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루 아휜이 기나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들어왔다. 콘라드와 덱스터를 곁눈질한 그는 에즈메릴다 여왕을 향해 경례를 올렸다.
루의 뒤를 따라, 온통 새하얀 옷을 입은 이리아 아델리어가 들어왔다.
이리아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등 뒤 스무 명의 무녀들도 함께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수그린 그들은 이리아에게서 절대 멀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반투명한 베일 속 이리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는 엉망이 된 알현실 한가운데서 에즈메릴다 여왕과 두 비센티움인이 왜 모두 트럼프 카드를 들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여왕과 덱스터는 이리아가 바로 앞에 선 후에야 서로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에즈메릴다 여왕 특유의 우아한 루퀼렘어가 널따란 방을 한가득 울렸다.
[몹시도 간만이구나, 이리아.]
[여왕님께서 대체 왜 이 둘과 함께…… 아니 그보다 알현실이 왜 이리 엉망이에요?]
[공주님들이 와서 난리를 치고 갔단다. 막 마법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한 시기라, 내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말괄량이들이 되어 버렸어.]
이리아의 왼손에 끼인 금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의 손이 올라감과 동시에, 루 아휜이 무녀들에게 방을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무녀들이 그대로 뒷걸음질 쳐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가장 앞에 있던 무녀까지 문턱을 넘으니, 마법은 곧장 시작되었다.
이리아의 힘은 고요하지만 요란스러웠고, 복잡하나 단순했다.
대마법사의 손끝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유리 조각들이 허공을 질주했다. 마치 찢어진 천을 꿰매듯, 조각들은 함께 다닥다닥 붙어 엉망이었던 창문을 다시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 냈다.
흔들렸던 샹들리에는 한때의 모습으로 수복되었고, 벽 또한 깔끔히 변했다. 벽이 원래대로 돌아옴에 따라, 그 위에 그려져 있던 그림도 점차 선명해졌다. 그림 속에서는 다섯 뿔의 여신이 암사슴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아, 이참에 비도 내려 주겠니? 최근 한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왕국민의 걱정이 파다하단다.]
쿵. 성의 창문들이 한꺼번에 닫혔다.
대마법사가 고개를 까딱이자 영원한 새벽의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곧 비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자유를 제외하곤 루퀼렘의 모든 부분이 이리아의 손바닥 안이었다.
[여왕님의 눈도 공주님들께서 그리 만든 건가요?]
[아니. 이건 거리에서 나돌던 한 고양이에게 당했다. 잠시 먹을 걸 주려고 했는데, 자신을 해친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이리 만들었지 뭐니.]
여왕이 웃으며 안대의 끈을 풀었다. 그녀가 안대를 내려 두었을 즈음에는, 이리아가 이미 왼쪽 눈을 완벽하게 회복시킨 후였다.
[네 마법이 편리하긴 하구나, 이리아 아델리어. 마법사의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이들은 치료를 시도할 엄두조차 못 내더군.]
[겨우 눈 한쪽 정도라면 폐하께서 직접 치료하셨어도 되었을 텐데요.]
[다 옛이야기야. 나이가 드니 마법의 힘도 약화하는지, 겨우 눈 한쪽 정도라도 고치기 쉽지 않더구나.]
콘라드 메이필드와 덱스터 하워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법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이라는 사실은 들려오는 말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절대적인 대마법사의 힘은 변함없이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연, 겨우 5살의 나이에 태양을 파괴했다는 대마법사의 힘이었다.
이리아가 시작한 빗줄기는 거셌다. 만족했다는 얼굴의 에즈메릴다 여왕은 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트럼프 카드를 섞었다.
[한 게임 할까, 이리아?]
[저는 카드놀이에는 그다지 소질이…….]
[만일 네가 이긴다면, 이 남자와의 결혼을 허락해 주마.]
루 아휜을 포함한 방 안의 모든 이가 퍼뜩 에즈메릴다 여왕을 바라보았다.
덱스터와 이리아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리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의 덱스터에게 괜찮다는 투로 미소를 보인 후, 자리에 앉아 카드를 들었다.
루 아휜이 베일을 그녀의 얼굴 뒤로 넘겨 주었다. 에즈메릴다 여왕은 1년 하고 몇 개월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진 이리아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살폈다.
[못 본 사이 성숙해졌구나.]
[여왕님은 전과 그대로세요.]
[그럴 리가. 나는 지금도 점점 늙어 가는 중이야. 눈가를 잘 보아라, 이리아. 분명 주름살이 전보다 진해졌을 거다.]
루퀼렘의 두 군주는 동시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웃음과 함께, 게임이 시작되었다.
마법사들의 카드 게임은 단 한 번의 차례로 끝이 나 버린다. 이리아는 에즈메릴다 여왕의 패 속 조커를 피하기 위해서 마법을 발동시켰고, 에즈메릴다 여왕은 이리아가 조커를 뽑도록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리아가 패를 꿰뚫어 보면 에즈메릴다 여왕은 그 위에 또 다른 환영을 덧씌운다. 스페이드가 하트가 되고, 하트가 클로버가 된다. 클로버가 다이아몬드가 되어 사실은 이 다이아몬드가 조커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쯤엔, 이미 게임이 끝나 있었다.
에즈메릴다 여왕이 테이블 위로 카드들을 던지며 말했다.
[내가 무수히 말했었지, 이리아 아델리어. 마법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네 습관이, 나를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로 만든다고.]
이리아의 두 눈에 울분이 차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뽑은 조커를 손끝에서 구겨 버리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에즈메릴다 여왕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완벽히 스러져 있었다. 그녀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알현실을 울렸다.
[나의 승리다. 이로써 너의 결혼을 허락할 수 없게 되었구나.]
[저는 하워드 공 없이는 하루도 제대로 못 살아요.]
[제대로 살아야 할 거다. 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종교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어. 이 나라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면 네가 하루빨리 정신을 차려야 해.]
[싫어요.]
[이리아-!!]
에즈메릴다 여왕이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천둥이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
우르릉, 쾅. 수차례의 소음이 이어지며 번개도 함께 찾아왔다. 마치 하늘이 이리아의 기분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덱스터는 곧장 만류하는 눈빛을 보냈고, 루 아휜은 진정하라는 뜻에서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리아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쏘아붙였다.
[저는 지금껏 제가 모르던 사실들을 비센티움에 정착하고 나서야 루에게 들었어요. 제가 왜 모든 걸 숨기는 이 왕실을 위해서 힘을 써야 하죠? 루퀼렘은 여전히 소중하나 너무 실망스러운 나라가 되어 버렸고, 왕실은 절 배신했어요.]
[모든 진실을 알기에 당시의 너는 너무 어렸어!]
[그래도 알려 주셨어야죠!]
씩씩대던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호흡이 잦아들수록, 경직되었던 이리아의 어깨도 축 처졌다.
그녀가 물기가 흠뻑 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적어도, 적어도 제가 왜 이 성에서 괴로운 시간을 감당해야 했는지의 이유는 알게 해 주셨어야죠, 폐하…….]
이리아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의 얼굴이었다. 자유를 잃어버렸던 과거를 떠올리기 무섭게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오자, 그녀가 황급히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저는 일하는 기계도 아니고, 기도하는 석상도 아니에요. 저도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온 세상이 저를 속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기분은 이를 수 없이 처참했다고요.]
이리아가 단호히 등을 돌렸다. 그녀는 얼굴을 감추면서까지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지만, 숨소리의 떨림까지는 차마 숨길 수 없었다.
[여신의 현신으로 대우받으면 뭐 하나요? 겉만 번지르르하고, 정작 속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는데.]
[네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그럼에도, 결혼만은 허락할 수 없다.]
[대체 왜요?]
[결혼을 하면, 너의 신비성이 사라지니까!]
신비성이라니. 이리아가 다시 몸을 돌려 에즈메릴다 여왕을 바라보았다.
돌아본 에즈메릴다 여왕은 어느샌가 반쯤 일어나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던 이는 사실 이리아 아델리어뿐만이 아니었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도, 분노를 감추기 위해 두 주먹을 있는 힘껏 쥔 채였다.
하늘 위에 드리워진 먹구름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늘어났다. 빗소리가 더 강하게 몰아칠수록, 두 군주의 억양도 함께 억세졌다.
[대마법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인간답지 않아야 해. 신비로워야 하고, ‘신’다워야 한다! 그래야만 여신을 섬기고, 너를 여신의 현신으로 여기는 이 나라의 종교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루퀼렘인들의 믿음은 그리 약하지 않아요! 제가 결혼을 한다고 해서 무너질 종교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성과 사랑에 빠져 혼인을 하려던 대마법사는 네가 처음이 아니야, 이리아. 우리의 민족이 이 엘퀸즈 산맥 안쪽으로 이주하기 전에도 너같이 결혼을 주장하고 나선 대마법사가 있었다!]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엘드리지를 포함하여, 지금껏 역사에 남은 루퀼렘의 대마법사들은 단 한 명도 혼인하지 않았었다. 자신처럼 결혼을 주장하고 나섰던 대마법사라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다.
에즈메릴다 여왕은 깊은 황금빛 눈동자로 고개를 내젓는 이리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화를 겨우 억누르는 여왕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당시 루퀼렘인들은 마녀사냥을 피해 유목 생활을 하는 중이었고, 민족 지도자들은 제대로 된 터전이 없는 루퀼렘인들이 흩어질 것을 걱정하여 대마법사의 결혼을 막았지. 하지만 그녀는 루퀼렘인들 몰래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함께 야반도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밴 채 돌아왔어.]
[저는……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당연히 그렇겠지! 너를 평생토록 지켜 온 루 아휜조차도 이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해. 이 대마법사는 루퀼렘의 가장 큰 수치이기에, 지금껏 입 밖으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왔다. 역사서에 간혹 쓰여 있는 문장들만이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 줄 뿐이야!]
설마 나도 하워드 공과 결혼을 하면 그 대마법사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걸까.
이리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차마 상상조차 못 했던 걱정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마법사라니, 덱스터와의 행복한 미래만을 꿈꾸던 그녀에겐 몹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 대마법사의 허락되지 않은 결혼과 임신으로 인해 종교의 명예는 무너졌고, 유대감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은 잠시 뿔뿔이 흩어졌었다. 다음 대 대마법사셨던 엘드리지 님께서 흩어진 우리 민족을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너는 꿈에도 모르겠지, 이리아 아델리어!]
[하지만…… 하지만 저는 다시 이 루퀼렘 성에 갇히기 싫어요, 폐하. 겨우 이루어 낸 사랑을 포기한 채 이곳에서 외롭게 평생을 살아가다가 후회하며 죽고 싶지는 않단 말이에요.]
[나도 알아. 그러나 네 운명이 그리 타고난 걸 어쩌겠니! 나는 여왕의 운명을 타고나 일평생 정계에서 떠나지 못했고, 루 아휜은 대마법사를 수호하는 운명을 타고나 일평생 너를 떠나지 못했어! 나도, 루 아휜도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는데, 너는 대체 왜 그러지 못하는 게야!]
[그러기 싫으니까요! 저는 이 성에 들어온 순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평생을 고통받았는데, 그 고통을 죽을 때까지 또다시 어떻게 감내해요!]
[정신 차려, 이리아 아델리어! 아무리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넌 엄연한 이 나라의 군주야! 이기적이고 철없는 어린애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르릉, 쾅. 번개가 또 한 번 세상에 내리쳤다.
이리아가 호흡을 도통 진정시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세 남자의 등허리가 동시에 경직되었다. 콘라드와 덱스터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고, 루 아휜은 성기사들을 호출할 준비를 했다.
[가만히 있거라, 루 아휜!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에즈메릴다 여왕이 루 아휜에게 호통쳤다. 그녀의 호통을 마지막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루 아휜의 얼굴마저도 끝내 서슴없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여왕의 창백한 손가락이 이리아의 가슴께에 들이밀렸다. 에즈메릴다는 분노 때문에 떨리는 손끝으로 이리아를 가리키며, 그녀의 심장에 새겨 넣듯 한 글자 한 글자를 똑똑히 내뱉었다.
[대마법사 엘드리지 님께서 왜 대마법사는 결혼을 위해 반드시 왕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성법을 만들어 냈는지 아니? 흩어진 루퀼렘인들을 겨우 하나로 묶어, 엘퀸즈 산맥 안쪽으로의 이주를 실행했던 그분께선 지금의 상황까지도 미리 예견했었어. 그 성법은 오로지 너의 결혼을 막기 위해서, 왕실과 대마법사 엘드리지 님께서 단합하여 만들어 냈다는 의미다.]
[대마법사 엘드리지 님께서 오로지 내 결혼을 막기 위해…….]
[이미 세상을 떠나신 그분께서 실망토록 하지 말아라, 이리아. 이만 잠자코 네게 주어진 대마법사의 운명을 받아들여.]
역사 속에 사라진 대마법사라니. 엘드리지 님과 왕실이 오로지 나의 결혼을 막기 위해 함께 만들어 낸 성법이라니…….
이미 창백한 얼굴이 급기야 새파랗게 식으며, 이리아의 두 다리에 힘이 빠져 버렸다. 루 아휜이 무너지는 몸을 서둘러 잡았음에도, 이리아는 결국 정신을 탁 놓고 말았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