞이하는 여신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고.

***

‘……비가 오네.’

이리아의 황금빛 눈동자 위로 떨어지는 비의 잔상이 맺혔다.

퀸트라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니, 카즈웰 3세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새삼 다시 한 번 더 실감 났다. 이리아는 무녀들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제자리서 안절부절못하고 계속 창밖을 흘끔거렸다.

무녀들은 이미 지독한 장미 향이 풍기는 피부에 향유를 바르고, 또 덧발랐다. 온몸을 스치는 손길은 퀸트라의 울음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에야 멈추었다.

이윽고, 이리아가 탐탁지 않아 했던 대마법사의 의복이 방 안으로 들여졌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드레스는 이번에도 이리아의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속으로 불평을 터뜨릴 틈도 없이, 무녀들은 창백한 몸 위로 능숙히 의복을 껴입혔다.

거울 속의 어린 대마법사는 무녀들의 손길 아래서 점차 성숙해졌다. 둥그런 뺨 위로는 피부보다도 더 새하얀 분이, 입술 위로는 붉은 연지가 나앉았다.

이마 한가운데 위엄과 정의를 뜻하는 붉은 루비까지 올리면, 연회장에 들어설 준비는 끝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누군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들어와, 루.]

문이 열리고, 이리아만큼이나 창백하고 아름다운 한 남성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편한 옷차림을 추구하는 루 아휜 또한 이날만큼은 성기사단장의 위엄을 드러내며 화려하게 꾸민 채였다.

무녀들은 루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에, 마치 도자기 인형이 되어 버린 듯 미동 없는 거울 속의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카즈웰 4세를 포함한 비센티움인들이 막 도착했어요. 덱스터 하워드도 함께요.]

[……그래.]

왜인지, 일순간 빗줄기가 더 거세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애석하게도, 이리아의 신경은 ‘덱스터 하워드’라는 이름보다도 앞서 언급된 ‘카즈웰 4세’라는 이름에 더 쏠렸다.

새하얀 장갑 아래 숨겨진 손바닥에서부터 식은땀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비센티움의 황제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

나의 관자놀이 위로 뜨거운 총구를 들이대었던 남자.

‘카즈웰 4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가 사냥대회에서였지.’

그 이후로는 암살자들을 겪고 이름만 들어 봤을 뿐,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자비란 없던 카즈웰 4세의 그 새까만 눈동자를 다시 마주하는 상상을 하니 숨이 떨렸다. 대단히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그의 우악스러운 손힘이 생생히 느껴지는 듯했다.

무녀들은 아니었지만, 루는 이리아의 어깨가 경직되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와 이리아의 어깨 위를 손끝으로 가벼이 쓸었다. 그리고, 무녀에게서 화관과 베일을 받아 새하얀 정수리 위에 조심스레 올려 주었다.

황금빛의 아름다운 두 눈동자가 반투명한 베일 뒤로 감춰졌다.

루가 베일을 정리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카즈웰 4세가 비센티움의 황태자라면, 아가씨께서는 루퀼렘의 유일무이한 대마법사세요. 그자는 이 성안에서만큼은, 저 하늘 위 달이 파괴된다고 하여도 절대로 아가씨를 건드릴 수 없어요.]

이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는 왼손 엄지의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이리아의 손가락을 빤히 응시하다가, 그 위를 부드럽게 마주 잡아 주었다.

‘괜찮아, 이리아 아델리어.’

루의 말이 맞아. 이 성안에서만큼은, 설령 저 하늘 위 달이 파괴된다고 하여도 카즈웰은 절대로 날 건드릴 수 없어.

이리아의 고운 손끝에는 고급스러운 양피지의 질감이, 코끝에는 양피지에 물들어 있던 박하 향이 남아 있었다. 애써 카즈웰을 밀어낸 그녀는 대신 덱스터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빗물에 젖은 새하얀 독수리 한 마리가 창틀에 나앉았다. 마치 루 아휜에게 보라는 듯 두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던 독수리는 곧 부리로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루가 독수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연회장에 드셨네요. 시간이 되었어요, 아가씨.]

[그래. 이만 출발하자.]

이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녀들이 그녀의 양손을 잡아 주었다.

루퀼렘 성에서 열리는 모든 연회에는 입장 순서가 정해져 있다. 에즈메릴다 여왕이 가장 먼저 연회장의 문을 열어 방문객을 환영하면, 대마법사 이리아가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가 모두에게 축복을 내린다.

이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그녀를 감싼 길고 하얀 천이 바닥을 쓸었다.

단 한 순간도 홀로 걷는 행동이 허락되지 않은 대마법사는 무녀들이 이끌어 주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두 다리를 움직였다.

성의 복도는 몇몇 성기사들의 발걸음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리아는 성기사들이 저 멀리서부터 끌고 오는 거대한 철장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철장 속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흑표범이 침을 뚝뚝 흘리며 앉아 있었다. 비센티움 황실의 선물이 분명했다.

다행히, 숨이 막히도록 고요했던 분위기는 연회장에 가까워질수록 잦아들었다.

루가 손짓하자, 무녀들이 이리아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인간의 온기가 떠나 허전해진 왼손에는 곧 루의 온기가 와 닿았다.

그가 이리아의 다섯 손가락을 부드럽게 잡으며 속삭였다.

[크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언제나 옆에서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알아. 고마워.]

[연회장에서의 예법은 기억하고 계시죠?]

[응. 도서관에서 따로 책까지 찾아 읽었어.]

[아가씨께서 이 나라의 유일무이한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래.]

성 첨탑 꼭대기의 거대한 괘종이 정확히 7번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연회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루 아휜과 함께 밝은 연회장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에즈메릴다는 호크 로슨을 포함한 비센티움인들의 정체를 곧장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리아는 6년 전에 잠깐 보았던 그들의 얼굴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비센티움인이란 회담의 중재를 맡았던 웬트워스 후작, 기록부를 작성하던 블랙우드 경, 황제 카즈웰 3세, 그리고…….

황태자 카즈웰 4세뿐이다.

이리아는 공기 중에 약하게 감도는 덱스터의 박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덱스터가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연회장 앞에서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카즈웰 4세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루가 깜빡 정신을 놓으려던 이리아의 손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그가 만일 손을 잡지 않았다면 황제에게 내리는 축복을 잊을 수도 있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이리아가 카즈웰 3세의 이마 위로 오른손을 대며 입을 열었다.

[대(大)제국 비센티움의 가장 높은 태양, 카즈웰 3세께 다섯 뿔을 가진 여신의 축복을 드립니다. 이 세상의 평안을 받으시어 그 현명으로 천지를 견고케 하시고, 자비를 행할 때마다 복이 찾아오기를. 왕의 인자함이 마른 영혼들을 배부르게 할 것입니다.]

[고맙군.]

이어, 이리아는 루 아휜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날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으면서도 저 남자를 피할 수 없이 수차례 떠올렸었다. 비센티움의 황태자, 카즈웰 4세는 이리아에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악몽과도 같았다.

카즈웰 4세에게 가까워지며 그의 탁한 담배 냄새가 은연중에 느껴졌다.

이리아가 거대한 화관 때문에 점점 뻣뻣해지는 고개를 애써 들어 올렸다.

그런데…….

‘……어?’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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