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이른 아침부터 말을 타야 하기에 걱정했건만,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했다.
어린 마야를 탈 순 없기에 이리아는 덱스터와 함께 퀸터 위에 올랐다. 퀸터는 오랜만의 긴 여정에 상당히 신이 난 듯했다. 그는 사람 둘을 태우고도 짜증 한 번을 내지 않았다.
지도로 볼 때는 실감이 안 났었는데, 비센티움은 확실히 루퀼렘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방대한 영토를 지닌 제국이었다. 덱스터의 영지에서 루퀼렘 국경선까지 가는 데 장장 3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군 생활을 오래 해 온 세 비센티움인들에게 3일의 여정은 별다른 큰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그 3일 내내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승마의 통증과 외박의 피곤함이 겹쳐, 만일 덱스터가 뒤에서 받쳐 주지 않았더라면 진즉 말 위에서 떨어졌을 터다.
이리아가 더 이상 못 타겠다고 눈물을 찔끔 흘릴 때쯤, 다행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루퀼렘을 탈출할 때 왔던 국경선에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콘라드가 능숙한 말솜씨로 국경 경비를 구워삶는 내내, 이리아는 덱스터와 함께 저 멀리 보이는 엘퀸즈 산맥을 구경했다.
국경선이 1년 전과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경비의 수였다. 한 성벽에서 두 나라가 함께 경비를 서는 데다가 경비병의 수도 훨씬 많아져, 콘라드가 그들을 구워삶는 데 조금 곤란함을 느끼는 듯했다.
경비병들과 아주 긴 시간 실랑이를 하던 콘라드는 어색하게 뒷덜미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그는 딱 봐도 무언가가 생각대로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그래?”
“일행 중에 루퀼렘 자국민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루퀼렘 쪽의 경계가 너무 심해. 이거, 자칫하다가 국경선을 못 넘을 수도 있겠는데?”
“아마 제가 사라진 탓에 왕실 측에서 국경 경비를 강화했을 거예요.”
이리아는 어느덧 총을 꺼내 든 비센티움 경비대를 가볍게 지나쳐 곧바로 루퀼렘인들 앞에 섰다. 루퀼렘 국경 경비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둘러싸인 이리아에게 더욱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뒤에서 총을 넣으라고 만류하는 덱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는 그녀의 가슴 앞에 창을 들이댄 두 루퀼렘 경비를 빤히 응시하다가, 로브를 벗었다.
[루퀼렘을 지휘하는 성의 주인에게 알려라.]
티 하나 없이 새하얀 머리카락이 허리께에 부드럽게 떨어졌다.
[여신의 현신이 돌아왔다고.]
두 경비병은 곧바로 창을 거두었다. 이미 에즈메릴다 여왕에게 언질을 받았던 듯, 그들은 루퀼렘의 예를 갖추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사라졌던 대마법사의 등장으로, 상황은 바로 종결되었다.
***
보름달과 초승달이 함께 자리한 영원한 새벽의 하늘.
콘라드와 줄리에타는 두 개의 달이 뜬 루퀼렘의 하늘에서 도통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난생처음으로 영원한 새벽을 본 두 비센티움인들은 성에 들어갈 때까지 넋을 잃은 채였다.
돌아온 대마법사를 가장 먼저 맞은 이는 성의 경비병들이었다. 국경에서 보낸 비둘기 덕분에 이리아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경비병들은 당황하지 않고 능숙히 인사를 건넸다.
루퀼렘 성은 변한 부분 없이 그대로였다. 비록 1년 넘는 시간을 떠나 있었지만, 이리아는 여전히 익숙한 대문을 지나쳤다.
돌아온 대마법사를 두 번째로 맞은 이는 루 아휜이었다. 그가 예를 갖추어 이리아의 손등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정중한 루퀼렘의 인사였다.
[아가씨.]
[루.]
눈물로 장식했던 이별이 무색하게, 둘의 인사는 자연스러웠다.
루는 서둘러 루퀼렘으로 오게 된 이리아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듯했다. 그가 이리아의 로브를 받아 들며 말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설마 여왕님께서 제 이야기를 듣고 아가씨께 곧바로 새를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원래 성미가 그리 급하시지 않은데, 내가 비센티움에서 약혼을 했다는 소식에 화가 많이 나셨나 봐.]
[이야기를 들을 때는 예상외로 상당히 담담하셨었어요. 화가 크게 나신 것 같지는 않으시던데요?]
[나셨어. 서신을 어찌나 세게 눌러 쓰셨는지, 글자 중간중간에 잉크가 몇 번이나 터져 있더라.]
[아, 그랬군요…….]
루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리 200년을 넘게 산 성기사단장이라 해도, 그에게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은 참 대하기 힘든 존재였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기사들이 퀸터를 포함한 말들을 성 뒤편의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두 번째 방문인 퀸터마저도 루퀼렘의 환경은 여전히 무서운 듯했다. 그는 기사들의 손길을 처음에는 필사적으로 거부하다가, 덱스터가 달랜 후에야 몸을 움직였다.
어느 나라이든 한 국가의 원수가 사는 장소는 검문검색이 철저한 법이다. 덱스터는 몸수색 과정에서 총알을 포함한 모든 무기를, 콘라드는 담배를 내놓아야 했다.
콘라드는 담배를 뺏기자마자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 덱스터의 루퀼렘 첫 방문 때는 술과 담배까지는 압수하지 않았었는데, 8년 새에 관리가 더 엄격해졌다.
루퀼렘 성을 구성하는 모든 건물은 보안을 위해 입구와 출구가 따로 분리되어 있다. 루와 이리아가 입구에 가까이 다가가자, 기사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루퀼렘 성의 가장 넓고 긴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대마법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무녀와 기사들은 일제히 복도 양옆에 서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복도 전체를 울렸다.
[왕국의 유일한 대마법사, 다섯 뿔 여신의 현신을 뵙습니다.]
당연히,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본 세 비센티움인들은 다 함께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리아는 콘라드가 ‘작은 대왕’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루퀼렘의 대마법사가 예상보다 더 ‘신’적인 존재로 대우받아 상당히 충격받은 듯했다.
복도 끝의 계단을 오르자, 덱스터가 과거 감탄했던 천장의 그림이 펼쳐졌다. 구름 속에서 다섯 뿔의 여신과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는 그림이었다.
콘라드와 줄리에타는 루퀼렘에 단 한 번도 와 보지 않은 비센티움인들이기에, 천장 위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 문화를 참 신기해했다.
입에 파리가 들어갈 만큼 넋을 놓은 채 그림을 응시하던 콘라드는 곧 이리아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물었다.
“저거 설마 너를 그려 놓은 거?”
“네.”
“오오, 너랑 완전 똑같은데? 루퀼렘인들은 저런 그림 그릴 때 마법으로 붓이랑 물감이랑 막 날리면서 그리나?”
“화가들이 줄에 매달려 ‘평범하게’ 그렸습니다.”
헉. 콘라드가 식겁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루 아휜이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비센티움어를 할 수 있는 자들이 몇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말을 아끼시죠, 메이필드 경.”
콘라드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루 아휜을 노려보다가, 은근슬쩍 줄리에타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처음에는 루 아휜이 비센티움어를 할 줄 알아 경계하는 듯했지만, 아니었다.
“야. 쟤 내 이름 어떻게 아냐……?”
그냥 자기 이름 아는 게 이상했던 거다.
루퀼렘의 무녀들은 이리아가 어딜 가든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볼일을 보러 갈 때도 꼭 두 명의 무녀가 함께한다는 말을 듣자, 세 비센티움인들은 끝내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서신 때문에 온 건데도, 막상 루퀼렘 성안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리아가 봉인석을 풀어 주는 루 아휜에게 물었다.
[에즈메릴다 여왕님께서는?]
[아침 일찍 성을 나서셨어요. 신전 건설과 관련하여 서부에 사소한 문제가 생겼거든요. 곧 복귀하실 겁니다.]
[그래. 우리가 예상보다 너무 일찍 도착했나 보다.]
봉인석을 풀자마자 돌아오는 마법의 힘이 느껴졌다. 이리아는 어색함에 주먹을 몇 차례 쥐었다가 펴 보길 반복했다.
봉인석은 비센티움으로 복귀할 때 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선, 루 아휜은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는 여전히 일이 참 많은 남자였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과 더불어, 이리아 아델리어도 명실상부한 성의 주인이다. 그러나 여왕과 달리, 이리아는 성안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그녀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기도실과 알현실, 교실, 그리고 침실뿐이다.
콘라드와 줄리에타는 성 구경을 위해 헤어졌지만, 덱스터는 이리아를 끝까지 따랐다. 무녀들이 앞을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그는 아마 이리아의 침실까지 따라 들어갔을 터다.
[여인과 신의 사자만이 허락된 장소입니다. 이곳부터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덱스터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무녀들은 그의 거대한 체구 때문에 한껏 긴장한 듯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리아는 침실에 평생을 갇혀 살았던 끔찍한 기억이 있었다. 덱스터가 곁을 떠나면 혹시 또 갇히게 될까, 이리아가 걱정이 흠뻑 담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덱스터는 그런 이리아에게 부드럽게 웃어 준 후, 창백한 손목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걱정하지 마. 멀리 안 갈 거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걱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루퀼렘 성에서는 선택받은 자들만이 이리아에게 직접 말을 걸 수가 있다. 이 선택받은 자 중에는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 성기사단장 루 아휜은 있으나 무녀들은 없기에, 그들은 이리아의 방을 정돈하면서도 철저히 침묵을 유지했다.
‘이런 침묵은 참 오랜만이네.’
무녀들이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왜인지 비센티움에서의 하녀들이 참 그리워졌다.
모두가 나간 후, 이리아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슬쩍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감회가 새로워…….’
이리아는 그녀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온통 새하얀 침실을 쭉 둘러보았다.
1년이 넘도록 사용하지 않은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침대보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창가의 꽃다발은 싱싱했다. 루 아휜과 무녀들이 매일 관리를 해 준 덕분이었다.
전에는 비센티움이 잠시 방문하는 나라 같았다면, 이제는 루퀼렘이 잠시 방문하는 나라 같다. 이리아는 평생을 살았던 이 거대한 성이 더 이상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벽의 그림들을 구경할 때, 어딘가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냄새였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이리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종이가 타는 냄새……?’
냄새는 후원 부근 난간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아가 조심스레 걸어가 난간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곳에는 8년 전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