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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1/109)

100화

방의 모든 창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으나, 바람이 부는 착각이 들었다.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퀸트라가 코를 골기 시작했을 즈음, 에즈메릴다는 입을 열었다.

[하워드 공작.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대마법사 엘드리지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대체 왜 마법사들의 이주를 계획했는지 아는가?]

[차별과 멸시 때문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맞아. 인간들은 말이야, 자신의 상식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생김새의 타인을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에즈메릴다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행동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울분이 섞여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즈메릴다와 눈이 마주친 이리아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루퀼렘인들이 차별을 당했었다는 사실은 역사와 책을 통해 알고 있지만, 과거의 차별을 실제로 겪은 에즈메릴다나 루 아휜에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많이 없었다.

[하얀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이론적인 설명이 힘든 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과거 수많은 외국인에게 마녀사냥을 당했었다. 그리고, 억울하게 사망했었지. 나는 내가 이끄는 민족이 과거의 그 끔찍한 고통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네, 하워드 공작.]

[루퀼렘인이 이주했던 시기로부터 장장 2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페하. 시대는 변했고, 마녀사냥은 막을 내렸습니다. 밖의 사람들은 더 이상 마법사들을 함부로 심판하거나 죽이지 않아요.]

[그 정도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시대는 변했고 마녀사냥은 막을 내렸으나, 타민족들이 루퀼렘인을 핍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여전해. 그대도 이 사실을 부정하진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소문 속에서만 사는 루퀼렘인은 모두에게 기이한 존재니까요. ‘진짜’ 루퀼렘인과 함께하고 그들을 이해한다면, 루퀼렘 밖의 사람들도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호의적으로 변할 겁니다.]

[그대가 한 말을 증명할 수 있나?]

[예.]

덱스터는 잠시 이리아를 눈초리 끝으로 힐끔거리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보면 답이 나오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에즈메릴다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함께 앉아 있는 두 남녀를 수차례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아주 뒤늦게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아…….]

에즈메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무 표정이 없는 덱스터의 얼굴을 한동안 빤히 응시하다가, 손뼉을 한 번 짝 쳤다.

그리고, 방이 울릴 정도의 커다란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인제 알겠어! 자네가 바로 그 유명한 ‘마법사들의 멱을 다 따 버리겠다.’라고 말한 비센티움인이었군, 하워드 공작!]

덱스터의 두 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에즈메릴다의 폭소가 길어질수록 열이 얼굴 전체에 옮겨 가서, 그녀가 웃음을 그쳤을 때쯤엔 그의 눈 아래까지도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이리아가 괜찮다는 뜻으로 덱스터의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으나,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에즈메릴다가 느리지만 우아하게 자리서 일어났다. 그녀가 거대한 침실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8년 전에 우리는 한 번 만났었지, 하워드 공작. 그때 내가 운하 수사권을 두고 비센티움에 걸었던 조건을 기억하나?]

[기억합니다. 두 나라 간의 정상회담과 비센티움 내 루퀼렘인의 차별 금지 법안 발의였었죠.]

[정상회담에서는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비센티움 내 루퀼렘인의 차별 금지 법안도 결국 기각되었었다. 그러니 비센티움인인 그대에게 묻지. 이 두 조건을 이번에 한 번 더 시도한다면 성공할 것 같나?]

[예. 하지만 성공을 위해서는 폐하께서 저와 이리아의 결혼을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이유가 뭐지?]

[그래야 대신들이 제 눈치를 보고 차별 금지 법안을 통과시킬 테니까요.]

에즈메릴다는 또 한 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방 한편의 책장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는데, 퀸트라가 시야를 가리고 있어 이리아와 덱스터는 그녀가 무엇을 찾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에즈메릴다가 책장에서 꺼내든 건 한 수수께끼의 네모난 상자였다. 그녀가 다시 방을 가로지르며 입을 열었다.

[비록 내가 한발 뒤로 물러났으나, 루퀼렘의 종교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어. 만일 그대와 이리아가 결혼을 한다면, 이리아는 기도를 위해서 1년 중 정해진 100일 동안은 루퀼렘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네.]

[그 100일 동안 저도 이리아와 함께 루퀼렘 성에 있겠습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 100일 동안 이 성에서 머문다면, 철장 속 원숭이처럼 엄청난 구경거리가 될 텐데. 다시 생각해 보지 그래?]

[전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구경거리입니다, 폐하.]

[왜지?]

[키가 커서요.]

에즈메릴다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덱스터의 앞 작은 테이블에 가져온 상자를 내려 두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 위에는 검은색과 하얀색의 정사각형 칸들이 교차로 그려져 있었다.

상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체스판이었다.

[루 아휜의 말에 따르면, 그대가 이 게임을 꽤 잘 둔다고 하더군.]

딱-. 에즈메릴다가 손가락을 튕기자, 체스판 위에 말들이 나타났다.

[게임은 승패에 조건이 걸려야 재미있지. 내 조건을 한 번 들어 볼 텐가, 공작?]

선심을 써 하얀 말을 양보한 에즈메릴다의 두 눈에는, 낮의 ‘그’ 아이가 가졌었던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녀가 새하얀 폰을 집어 든 덱스터에게 단호히 일렀다.

[만일 그대가 이기면 결혼을 허락해 주고, 내가 이기면 이 대화는 없던 것으로 하겠다.]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

초조한 마음의 이리아가 앞니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금단 현상이 찾아온 콘라드보다도 더 심하게 앓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피를 보고 말았다.

[아야……!]

엄지 끄트머리서 쓰린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과 함께 아롱아롱 맺혔던 핏방울은 손가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리아는 창백한 피부 위에 스며드는 핏물을 가만 구경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도 창밖에서 루퀼렘의 하늘 위 두 개의 달이 그녀를 반겼다. 태양이 뜨지 않는 하늘로는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었지만, 이리아는 직감적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리아는 차마 게임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선,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덱스터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었지만, 혹시 모를 결과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복도에 홀로 서 있으니 잠시 잦아들었던 걱정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예상보다, 게임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성기사들이 이리아에게 경례를 하며 방문 앞을 지나갔다. 이리아는 초조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씩 웃어 주었다.

‘설마. 설마 하워드 공이 진 걸까?’

이리아의 양손이 새하얀 옷자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피가 스며들어 값비싼 옷자락이 더러워졌음에도, 지금은 상관 쓸 바가 아니었다.

그렇게 이리아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 방문이 열렸다.

이리아가 다급히 덱스터의 팔을 휘어잡았다. 덱스터는 실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웃고 있지도 않았기에, 그의 팔을 잡은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되었어요?”

“이겼어.”

이리아의 입가에 순식간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나 겨우 숨통이 트였던 그녀는 서서히 이상해지는 덱스터의 표정을 보고 다시 긴장하고 말았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혹시 다른 문제라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덱스터가 이리아의 새하얀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뒤늦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냥,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지막에 폐하께서 일부러 져 주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

덱스터는 복도의 인기척을 읽은 후,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따뜻하고 거대한 손바닥이 뺨을 감싸자, 이리아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살포시 키스했다.

마치 사랑이 이루어졌었던 그 순간처럼, 둘은 아주 긴 시간 입술을 맞대고만 있었다. 서로를 몰아붙이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는 아주 정중한 키스였다.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하워드 공과 결혼을 하게 되었어.

이리아의 잇새서 기쁨에 겨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덱스터의 목덜미에 힘껏 팔을 감고 말았다.

키스는 거칠어진 만큼이나 오래 이어졌다. 저 멀리서 신하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이리아는 온종일 덱스터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을 터다.

이리아가 엄지손톱의 상처를 살피는 덱스터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결혼식 준비는 어떻게 하죠, 공? 일전에 생각해 둔 게 없어서 아마 완전히 처음부터 준비해야 할 텐데…….”

“아. 결혼식 준비 전에, 당신과 내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해결해야 할 일이요?”

“여왕님께서 곧장 비센티움 황실과의 회담을 준비한다고 하셨거든. 당신의 목표 중 하나였잖아, 내 사랑. 설마 벌써 잊은 거야?”

“아. 그, 그게 있었죠…….”

이리아가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가장 중요한 회담을 잊어버리다니, 혼자서 너무 들떠 버린 게 틀림없었다.

이리아는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는 덱스터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럼 하워드 공은 비센티움으로 돌아가나요?”

“응. 여왕님께서 황실에 사자를 보내는 대로 출발할 생각이야. 콘라드와 줄리에타 엘로이스는 함께 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두 사람이 어떻게든 해결해 줄 거야.”

“걱정 안 해요. 저는 여기서 가만히 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게요.”

덱스터가 웃으며 맥박이 뛰는 피부 위로 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에즈메릴다 여왕에게 결혼 허락을 받았으나, 덱스터가 비센티움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비센티움의 대공작이자 군단장이었기에, 정상회담이 열리면 관습에 따라 반드시 비센티움 황실과 함께 입성해야 했다.

상황을 질질 끌지 않는 에즈메릴다의 성격에 따라, 정상회담 준비 과정은 속전속결이었다. 그녀는 덱스터와 체스를 둔 바로 다음 날 아침 곧바로 비센티움에 사자를 보냈다.

덱스터의 말대로, 콘라드와 줄리에타는 루퀼렘 성에 남았다. 어느덧 초승달과 보름달이 함께 뜬 새벽하늘에 상당히 익숙해진 그들은 도통 떨어질 기미가 없는 두 남녀를 보고 동시에 혀를 찼다.

“영원한 작별도 아닌데, 저 두 분은 참 인사를 길게도 하시는군요.”

“내 말이. 좀 있으면 다시 만날 놈들이 뽀뽀도 참 길게 한다니까?”

“전 정상회담과 결혼식이 전부 서둘러 끝나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다 끝난 후에는 또 온종일 도서관에 처박혀 있으려고?”

“네.”

쯔쯔, 콘라드는 이번에는 줄리에타를 향해 혀를 찼다. 그로서는 절대로,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학구열이었다.

이리아와의 기나긴 인사를 마친 후, 덱스터는 퀸터를 타고 곧장 비센티움으로 돌아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루 아휜이 하늘에 독수리를 함께 띄워 주었다.

덱스터가 자리를 비웠기에, 이제 이리아의 보호는 콘라드의 몫이 되었다. 그는 이리아가 덱스터의 뒷모습으로부터 눈을 떼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다시 만날 거면서, 왜 그렇게 인사를 길게 해?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워드 공이 제국에 돌아가다가 어떤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참 걱정도 팔자다! 덱스터 하워드 그 새끼는 과거에 병나발을 불면서 전투에 참여해서 이긴 적도 있어, 인마. 걔는 지옥에 가도 생채기 하나 없이 살아 돌아올 놈이라고.”

“그런가요.”

하하. 이리아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녀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자, 콘라드의 두 눈이 빠질 듯 커졌다.

“야, 너. 어, 어떻게…….”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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