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이리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게 변하니 덱스터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에즈메릴다 여왕의 눈초리도 무시하고서는, 밀랍 인형처럼 변해 버린 이리아를 능숙히 부축했다.
“이리아.”
[아가씨를 모시고 나가시죠. 밖의 무녀들이 길을 안내해 줄 겁니다.]
루 아휜이 나직이 속삭이자, 덱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콘라드와 함께 서둘러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루는 멀어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끝까지 응시했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여왕의 앞이라 해도 차마 감추지 못한 불만이 서려 있었다.
[너무……. 너무 직설적으로 전하셨습니다.]
[저 아이도 이제 성인이야. 돌려 전하는 방법이 더 복잡하고 어렵다. 그나저나, 너는 여전히 이리아를 감싸는구나. 비센티움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 팔불출 같은 행위도 조금 나아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비록 놓아드렸으나, 저는 이 숨이 다할 때까지 오로지 아가씨만을 생각할 겁니다. 아가씨를 향한 마음을 제게서 빼앗으려 하지 말아 주세요, 폐하.]
에즈메릴다 여왕은 언제 고함을 내질렀냐는 듯 흐트러짐 하나 없이 평온한 자세였다. 루는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알현실을 나섰다.
그는 에즈메릴다 여왕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들었으나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너도 나만큼이나 참 피곤한 인생을 사는구나, 루 아휜…….]
애초에 이리아 아델리어의 행복이 아니고서는 의미가 없는 인생이다.
루는 부디, 이리아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
비는 아주 오래도록 내렸다.
처음에는 마법의 힘이었지만 나중에는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호우가 되었다. 왕궁의 측우기 속 빗물이 넘쳐흘렀을 때쯤, 이리아는 눈을 떴다.
루퀼렘은 태양이 오르지 않는 나라이기에, 시간을 확인할 방법이 시계밖에 없었다. 비센티움에서의 습관 대로 창밖을 제일 먼저 확인했던 이리아는 이내 한숨을 쉬며 시계를 찾았다.
시곗바늘은 숫자 12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아침에 새로 들였던 튤립이 오므라든 모습을 보면 자정이 분명했다.
‘대체 몇 시간을 기절해 있던 건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알현실을 나왔던 기억이 있다. 이후 무녀들의 부축을 받고 방까지 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약을 마셨었다. 물약을 마시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어, 장장 반나절을 넘게 자 버렸다.
‘하워드 공은 잘 있을까?’
알현실을 빠져나올 때 봤던 덱스터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의 두 새까만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했었다.
덱스터의 얼굴을 시작으로, 알현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얼떨결에 싸움판을 구경하게 된 콘라드는 참 난감해 보였었고, 루는 상황이 그렇게 됨에 미안함을 느꼈던 듯했다.
‘그리고 에즈메릴다 여왕님은……’
……많이 화가 나셨었지. 절대로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자세셨고.
어렸을 적부터,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자유를 박탈하는 데 루 아휜과 더불어 가장 큰 역할을 했으면서도, 종종 보여 주는 상냥함이 좋아 이리아는 여왕을 차마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루퀼렘의 두 군주가 정계와 종교를 도맡아 각자 다른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는 ‘대외적’ 측면이며, 실상은 조금 다르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에즈메릴다 여왕은 정계에서만큼이나 종교의 측면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었다. 대마법사의 자리가 오랜 시간 공석이었던 데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너무 어린 이유에서였다.
대마법사 엘드리지가 사망한 시점부터 이리아 아델리어가 제대로 된 군주 역할을 해낼 때까지를 루퀼렘인들은 ‘종교의 과도기’라고 부른다. 호칭 자체가 ‘과도기’인 만큼, 이 시기에는 종교의 모든 부분이 혼란스러웠다.
이리아는 이 시기 에즈메릴다 여왕이 얼마나 많은 책임과 의무를 짊어져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의 대혼란을 겪어 본 여왕은 이후 종교의 안정을 가장 중요시하는 인물이 되었기에, 이리아의 결혼을 반대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거기다 더해서, 과거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그 대마법사의 전례까지도 있으니…….’
이리아의 두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에즈메릴다가 이 결혼을 반대한다 하여도, 그녀는 반드시 덱스터가 필요했다.
철없는 어린아이가 되어도 좋다. 이미, 그가 없이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그 대마법사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으려면, 여왕님과 왕실의 허락을 받으면 되는 거잖아.’
방문이 열리기 무섭게, 앞을 지키고 있던 무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이리아는 질린다는 듯 혀를 내두르고선 단호히 명령했다.
[따라오지 마. 여왕님을 뵈러 가는 길이야.]
무녀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무리하여 이리아의 뒤를 따르지는 않았다. 아직 대마법사로서의 업무 수행이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데다, 방에 가둬 두라는 여왕의 명령도 없었기에 이리아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녀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언제나 성기사들과 무녀들이 따랐기에, 이리아는 처음으로 혼자서 루퀼렘 성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녀는 루퀼렘 성도 밤중에는 쥐 죽은 듯 고요하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침소는 성의 꼭대기에 있었다. 성의 고요를 만끽하며 성 꼭대기까지 올라온 이리아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마주쳤다.
“……하워드 공?”
“이리아.”
덱스터가 침소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자리서 잠시 덱스터를 응시하던 이리아는 곧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둥근 이마 위에 부드러운 키스를 남기고선, 목덜미를 살살 쓸어 주었다.
“몸은 괜찮아?”
“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죄송하다니, 당연한 이야기를.”
덱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코끝이 절로 찡해졌다. 그토록 바라던 결혼을 자신 때문에 못 하고 있으니, 그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이리아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워드 공…….”
이리아가 덱스터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정수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여왕님이 원래 그리 차갑게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세요.”
“알아. 그분께 실망하지 않았어, 이리아.”
“그럼 저는요? 제가 공에게 너무 추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서 걱정되는데…….”
새하얀 정수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칫했다. 덱스터는 살짝 일그러진 눈으로 이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이리아는 한껏 주눅이 들어 버렸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허리께를 휘어잡은 손도 미약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덱스터가 가슴께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리아의 턱을 받쳐 올렸다. 그리고, 물기가 가득한 입술 위로 제 입술을 살포시 찍어눌렀다.
“당신은 변함없이 너무 아름다워.”
창백했던 이리아의 얼굴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서로의 입술을 장난스레 문지르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덱스터의 오른뺨 위로 키스를 남긴 후,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리아가 여린 손끝으로 덱스터의 이목구비를 따라 그리며 속삭였다.
“이렇게 따로 찾아왔는데도 여왕님이 하워드 공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떡하죠?”
“뭐, 그럼 내가 당신을 둘러업고 도망가지. 저 머나먼 남쪽 나라까지 가면 아무리 에즈메릴다 여왕님이라 해도 절대 못 찾으실걸.”
“짐작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공의 선택지 속에 도망이 있을 줄이야……”
“응. 하지만 끝까지 노력한 후의 이야기야, 내 사랑. 당신의 고향과 민족을 생각해서라도 함께 도망가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
이리아가 수줍게 배시시 웃었다. 또 한 번 눈이 맞은 둘은 부드러운 키스를 나누다가, 방 안에서 들려온 고함에 퍼뜩 정신을 다잡았다.
[둘의 인기척이 신경 쓰여 눈을 못 붙이겠구나. 그만 서성이고 들어와!]
덱스터가 곧장 흥건히 젖은 입술을 능숙히 닦아 냈다.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온 이리아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뒤늦게 얼굴의 열을 식혔다.
이리아의 이마 위로 짧은 입맞춤을 남긴 후, 덱스터가 침실 문고리를 돌렸다. 그의 거대한 등허리에는 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죄송합니다, 폐하.]
[됐다, 나는 원래 잠이 많지 않은 사람이야. 나이가 드니 잠도 사라지는구나.]
에즈메릴다 여왕은 막 침대에서 일어났음에도 흐트러진 부분 하나 없이 완벽했다. 이리아와 루 아휜이 외모 때문에 인간답지 않다면,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은 철두철미한 자세 때문에 인간답지 않은 자였다.
이리아 아델리어와 달리, 에즈메릴다 여왕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거대한 신수(神獸) 한 마리가 언제나 그녀와 함께한다.
방 한쪽에서 잠을 자고 있던 코끼리만 한 독수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낯선 검은 머리의 이방인을 발견하고 잠시 흥분했지만, 에즈메릴다 여왕의 목소리에 곧장 진정했다.
[괜찮다, 퀸트라. 쉬어라.]
성을 수호하는 잉어와 독수리. 어린 시절의 이리아가 말했던 ‘아이반-퀸트라’ 중, 퀸트라의 이름을 가진 신수였다.
덱스터가 호롱불을 켜는 에즈메릴다 여왕에게 정중히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폐하께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딴청부리지 말고 너도 함께 오거라, 이리아!]
퀸트라의 부리를 쓰다듬고 있던 이리아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괜히 민망해진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쭈뼛쭈뼛 여왕에게로 다가갔다.
에즈메릴다 여왕은 나란히 앉은 두 남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루퀼렘어를 유창하게 잘하는구나, 하워드 공작. 따로 배운 건가?]
[10여 년 전, 국경선에서 근무했을 때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배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언어는 배우지 않던데, 참 특이하군.]
[여왕님께서는 루퀼렘어가 배울 가치가 없는 언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이는 아마 루퀼렘인이 왕국 밖으로 잘 나가지 않기 때문이겠죠.]
에즈메릴다가 입가에 은근한 조소를 머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투의 웃음이었다.
덱스터는 사양하지 않겠다는 듯,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 나라의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다고 하나, 두 분야가 완전히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는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낮의 대화를 들은 후, 저는 루퀼렘의 종교가 여왕님의 정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흥미롭군. 계속해 보아라.]
[현재 루퀼렘의 종교는 신자들의 국민성을 재고하고, 그들에게 강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왕님께서는 이런 종교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통치를 하시죠. 종교와 관련된 연례행사를 크게 여는 것도 실은 왕국민들의 소속감을 높이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맞아. 연례행사를 크게 연다고 하여서 해가 될 건 없지 않으냐.]
[하지만 여왕님의 통치는 종교를 단순한 소속감의 함양에 이용한다기보다, 루퀼렘인이 이 나라를 뜨지 못하게 옭아매는 족쇄로 쓰는 느낌입니다. 폐하께서는 대체 왜 왕국민들을 이 나라에 묶어 두시는 겁니까?]
에즈메릴다의 미소가 짙어졌다. 일순간, 그녀의 아득한 황금빛 눈동자 안쪽으로 이채가 반짝이는 듯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