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7/109)

96화

이리아의 얼굴에 단번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난간 아래 남자를 불렀다.

“하워드 공!”

덱스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안에는 타오르는 종잇조각이 있었다. 마땅한 양피지를 구하지 못해, 지도의 귀퉁이를 살짝 뜯어 온 듯했다.

이리아가 불꽃을 빤히 응시하자, 덱스터가 멋쩍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사실은 돌을 던질까 했는데, 그럼 들킬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이리아의 두 뺨이 순식간에 고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8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난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그때는 하워드 공을 아저씨라고 불렀었는데.”

“그 호칭 싫어. 아저씨라니, 나는 8년 전에도 겨우 스물이었단 말이야.”

“당시에는 스물도 정말로 많은 나이였어요.”

덱스터가 그래도 그 호칭은 싫다는 투로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후원을 나직이 울렸다.

“당신 발 크기가 조금 커졌어, 이리아. 과거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자란 것 같은데?”

“8년이나 지났어요, 공. 키도 컸으니 당연히 발도 함께 컸죠.”

“그래도 온몸이 자그마한 건 여전해.”

“공이 큰 거예요. 벌써 다섯 번째로 말하는 것 같은데, 제 키와 손발은 루퀼렘인의 평균 크기라고요.”

변한 것은 서로의 나이와 관계뿐. 루퀼렘의 모든 풍경이 그대로라는 사실은 두 사람을 더욱 짙은 향수에 빠지게 했다.

아, 생각해 보니 변한 게 하나 더 있다. 어렸을 적 루 아휜과 함께 심었던 사과나무의 크기도 변했다.

이리아는 문득, 8년 전에 받았던 사과의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했었다는 점을 떠올려 냈다. 그녀가 팔을 뻗어 덱스터의 검은 머리칼을 살포시 잡아당기며 말했다.

“공이 준 사과, 정말 맛있었어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모두.”

“당신이 잘 먹었던 것 같아 기분이 좋네. 사실은 단순히 제일 빨간 사과를 딴 것이었는데, 운이 참 좋았군.”

덱스터가 머리카락에 닿은 이리아의 손끝을 부드럽게 잡았다가 놓았다.

그가 난간 아래서 나와 두 팔을 넓게 펼쳐 보였다. 이리아는 루퀼렘 전통 옷을 입은 덱스터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화들짝 정신을 다잡았다.

팔을 펼친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누가 봐도 받아 줄 테니 뛰어내리라는 뜻이었다.

“당신이 없으니까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가.”

“지금 함께 있잖아요.”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해. 두 손으로 직접 느끼고 싶어.”

“내일 아침 방에 제가 없으면 사람들이 많이 당황할 거예요. 또 도망가 버렸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고…….”

“아침이 오기 전에 다시 올려줄게. 그러니까 내려와, 응?”

이리아가 몹시도 난감하다는 신음을 흘렸다. 서로를 느끼고 싶은 건 당연히 그녀도 매한가지나, 들켰을 때의 후폭풍을 견디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덱스터의 한 문장이 이리아의 마음을 다잡게 만들었다.

“조용히 넘기기엔 밤이 너무 길잖아, 이리아.”

흩날리는 하얀 머리에 반사되어, 달빛이 아름답게 조각조각 흩어졌다. 긴 루퀼렘의 의복이 날개처럼 펼쳐지기 무섭게, 덱스터의 품속으로 조그마한 선녀 하나가 폭 들이찼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곧장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이리아는 있는 힘껏 덱스터의 목덜미를 껴안고선,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찍어 눌렀다. 먼저 입술을 부딪친 이가 이리아였는데도, 언제나 그랬듯 통제권은 덱스터에게 넘어갔다. 그는 이리아가 어깨를 콩콩 두드릴 때까지 그녀의 안을 마음껏 헤쳤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이리아의 발끝에 이슬이 묻어 나왔다. 덱스터는 그녀의 여린 발바닥이 잔디에 익숙해질 때까지 손을 잡고 걸었다.

루퀼렘 왕국은 엘퀸즈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모든 방향에서 산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리아는 저 멀리서 희끄무레 드러난 산봉우리를 응시하며 조심스레 심호흡했다.

비센티움에서 루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워드 공한테 말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뭔데?”

“중간에 화내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덱스터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리아의 근심은 여전했다. 앞으로 꺼낼 이야기가 그의 마음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지 그녀로서는 감히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이리아의 손바닥에서 오랜만에 식은땀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덱스터가 손을 더 강하게 잡아 주었다.

대체 어떻게 이 말들을 정리해야 할까. 이리아는 잠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물을 잘못 방생하고 말았던 과거 루퀼렘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리아는 마물을 직접 상대하진 않았으나, 그 피해를 옆에서 지켜본 자였다. 그녀는 루퀼렘의 실수가 비센티움인들에게 얼마나 큰 화를 불러일으켰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끝냈을 때쯤에는 양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이리아는 차마 옆을 돌아볼 용기가 없어, 덱스터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혹시 하워드 공이 루퀼렘을 더 싫어하게 되는 걸까?’

덱스터의 마음속, 루퀼렘에 대한 반감이 심해질까 두려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었던 이야기다. 그는 지금껏 군 생활을 하며 마물들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은 고초를 겪었으니, 루퀼렘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해도 이리아는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공께서는 루퀼렘을 넘어서 나까지 미워할지도 몰라…….’

침묵은 그녀의 예상보다도 길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크게 뛰는 심장을 애써 버티고 있던 이리아는 끝내 옆을 돌아보고야 말았다.

하지만 덱스터가 분명 화가 났으리라는 생각과 달리,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덤덤했다.

“그, 부, 분명 화내실 줄 알았는데요…….”

“전후 사정을 안 후에도 기분이 그대로라면 거짓말이겠지. 감정이 조금 상하기는 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어. 마물을 상대하며 종종 이상한 느낌들이 들긴 했었거든.”

“혹시 루퀼렘이 더 싫어지셨나요?”

“그건……. 잘 모르겠군.”

이리아의 미간이 작게 일그러졌다. 잘 모르겠다니, 차라리 싫다는 대답이 훨씬 더 마음이 편했을 터다.

덱스터가 인상 쓰지 말라는 듯 엄지로 미간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그러나 이리아의 표정은 변함없었고, 덱스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거두었다.

“루퀼렘이 다른 나라 국민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사실 이는 비센티움도 마찬가지야. 전국시대부터 지금까지 비센티움은 수많은 왕국을 점령하고 황폐화했지. 사람들의 터전을 직접 건드렸으니, 어찌 보면 우리의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군.”

“비센티움의 죄가 더 크다고 해서, 루퀼렘의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루퀼렘은 비센티움 국민들에게 너무 몹쓸 짓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덱스터는 이리아의 새하얀 정수리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잡은 손을 놓았다.

익숙한 온기가 갑자기 사라지니 이리아의 심장이 절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덱스터의 옷자락으로 팔을 뻗을 때쯤, 정수리가 그의 옆구리에 폭 파묻혔다.

커다란 손바닥이 창백한 관자놀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리아는 다시 돌아온 온기를 가만 느끼고 있다가, 갓 태어난 짐승처럼 덱스터의 옆구리를 애타게 파고들었다.

정수리 위에서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이 나라에 너무 실망해 버렸구나.”

“이 나라뿐만이 아니라…… 저 스스로에게도 너무 실망했어요. 아무리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엄연한 한 나라의 군주인데, 그렇게 큰 문제도 모르고 살았었다니.”

“방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한 인생을 보냈었잖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제 머릿속 루퀼렘은 너무나도 도덕적이고 완벽한 나라였어요, 공. 그런데 실상은 아니더라고요.”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나라도 없어, 이리아. 신비성과 전설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지만, 루퀼렘도 결국에는 완벽하지 않은 하나의 나라였을 뿐이야. 하나의 ‘평범한’ 나라지.”

예전에는, 루퀼렘이 그 ‘평범한’ 나라가 아닌 줄 알았다.

속상해야 할 이는 덱스터인데도, 오히려 이리아의 속이 엉망으로 문드러졌다. 왜인지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오자, 이리아는 덱스터의 옆구리로 더 깊이 파고들며 그를 두 팔 가득 안았다.

이리아가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옷자락 위로 뺨을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그래도 마물과 관련된 문제는 꼭 해결하고 싶어요. 이 부분은 제가 따로 여왕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그래, 덱스터가 대답하며 그녀의 정수리를 헝클어뜨렸다.

이리아의 창백한 두 발은 언젠가부터 이슬이 묻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발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갔지만, 이리아는 온몸에 와 닿은 덱스터의 온기가 너무 좋아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덱스터의 배에서 웅장한 ‘꼬르륵’ 소리만 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다음 날 아침까지 옆구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 이런…….”

새까만 머리칼 아래 두 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작게 속삭였다.

“사실 최근 며칠 식사를 제대로 못 했어. 내일 뵐 에즈메릴다 여왕님께서 날 싫어하실 것 같아, 긴장되어서 음식이 안 넘어가더군.”

분명 충분히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그 음식들이 ‘긴장돼서 안 넘어갈’ 만큼의 양이었다니…….

이리아는 애써 속마음을 억누르고선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그녀가 덱스터의 옆구리를 조금 더 세게 꼭 껴안으며 말했다.

“여왕님께서 공을 싫어하시는 건 아니에요. 이 결혼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뿐이죠.”

“만일 내가 콘라드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아무래도 상황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놈은 눈치도 빠르고, 나보다 훨씬 능글맞잖아.”

이리아가 물끄러미 덱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둘은 함께 아주 긴 시간 방정맞은 비센티움 군인 한 명을 생각하다가, 동시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아무래도 더 안 좋아졌을 것 같은데요…….”

“음, 방금의 발언은 취소하지.”

이슬에 식은 발끝은 창백한 걸 넘어 보랏빛으로 변해 가는 중이었다. 이리아가 참지 못하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을 때, 덱스터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리아에게 가장 최근 생긴 습관 하나가 있다. 그녀는 덱스터보다 눈높이가 높아지면, 고운 손끝으로 그의 새까만 눈썹과 관자놀이를 매만지기 시작한다. 그럼 덱스터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맞춘다.

이리아는 잇새를 파고드는 살덩이를 힘겹게 맞아들이면서도, 두 다리를 덱스터의 허리에 둘렀다.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가 그의 바지 아래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깊은 입맞춤이 끝나고, 덱스터는 이어 이리아의 뺨 위로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흉터 가득한 손이 가슴께로 내려갈수록 둘의 호흡은 가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덱스터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거침없이 내려갔던 손은 이리아의 가슴 바로 앞에서 한참을 헤매는 중이었다.

“이 나라 매듭은 너무 복잡해.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군.”

그러다, 우드득-. 낯선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울렸다.

이리아의 시선은 절로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옷 매듭이 묶인 그대로 처참히 뜯겨 있었다.

“아…….”

둘은 동시에 당황한 신음성을 흘렸다. 이리아는 휑하게 드러난 앞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선, 매듭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이리아가 애교스럽게 코를 찡긋거리며 서로의 뺨을 비볐다. 그리고, 덱스터의 관자놀이 위로 무수한 키스를 남기며 속삭였다.

“하워드 공은 힘이 너무 좋아요.”

“마음이 급해서 그래.”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이 이리아의 왼쪽 가슴 위에 부드럽게 와 닿았다. 하지만 손이 본격적으로 아래를 향해 가기도 전에, 덱스터의 미간은 작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런. 당신, 몸이 너무 차가워.”

“그래도 침실은 안 돼요, 공. 무녀들이 은근히 눈치가 빨라서, 실수로 흔적이 남기라도 하면…….”

“……아.”

잠시 잊고 말았다. 이리아의 침실은 ‘여인과 신의 사자’만이 허락된 금남의 장소였었지.

덱스터의 잇새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시원하게 드러난 이리아의 앞을 보며 잠시 어찌할 줄 모르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으며 속삭였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올려 줄게.”

“자정 전까지 부탁드려요.”

후원은 고요했고, 주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둘은 더더욱 깊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덱스터의 왼손이 치마폭을 깊이 파고들수록 나오는 신음성도 높아졌다. 그의 손이 가져다주는 쾌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던 이리아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헐떡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내뱉었다.

“그……. 자국은 남기지 마세요.”

“조심할게.”

그리고 이 짧은 대화를 끝으로, 신음이 모든 소리를 잡아먹었다.

자정 전까지 올려 주겠다던 약속은 곧 둘 다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이리아는 새벽이 다다른 후에야 침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무녀들은 처참하게 뜯어진 매듭을 의아해했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언컨대, ‘선택받은 자들만이 대마법사에게 말을 걸 수 있다’라는 루퀼렘의 규율이 처음으로 고마운 순간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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