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2/109)

101화

19.

“루가 몰래 따로 빼 두었었어요. 부단장님께 전해 드리래요.”

주변을 살피던 콘라드가 황급히 담뱃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가 손끝으로 남은 담배 수를 세며 중얼거렸다.

“거참, 몰랐는데 그 하얀 머리 은근히 좋은 친구네…….”

담배는 전과 변함없이 12대가 모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이리아가 이어 라이터를 넘기며 덧붙였다.

“들키지 않게 인적 드문 곳에 가서 몰래 피우세요. 냄새는 절대로 남기지 마시고요.”

“당연하지. 그 정도 눈치는 나도 있어.”

“그런데 차라리 이 기회에 금연하시는 게 어때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하실 것 같은데…….”

“설마 이젠 너도 잔소리냐? 아이고, 지겨워라!”

쯔쯔, 콘라드가 혀를 차며 멀어졌다. 오랜만에 담배 한 대를 태울 장소를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몹시나 다급했다.

나무에 기대 하늘을 구경하고 있던 줄리에타가 몸을 일으켰다. 이리아는 그녀를 따라가기 전에, 멀어지는 콘라드를 향해 소리쳤다.

“저는 도서관에 있을게요!”

콘라드가 알겠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6년 전의 정상회담은 준비부터 개최까지 총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개최를 위해 100일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지니 당시의 정상회담에서 루퀼렘은 꽤 여유를 부렸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루퀼렘의 여왕,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는 비센티움의 황제인 카즈웰 3세에게 사자와 함께 서신을 보냈다. 아직 정확하게 정상회담 날짜가 나온 건 아니지만, 덱스터 하워드와 루퀼렘의 대마법사가 약혼했다는 소식을 본다면 분명 최대한 이른 날짜를 협의할 터다.

‘빠르면 2주 후에 회담이 열릴 수도 있겠어.’

도서관 앞을 지키던 기사들이 이리아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루퀼렘은 마법학의 집대성을 이룬 나라인 만큼, 성 도서관의 크기가 다른 나라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왕성 도서관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답을 찾을 수 있다.’라는 속담이 루퀼렘인들 사이서 돌 정도랄까.

놀랍게도, 오랜만에 들어온 도서관에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도서들이 들어와 있었다. 혹여 아는 사람이 있는지 이리아가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많이 없네…….’

언제나 마법사들이 많던 도서관이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고 느껴질 만큼 오늘따라 책장 사이들이 텅텅 비어 있었다.

아니야. 차라리 마법사들이 이렇게 없는 게 낫지. 이리아는 최근 며칠 동안 자신을 향한 마법사들의 무수한 관심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이미 예상한 사실이지만, 성의 루퀼렘인들은 이리아와 덱스터의 결혼을 허락한 에즈메릴다의 결정에 몹시 놀랐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음에도, 뒷말이 돌고 돌면 분위기는 저절로 달라지는 법.

에즈메릴다가 비센티움에 사자를 보낸 이후로 성은 지금까지 계속 들뜬 분위기였다. 대신들은 이미 허락된 이리아의 결혼에 관해 끝없이 왈가왈부했다.

현재 성에서 조용한 곳은 오로지 이 도서관뿐이다.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깥 소음을 듣던 이리아는 이내 슬그머니 창문을 닫아 버렸다.

성에서 살며 10년이 넘는 세월 내내 루퀼렘 예법을 몸소 익혔다. 하지만 그 1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루시어스에게 배운 비센티움 예법과 루퀼렘의 예법이 머릿속에서 마구 섞여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책이 좋겠다.]

이리아가 높다란 책장 위에서 예법과 관련된 도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렸을 적 본 예법서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 아무거나 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본 예법서의 내용은 참 많고도 다양했다. 글씨가 빽빽한 것이, 참 페이지를 넘기기 싫게 만들었다.

‘그냥 루에게 한 번 대충 훑어 달라고 할까? 그게 훨씬 더 빠르고 간단한데…….’

아니야, 안 돼. 이리아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루는 에즈메릴다 여왕과 함께 정상회담 준비로 바쁠 게 뻔했다. 고작 이런 일로 그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대마법사는 다른 마법사들과 다른 존재이기에, 지켜야 할 예법 또한 다르다. 대마법사는 루퀼렘 밖의 존재들이 성에 들어오면 그들에게 축복 기도를 따로 읊어 주어야 한다.

기도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읊어야 하지만, 대략적인 틀은 언제나 동일하다. 이리아가 기억을 되살리며 예법서에 실린 기도문을 읽고 있을 때, 줄리에타가 슬쩍 다가왔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가죽으로 양장 된 두꺼운 책 한 권을 살피는 중이었다.

“고대어를 공유한 사이라기에 두 나라의 언어가 비슷한 줄 알았는데, 아즈웬국의 언어와 루퀼렘의 언어가 생각보다 훨씬 더 다르네요?”

“아즈웬국과 루퀼렘이 분리된 때로부터 2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잖아요. 다르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이거 원……. 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루퀼렘어부터 빨리 배워야겠네요.”

“금방 배울 거예요. 하워드 공도 루퀼렘어는 군 생활을 하면서 간간이 어깨너머로 배우셨었는데, 이곳에서 태어난 루퀼렘인들만큼이나 능숙히 구사하시잖아요.”

들고 있는 책을 쓸어내리던 줄리에타의 손끝이 우뚝 멈추었다.

대답이 없어 이리아가 고개를 들자, 상당히 당황한 얼굴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바보처럼 눈꺼풀을 수차례 끔뻑이고 말았다.

다, 당황한 이유가 뭐지?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왜 그러세요?”

“아니요. 제가 알기로 그, 하워드 공께서는 루, 루퀼렘어를……”

줄리에타의 말끝이 서서히 흐려졌다. 이후에도 입술을 달싹이던 줄리에타는 마른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그녀가 책을 턱 덮으며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잊어버리세요.”

……하려던 말이 대체 뭔지.

덱스터에 관련된 이야기 같아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이리아는 그냥 모른 체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여전히 참 소심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을 꼬치꼬치 캘 수 있는 성격이 못 된다는 의미다.

이리아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릴 즈음, 줄리에타로부터 또 하나의 물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저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씨…… 아니, 이리아?”

“글쎄요, 저도 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루퀼렘 내부 외국인의 장기 체류 기간은 여왕님께서 직접 정하시거든요. 하지만 그분께서도 아마 지금은 정상회담 준비 때문에 바빠 정확한 답을 드릴 수 없을 거예요.”

“그렇군요. 마음으로는 이곳에 최대한 오래 있고 싶네요.”

이리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루퀼렘에 최대한 오래 있고 싶다고 대답하는 비센티움인은 온 역사를 통틀어 줄리에타 엘로이스가 처음일 것이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이리아는 도서관에 있는 꽃들을 마법으로 전부 활짝 만개시켰다.

‘여왕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시려나……?’

비록 에즈메릴다가 바쁘다고 대답했음에도, 이리아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그녀를 직접 찾아가 볼 계획이었다. 그분께서 여유가 있다면, 아마 줄리에타의 체류 기간을 바로 정해 주실 터다.

하지만 역시나, 에즈메릴다는 여유 따윈 없었다. 그녀는 집무실에서 루 아휜만큼이나 나이가 지긋한 마법사들과 열렬히 토의하는 중이었으니까.

‘……음?’

잠자코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던 이리아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에즈메릴다가 못 보던 금빛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집무실을 가득 채웠던 대화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이리아의 인기척을 느낀 에즈메릴다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니, 이리아?]

[대체 안경은 언제부터 쓰신 거예요?]

[저번 달부터. 이 시간에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온 적 없잖니. 내게 전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라도 있나 보군?]

에즈메릴다는 손짓만으로 집무실의 모든 대신을 물렸다.

이리아가 집무실을 나서는 대신들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살짝 웃어 주었다. 물론, 그들은 하나같이 허리를 숙이고 나간 탓에 이리아의 웃음을 보지 못했지만.

책상 옆에 웅크리고 있던 퀸트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리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쓰다듬어 달라는 듯 얼굴을 우악스레 들이밀었다.

책상 위를 정리하던 에즈메릴다가 퀸트라의 부리를 문지르는 이리아를 흘끔거리며 말했다.

[아무리 외국의 지아비를 두게 될 몸이라고 해도, 보는 눈들을 생각해서 이 성에서만큼은 무녀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 어떻겠니?]

[그냥 자, 잠깐 혼자 다니는 거예요.]

[잠깐이 아닌 듯해서 하는 말이다, 이리아.]

[……네.]

속이 쿡쿡 찔리는구나. 멋쩍게 웃은 이리아는 그냥 시선을 피해 버렸다.

에즈메릴다가 손짓하자, 책상 앞의 의자가 자기 혼자서 드르륵 움직였다. 이리아는 여왕의 시선을 계속 피하면서도 꿋꿋이 의자 위로 궁둥이를 붙였다.

[루가 조금 전 찾아와 네가 엘로이스 가(家)의 장녀와 함께 도서관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넌 그 장녀 문제로 이곳에 찾아온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니?]

[네. 줄리에타가 이곳에서 체류 가능한 기간을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비센티움인의 내국 체류 기간은 정상회담이 끝나면 정할 거다. 카즈웰 3세와 양국의 체류 기간을 협의해 볼 생각이거든.]

[그러시군요.]

[그래. 그 외에 더할 말이 있니?]

[네.]

이리아가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도통 서류에서 시선을 거둘 줄 모르는 에즈메릴다를 살피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마물에 관한 이야기예요.]

탁-.

에즈메릴다의 손에 있던 펜이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져졌다. 깜짝 놀란 이리아와 퀸트라는 동시에 어깨를 떨었다.

여왕의 두 황금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지금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말을 꺼낸 건데, 무리해서라도 나중에 할 걸 그랬나 보다. 이리아가 뒤늦게 후회를 거듭할 때, 에즈메릴다는 머리가 아픈지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윽고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한숨이 서려 있었다.

[네가 줄곧 마물의 비밀을 숨긴 루 아휜과 나에게 실망했다는 점도, 비센티움인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지녔다는 점도 잘 안다. 하지만 마물을 루퀼렘 국경 내부로 들이는 방법은 절대로 안 돼.]

[알아요. 그걸 부탁드리려던 게 아니었어요. 정상회담이 개최되면, 카즈웰 3세에게 루퀼렘과의 협력을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고…….]

[이리아.]

이리아의 어깨가 또 한 번 크게 떨렸다.

에즈메릴다가 책상에 팔을 기댄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가 코끝에 걸쳤던 안경을 조금 거친 손짓으로 벗으며 말을 이었다.

[카즈웰 3세는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야. 그자도 손자를 볼 정도로 나이가 들어 젊었을 적보다는 훨씬 수더분해졌으나, 자신의 가치관을 굽히지 않는 건 여전해. 우리의 제안을 이미 수차례 거절한 만큼,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하지만 여왕님, 저는 우리 선조들의 실수로 고통받는 비센티움인들을 보고 싶지 않아요. 마물로 인한 비센티움의 피해는 폐하의 예상보다도 더 커요. 수많은 제국민이 마물 때문에 마을을 떠나고, 군대 또한 고초를 겪는단 말이에요.]

[제국민들에게는 유감이나, 그들의 군주가 선택한 사항이야. 탓하려면 카즈웰을 탓해야겠지. 나도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단다.]

[여왕님께서 이미 많이 노력하셨다는 점을 알긴 알지만…….]

이리아의 작은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루퀼렘에 곧 돌아올 덱스터를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그토록 가르쳤음에도, 이리아는 예전부터 자신의 표정을 숨기는 데에 순 젬병이었다. 속상한 마음이 겉으로 그대로 드러나니, 에즈메릴다도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 간의 정이 문제다.

언제나 이 빌어먹을 정이 문제야.

남몰래 한숨을 삼킨 그녀가 코끝에 재차 안경을 걸치며 속삭였다.

[그래도 너의 부탁이니, 한번 다시 시도는 해 보마.]

[아…….]

[하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지는 말려무나.]

제아무리 200년을 넘게 산 여왕이라 하여도, 원래 한편의 추억을 함께 나누어 가진 자에게는 독해지기가 힘든 법이다.

에즈메릴다가 마음속에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쉴 때, 이리아의 얼굴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감사해요. 앞으로는 꼭 무녀들과 함께 다닐게요!]

[너는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이리아. 여전히 부탁을 들어줘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구나…….]

대마법사란 아이가 참 세속적이기도 하지, 에즈메릴다가 조용히 덧붙였다. 이리아가 집무실을 나설 즈음 그녀는 이미 서류에 시선을 박은 후였다.

무녀들이 뒤를 따라다니는 건 싫었지만, 이리아는 이후 에즈메릴다와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고 이 덕분에, 콘라드는 이리아를 한결 편하게 지킬 수 있었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하얀 무녀들은 언제나 눈에 띄었으니, 그는 목적지를 일일이 전해 듣지 않아도 이리아가 어디를 향하는지 빤히 알아차렸다.

비센티움 황실에 보냈던 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카즈웰 3세의 답서를 들고 돌아왔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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