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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3/109)

102화

예상치 못한 약혼에 놀랐다는 첫 문장을 제외하면, 답서의 내용은 상당히 형식적이었다.

카즈웰 3세는 정상회담을 최대한 빠른 날에 개최하자는 에즈메릴다의 의견에 동의했다. 현재 황실의 신경은 황태자비의 배 속 아이에게 쏠린 상태다. 그들로서는 루퀼렘과의 일을 일찍 처리한 후, 황태자비의 만삭을 대비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황태자비의 임신이 제1순위라 함에도, 루퀼렘과의 정상회담은 결코 소홀히 여길 일이 아니었다. 에즈메릴다는 비센티움 황실이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후 적어도 한 달이란 시간을 두고 루퀼렘에 오리라 예상했지만, 이 예상은 완벽하게 틀려버렸다.

단 일주일.

황실이 원한 정상회담 날짜는 단 일주일 후였다.

이리아는 너무나도 이르게 다가온 정상회담 날짜가 궁금하고 당황스러웠으나 싫지는 않았다. 정상회담이 빨리 끝날수록 덱스터와의 결혼식도 빨리 올릴 수 있기에, 사실 그녀로서는 오히려 좋은 소식이었다.

‘음, 생각해 보니 하워드 공이 카즈웰 3세와 협의해서 이르게 날짜를 조정했을 수도 있겠네…….’

그 또한 결혼식을 최대한 빨리 올리고 싶다는 마음이니, 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이리아는 이웃 나라에 있는 약혼자를 떠올리며 무녀들과 함께 성 복도를 가로질렀다. 긴 의복에 감춰진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이미 분주했던 루퀼렘 성은 회담 날짜가 정해진 이후로 더더욱 분주해졌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은 밤에 눈도 못 붙인 채로 온종일 일을 했으며, 루 아휜은 잠시 흐트러졌던 성기사들의 기강을 바로잡은 후 무녀들과 함께 성을 단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리아도 이 분주함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리아에게 주어진 업무는 에즈메릴다, 루에게 주어진 업무와는 종류가 완전히 달랐다. 에즈메릴다와 루는 ‘성’을 꾸미며 비센티움 황실을 맞을 준비를 했으나, 이리아는 그녀 ‘자신’을 꾸미며 황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앗, 뜨거워!]

이리아는 제 발끝을 욕조 물 속에 밀어 넣자마자 식겁했다. 그녀가 욕조를 벗어나기 위해 마구 발버둥을 쳤음에도, 무녀들은 능숙히 뜨거운 물을 더 들이부었다.

덱스터의 저택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꾸몄다고 자신했는데, 루퀼렘에서의 단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저택의 하녀들이 이리아를 3시간 동안 씻겼다면, 무녀들은 장장 6시간 동안 온몸을 쓸고, 밀고, 닦아 주었다.

매일 무녀들의 손길을 받은 이리아는 차라리 군부대에서의 삶이 훨씬 더 났다고 생각했다. 마치 정성스레 준비되는 요리처럼, 6시간 내내 뜨거운 욕조에 앉아 있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으니까.

이리아는 욕조 안에서 손부채질을 하며 루퀼렘 예법을 하나하나 되짚기 시작했다.

‘절대로 다섯 뼘 이상의 거리만큼 걸음을 떼지 말기. 황제는 반드시 5초 이상, 황태자는 반드시 7초 이상 눈을 마주하고 있기…….’

대마법사는 걸음걸이 하나까지도 예법으로 정해진 대로 내보여야 한다.

이리아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쉴 때, 무녀들은 다 익은 요리를 건져 내듯 그녀를 욕조에서 꺼냈다.

6년 전의 정상회담 때와 같이, 이번에도 비센티움인들은 총 3일 루퀼렘 성에 머물 예정이었다. 첫날에는 방문을 축하하는 저녁 연회가, 둘째 날에는 진짜 목표인 정상회담이 열린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비센티움과 루퀼렘의 앞날을 축복하는 기도식이 있다.

무녀들이 헐벗은 이리아의 어깨 위로 부드러운 비단을 둘러 주었다. 창백한 몸 위로 덧발라야 하는 향유가 수도 없이 많았으나, 그들은 우선 이리아가 연회에서 입을 의복부터 가져왔다.

의복을 본 이리아는 불만이 흠뻑 스며든 목소리로 물었다.

[……꼭 이걸 입어야 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 이리아도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걸음걸이 하나까지도 정해져 있으니, 당연히 의복도 예법에서 명시한 대로 입어야 한다. 온통 새하얀 의복은 언뜻 봐도 지독하게 거추장스러웠다.

비센티움의 황녀가 머리에 티아라를 올릴 때, 루퀼렘의 대마법사는 거대한 화관을 올린다. 여인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비센티움 영애들이 어깨 비단을 없앨 때, 루퀼렘에서는 한쪽 치맛단을 시원하게 잘라 버린다.

이리아는 예전부터 왼편이 훤히 트인 루퀼렘의 치마가 마음에 안 들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천이 뒤집히니 항상 신경을 써야 하는 데다, 무엇보다 다리에 천이 감겨 걷기가 참 불편했다.

이리아가 손짓하자 무녀들이 옷을 가까이 가져왔다.

[조금 더 가깝게 가져와. 자세히 보고 싶어.]

옷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고운 손끝이 비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비단 위에 새겨들어 간 세심한 문양에서부터 의복을 제작한 이들의 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성과 상관없이, 이리아의 미간은 의복을 확인하자마자 서슴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디자인이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문양이 마음에 안 들어서도 아니다.

‘너무 하얘…….’

그저 이 옷이, 너무나도 하얬기 때문이다.

왜 저택의 하녀들이 하얀 옷을 입히지 않으려고 고집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곧 덱스터의 앞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설 텐데, 이 의복을 입으면 결혼식에서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다른 옷을 입는다고 해도 무녀들은 절대로 안 내주겠지. 하얀색이 아닌 옷을 입는다고 하면 더더욱.’

이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잠시 정말 극단적인 방법으로 의복을 엉망으로 찢어 버릴까 고민했으나, 이내 관두었다. 무녀들을 포함한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향유를 다 바르고, 이후에는 의복까지 대충 입어 봤다. 완전히 녹초가 된 이리아는 침대에 마른 나무토막처럼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무녀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잇새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아.

[하워드 공 보고 싶다…….]

하워드 공은 지금쯤 비센티움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평소에 늦게 자는 편이니 분명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을 텐데.

‘일을 하는 중인 걸까? 아니면 운동?’

덱스터의 잘생긴 이목구비를 떠올리는 이리아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창 양 볼을 붉히며 바보처럼 웃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긴 하얀 머리칼을 가진, 몹시도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문 사이서 나타났다.

[아가씨.]

[까, 깜짝이야! 노크 좀 해, 루!]

[열 번이나 두드렸는데요? 대답하지 않으시길래 일찍 잠자리에 드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있었어…….]

이리아가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루와 같은 하얀 머리칼이 허리께에서 아름답게 흔들렸다.

성을 지나다니며 종종 루를 만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참 오랜만이었다. 루는 요 며칠 새 에즈메릴다와 함께 일하며 피로가 쌓였는지, 낯빛이 통 좋지 않았다.

[눈 아래가 새까매, 루. 요즘 잠을 자기는 하는 거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수면을 취하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을까?]

[무녀들의 시중을 받아 몸을 충분히 가꾸시는 것이 저와 폐하를 돕는 방법이에요. 아가씨께서는 아가씨의 일에만 집중하시면 돼요.]

[으응…….]

욕실에서 오랫동안 열기를 받은 탓인지, 이리아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루가 서늘한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살짝 웃었다.

이윽고, 그가 품속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냈다. 언뜻 봐도 돈 많은 귀족들만 쓸 고급스러운 양피지였다.

[조금 전에 비센티움에서 새가 왔어요. 덱스터 하워드가 따로 보낸 편지예요.]

이리아의 황금빛 두 눈이 순식간에 튀어나올 듯 커졌다.

루의 손길을 받아 잦아들었던 얼굴의 열기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일이 많은 루가 침실을 나가자마자, 이리아는 곧장 양피지의 끈을 풀었다.

덱스터의 우아한 필체가 온 시야에 펼쳐졌다.

<나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사랑. 아름다운 이리아에게.

할 이야기는 많지만, 피곤한 당신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아. 짧게 끝낼게.

뭐, 당연한 사실이지만 저택은 변한 부분 없이 모든 게 그대로야. 아, 엄밀히 따지자면 딱 하나 변했군. 우리가 함께 사용할 침실이 새롭게 꾸며지기 시작했거든. 안을 보고 싶었는데, 하녀들이 절대로 보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어. 기세가 너무 무시무시했기에 몰래 살필 엄두도 못 내고 돌아왔네. 너무 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센티움 황궁에 루퀼렘 사자가 도착한 후에, 황제 폐하께서 나를 곧장 호출하셨었어. 폐하께서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가 상당히 궁금한 눈빛이었지만, 루퀼렘 왕실을 이미 방문했다고 전하니 말을 아끼시더라. 형식적인 질문과 대답이 몇 차례 오갔을 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고요하게 지나갔기에 깜짝 놀랐을 정도랄까? 당신이 만일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아마 나만큼이나 놀랐을걸.

황궁으로 퀸터를 몰 당시에는 생각이 상당히 많았었는데, 저택으로 돌아오니 머릿속이 완벽히 텅 비워지더군. 더 바랄 것 없이, 나는 곧 열릴 정상회담이 수월하게 진행되기만을 기도하는 중이야. 부디 6년 전의 정상회담과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기를. 지금 나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어.

아, 하나 더 있다. 지금 당장 당신을 보는 것.

사랑해. 당신의 온도가 그리워.

p.s. 최대한 짧게 줄인 거야. 믿어 줘. 그리고 다시 한번, 사랑해.>

덱스터는 펜을 왼손으로 잡기에, 종종 글자가 옆으로 번져 있었다. 번진 글자까지도 어떻게 이리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이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양피지의 향기를 들이켰다.

양피지에서는 덱스터만의 상쾌한 박하 향이 났다. 겨우 며칠 떨어져 있었음에도 참으로 그리운 향기였다.

하지만 행복감도 잠시.

이리아의 얼굴에 슬금슬금 짙은 근심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하워드 공이 편지에서 6년 전의 정상회담을 언급했어…….’

이리아는 6년 전에 비센티움과의 정상회담을 한 번 경험했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6년 전의 정상회담은 여러 방면으로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우선, 비센티움과 루퀼렘 양국은 얻어 낸 것 하나 없이 서로의 기분만 엉망으로 만들었었다. 에즈메릴다는 카즈웰 3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비겁자라며 그를 대놓고 비아냥거렸었고, 카즈웰 3세는 엘퀸즈 산맥 국경선을 다시 협의하자며 왕실을 다그쳤었다.

이리아는 정치에 의견을 낼 권리가 없기에, 둘의 대화를 옆에서 듣기만 했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비센티움인들은 어떻게든 루퀼렘을 깎아내리기 위해 가만히 있던 그녀 자신까지도 싸잡아 비난했던 것 같다.

6년 전의 정상회담에서 만났던 비센티움인들의 얼굴이 이리아의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지나갔다. 유일하게 루퀼렘 문자를 다룰 수 있었던 거만한 로슨 가(家)의 가주, 당시 비센티움의 군단장이었던 리에스 경, 황제인 카즈웰 3세, 그리고…….

‘황태자 카즈웰 4세.’

이리아는 박하 향이 감도는 양피지를 품 안에 안은 채, 카즈웰 4세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의 얼굴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기억들은 변함없이 몹시도 끔찍했으니까.

가능하다면, 인생을 살며 다시는 카즈웰 4세를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카즈웰 3세가 이미 그를 대동하여 정상회담에 참여하리라고 내용을 부친 후였다.

인생을 살면 언제나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함께 오듯, 정상회담 날에는 덱스터와 함께 카즈웰 4세가 온다.

이리아가 끔찍한 기억들을 털어 버리기 위해 다급히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었다.

‘아니야. 난 이제 더 이상 빨간 머리를 가진 씨시 힐데어가 아니잖아. 황태자비가 현재 임신한 데다 루퀼렘의 기사들도 있으니, 카즈웰도 날 어찌하지 못할 거야.’

그녀는 이어, 두 주먹을 꼭 쥐어 편지와 같이 가슴께에 끌어안았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온몸으로 흘러 퍼지는 힘이 생생히 느껴졌다.

마법이라 불리는 이 힘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여신의 저주라고 여겼을 뿐.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이리아는 몸속에 흐르는 마법사의 피가 든든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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