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비센티움과 루퀼렘은 온 대륙을 통틀어 사계절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들이다. 그러나 비센티움과 달리, 루퀼렘은 1년 내내 공기가 서늘하다. 태양이 뜨지 않는 데다가 엘퀸즈 산맥 안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분명 늦여름인데도, 공기가 서늘하군…….’
숨을 쉴 때마다 이는 입김이 참 신기했다. 덱스터는 제자리에 서서 새벽하늘 위에 뜬 두 개의 달을 구경하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이 있다. 루퀼렘에는 8년 만에 왔기에 강과 산이 모두 변하기엔 이르나, 둘 중 하나는 바뀌었을 만도 했다. 하지만 강산은 무슨, 루퀼렘은 성의 모습까지도 완벽히 그대로였다.
덱스터는 어떻게 이리 모든 게 그대로인지 감탄하며 복도를 거닐었다. 천장의 그림을 지나친 그는 곧, 계단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이른 아침이라 루퀼렘 신하들이 없는 게 참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게, 콘라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해 몰골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일찍 일어난 건가?”
“엉. 너는?”
“일찍 일어났어.”
“구라치지 마, 새꺄! 이리아 아델리어 씨랑 함께 밤새우고 한숨도 안 잤겠지!”
……어떻게 알았지? 덱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한 걸음 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쯔쯔. 콘라드가 혀를 차며 그의 머리 뒤를 가리켰다.
“네 뒤통수에 나뭇잎 붙어 있단다, 양아치야.”
덱스터가 어색한 손짓으로 뒤통수를 매만졌다. 콘라드의 말대로, 그의 새까만 머리카락 위에는 나뭇잎이 한 장 붙어 있었다. 나뭇잎은 밤새 메말라 손아귀에서 곧바로 부서졌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경비병은 어김없이 성 내부를 순찰하는 중이었다. 덱스터는 지나가는 경비병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선 콘라드의 옆에 앉았다.
“줄리에타 엘로이스는?”
“아마 왕궁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을 거야. 여전히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네. 걔, 어제도 온종일 도서관에 짱박혀서 한 발짝도 안 나왔거든.”
콘라드가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었다. 단언컨대, 줄리에타 엘로이스는 그가 영원토록 이해할 수 없는 학구열의 소유자였다.
비센티움 군인 둘이서 외국 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엔 꽤 불편한 법이다. 건장한 두 비센티움인은 어쩔 수 없이 계단 구석에 딱 붙어 앉아 떠오르지 않는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콘라드의 바지 뒷주머니에는 담뱃갑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성 경비들 몰래 담배를 들여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덱스터가 상자를 슬쩍 빼 들었다. 그 속에는 트럼프 카드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대체 왜 가져 온 거야?”
“주머니에 담뱃갑이 없어서 엄청 허전해. 그래서 비슷한 크기의 상자라도 챙겼지. 무게도 묵직해서, 꼭 진짜 담배가 들어 있는 것 같다니까?”
“이상한 부분에서 잔머리 그만 굴리고, 건강 문제로 요절하기 전에 슬슬 끊으려고 노력을 해 봐.”
“저기요. 옛 별명이 ‘공장’이었던 인간한테 그런 잔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콘라드는 담배를 못 피워 힘든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다리 양쪽을 번갈아 떨던 그는 그다음에 손가락을 꺾고, 그다음에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기 시작했다.
금단 현상이 찾아왔을 때는 신경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리는 게 나은 법. 그렇게, 두 군인은 어쩌다 보니 루퀼렘 성 계단 한복판에서 카드 게임을 하게 되었다.
서로의 패에서 돌아가면서 카드를 뽑아, 마지막에 조커를 가진 자가 패배하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실력과 상관없이 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기에, 둘은 끌리는 대로 막 카드를 뽑았다.
콘라드가 조커 카드를 눈에 띄는 위치로 슬쩍 옮기며 말했다.
“기억나, 여보? 우리 예전에 카드 게임 정말 많이 했었잖아. 언젠가는 내가 연속 세 번을 이기니까 여보가 재수 없다며 이 얼굴에 죽빵을 날렸었지.”
“기억나. 그리고, 날 계속 ‘여보’라고 부르면 그때처럼 또 맞게 될 거야.”
“곧 결혼할 텐데, 슬슬 이 호칭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어?”
“미안하지만 네 목소리로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군. 불쾌하기 짝이 없어.”
“어머, 서운해라.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덱스터가 조커를 뽑아 가자, 콘라드의 입가에 웃음꽃이 절로 피어났다. 그는 어느 샌가부터 다리도 떨고 있지 않았다.
게임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덱스터의 머리 위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 군인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에는 한 작은 루퀼렘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전형적 루퀼렘인답게 창백한 피부와 하얀 머리카락,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특이하게도, 왼쪽 눈을 커다란 안대로 가린 채였다.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비센티움의 트럼프 카드가 무척이나 신기한 듯싶었다. 그녀가 멀쩡한 오른쪽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물었다.
[아저씨들, 나도 같이해도 돼?]
루퀼렘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콘라드는 미간을 찌푸렸고, 덱스터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아이는 이리아의 어린 시절과 상당히 닮은 외모였다. 값비싼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은 데다, 두 군주가 거주하는 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정도의 아이라면 꽤 높은 집안의 자제인 듯싶었다.
덱스터가 아이에게 슬그머니 자리를 내주며 대답했다.
[생각만큼 재미있지는 않을 텐데.]
[괜찮아. 너무 심심해서 그래.]
도대체 어느 집안의 자제인지. 덱스터가 어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복도에는 그들 셋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루퀼렘은 여전히 이른 아침이었다.
많이 쳐도 10살 남짓으로 보이는 아이는 예상외로 카드 게임에 큰 소질이 있었다. 상대의 패에서 좋은 카드를 고르는 단순한 운 게임이었음에도, 참 특출나게 카드를 잘 뽑았다.
[아저씨들, 이거 되게 재미있다! 이 요란스럽게 생긴 카드는 이름이 뭐야?]
[트럼프 카드. 비센티움인들이 내기나 도박을 할 때 주로 쓰는 카드야.]
[하나 가지고 싶은데. 우리나라에서는 분명 안 팔겠지?]
[아마도. 그 여부에 관해서는 나는 잘 몰라.]
“……너희 둘이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거냐?”
콘라드가 다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패에 돌아온 조커를 불쾌하게 바라보다가, 덱스터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야, 쟤 우리 생각 읽는 거 아니야? 이 게임에서 마법은 반칙이걸랑.”
“속 좁은 놈. 너는 어린아이한테도 그 승리욕을 발휘하고 싶냐?”
“미안하지만 승패에 나이는 없어, 새꺄.”
지고 있으니까 담배 당긴다, 콘라드가 중얼거리며 아이의 패에서 카드를 한 장 골랐다. 덱스터는 아이가 비센티움어를 몰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게임이 3세트나 끝이 났다. 덱스터가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 카드를 섞을 때쯤, 멀리서부터 소란이 들려왔다.
루퀼렘 신하들이 하나둘씩 성으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건장한 두 군인이 루퀼렘 아이 하나를 끼고선, 계단에 앉아 카드 게임을 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참 웃긴 꼴이었다. 콘라드가 빨리 정리하라고 눈치를 주자, 아이가 그의 손목을 턱 휘어잡았다.
그녀가 방정맞게 웃으며 말했다.
[자리를 옮길까, 아저씨들? 내가 조용한 곳을 알아.]
루퀼렘 성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음에도, 이리아 아델리어는 여전히 꿈나라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동이 틀 무렵 잠자리에 들었으니 아마 다른 때보다 더 늦게 눈을 뜰 테지.
어차피 이리아가 일어날 때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다. 덱스터는 아이에게 안내하라는 투로 고개를 까딱였다.
***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이에게 승리욕을 발휘하는 콘라드 메이필드가 참 한심해 보였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덱스터는 한 시간 전, 콘라드가 내뱉었던 마지막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승패에 나이는 없다.
설령 그 상대가 외국 태생 어린아이라도, 그렇다.
2인에서 3인이 되니 할 수 있는 게임이 많아졌다. 셋은 단순한 운 게임에서 한 단계 올라가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게임까지 시작했지만, 패를 여는 족족 승리는 아이의 것이 되었다. 5판 중 5판을 모두 패배하니, 아무리 덱스터 하워드라 해도 뒤틀리는 심기는 피할 수 없었다.
설마 콘라드의 말대로, 정말로 마법을 써서 우리의 생각을 읽고 있는 건 아닌지.
덱스터가 의심의 눈초리로 아이를 바라보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의 얼굴은 어렸을 적의 이리아를 닮아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몰래 마법을 쓸 인상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이는 두 비센티움 군인을 루퀼렘 성의 이름 모를 방으로 안내했었다. 방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복도에 있는 데다가, 문의 디자인이 화려하여 안도 번쩍번쩍 요란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문을 열자마자 드러난 내부는 처참했다.
벽은 총을 연사한 듯 곳곳이 부서져 있었고, 창문은 하나같이 깨져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굴러다니고 천장의 샹들리에도 곧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우니, 콘라드와 덱스터는 동시에 아이가 잠시 방을 착각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패를 돌리기 무섭게, 둘은 난장판인 주변은 상관없다는 양 게임에만 온 신경을 몰두하게 되었다.
콘라드는 이제 승리욕에 불타오르다 못해 잿더미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한숨을 삼킨 그가 테이블 중앙에 다섯 장의 카드를 동시에 던지며 물었다.
“그런데 이리아 아델리어 씨는 대체 어디서 언제 오는 거냐? 분명 우리가 여기 있는 줄 모를 텐데, 찾으러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이 판은 이만 정리해야겠군.”
덱스터가 게임을 끝내기 위해 손아귀의 패를 모두 내던지는 순간이었다. 창백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그의 앞을 막았다.
곧이어 들려온 것은 연륜이 스며든 한 여성의 능숙한 비센티움어였다.
“그럴 필요 없다네, 하워드 공작. 이리아는 이미 이곳으로 오는 중이야.”
이곳에 아이를 제외한 여자는 없었고, 비센티움어를 할 수 있는 여자는 더더욱 없었다. 덱스터와 콘라드의 고개가 동시에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돌아갔다.
한때 루퀼렘 아이가 자리했던 곳에는, 이제 나이가 지긋한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단 한 번도 그녀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비센티움인은 여인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계의 군주. 루퀼렘을 지휘하는 성의 주인.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
“이, 이게 대체 무슨……”
콘라드와 덱스터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둘은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차마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짜증이 난다기보단,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둘과 달리, 에즈메릴다 여왕은 지금의 상황이 참 재미있는 듯했다. 그녀가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선 덱스터를 응시했다.
[루가 설명했던 모습보다는 훨씬 수려한 외모군, 하워드 공작. 8년 전보다 훨씬 더 성숙해져서, 솔직히 그대를 다시 보았을 때 조금 놀랐어.]
루퀼렘인들의 황금빛 눈동자는 원체 다른 민족의 눈보다 진하고 아득하나, 에즈메릴다 여왕의 시선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에즈메릴다 여왕의 오른 눈을 보고 있으니, 그의 심장은 멋대로 쿵쿵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는 120년째 루퀼렘을 지휘하고 있는 대륙 최장수의 군주였다. 덱스터는 그녀가 지닌 절대적인 권력, 무수한 세월과 연륜에 제압당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만났던 카즈웰 3세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기풍이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비센티움 황실은 지금껏 여러 방면에서 루퀼렘을 굴복시키기 위해 온갖 행패를 저질렀었다. 하지만 그 어떤 행패를 저질러도, 덱스터는 에즈메릴다 여왕이 숨 쉬는 한 비센티움이 루퀼렘을 꿇릴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확신했다.
총칼 하나 들지 않았는데도 인간이 이리 무시무시할 수가 있다니. 덱스터가 한껏 긴장했으면서도 제 배짱대로 시선을 피하지 않자, 에즈메릴다 여왕의 웃음기는 더욱 짙어졌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팽팽한 분위기 사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