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콘라드는 이리아가 낯설었지만, 다행히 불편해하지는 않는 듯했다. 이리아는 처음에는 꽤 예의를 차렸으나, 시간이 갈수록 거만해지는 그의 태도를 보고 내심 안도했다.
돌이켜 보면 전쟁터에서도, 저택에서도 콘라드에게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다. 이리아는 침실 서랍장 안의 라이터와 엽서들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편지와 엽서를 보내 주셔서 고마워요. 많은 힘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 오빠밖에 없다고 했잖아, 인마.”
콘라드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자,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란 이리아는 황급히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곧, 이제 굳이 머리를 정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리아는 더 이상 빨간 곱슬머리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원래의 새하얀 머리칼은 겨우 몇 번 헝클어뜨렸다고 해서 전처럼 제멋대로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콘라드는 어색하게 허공을 더듬거리는 두 손을 보자마자 낄낄 웃었다. 그는 문밖의 인기척을 한번 슬쩍 확인한 후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이리아에게 가까이 붙었다.
“야, 인제 와서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난 사실 너희 둘 약혼이 길게 못 가고 파투 날 줄 알았어. 덱스터 하워드가 예전부터 부인을 가질 인물은 절대로 아니었거든.”
“……하워드 공이 왜요?”
“무뚝뚝하고, 눈치 없고, 완전 거칠잖아! 덱스터 하워드를 거쳐 간 모든 군인은, 선임이든 후임이든 상관없이 전부 그놈이 결혼은 절대로 못 할 거라고 했었다고!”
“눈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하워드 공은 딱히 무뚝뚝하지도 않고, 거칠지도 않은데요……?”
“이야, 저 콩깍지 대단한 거 보소…….”
콘라드가 징그럽다며 혀를 찼다. 눈앞의 이 루퀼렘 여자는 사랑에 눈이 멀어 전쟁터에서의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머리카락은 그렇다 쳐도, 루퀼렘인 특유의 황금빛 눈동자는 제아무리 콘라드 메이필드라도 참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콘라드는 이리아의 신비로운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냅다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너 말이야, 덱스터 하워드가 과거에 얼마나 성격이 더러웠는지는 알고 있냐?”
“그리 모범적이지만은 않으셨었다고 루시어스 씨께 들었어요.”
“모범적이지 않은 수준이 아니야. 그놈은 순 깡패였다고.”
이리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콘라드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졌다. 너무나도 심술궂지만, 그만큼 기쁨이 잔뜩 깃든 미소였다.
콘라드는 귀를 쫑긋 세운 이리아 앞에서, 생애 최고로 행복한 표정이었다.
“잘 들어. 이건 덱스터 하워드가 한창 루퀼렘을 두고 왈가왈부하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고요한 방 안 가득히, 콘라드의 목소리가 비밀스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콘라드는 군 사관학교를 거친, 소위 ‘엘리트’ 출신의 군인이지만, 덱스터는 아니었다. 현장에서 굴러 차근차근 입신출세한 그는 어렸을 적부터 군에 몸을 맡겨, 십 대 시절에도 직급이 퍽 높은 편이었다.
콘라드의 말에 따르기로는, 같은 군인들 사이서도 출신에 따른 암묵적인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고 한다. 귀족 가문의 인물이 당연히 가장 크게 대접받고, 그 뒤를 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이 따른다.
군부대의 뿌리 깊은 학연 덕분에 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에게는 쉬운 사무업이, 현장 출신의 군인들에게는 몸을 써야 하는 고된 업무가 배정되기 일쑤였다. 업무의 급이 다르다 보니, 사관학교 출신 군인들이 현장 출신을 무시하는 분위기는 군부대 내에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현장 출신의 군인은 대부분 무시당했지만, 그중에서도 덱스터 하워드는 특히나 더 그랬다. 그의 군대 내 직급은 높았음에도, 황실에게 찍혔다는 추문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덱스터가 있던 부대의 사령관은 학연을 철저하게 따지면서도 황실의 눈치를 살피던 속물이었다. 사령관의 편애를 받던 사관학도들은 덱스터를 대놓고 깎아내렸고, 이로써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덱스터와 사관학도들의 갈등은 점점 더 쌓여 가, 끝내 사소한 업무 차질로 펑 터지고 말았는데…….
“……그래서요? 그때 하워드 공이 뭘 어쩌셨는데요?”
“제일 나이가 많던 사관학도의 얼굴에 죽빵을 날렸지.”
“……네?”
“그 선배는 코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재건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어. 눈 아래 엄지만 한 흉터도 생겼지. 죽지 않은 게 정말 기적이었다니까?”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이리아는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덱스터의 십 대가 파란만장하다는 사실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이 충격을 피하기는 불가능했다.
덱스터 하워드 덕분에, 그와 함께한 군인들은 평생 안줏거리가 떨어질 일 없었다. 십 대의 덱스터는 사건을 몰고 다니는 싸움꾼이었고, 루퀼렘에서 이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절대로 배려를 보이지 않았던 ‘천하의 개차반’이었으니.
덱스터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약간 휘어 있는 이유 또한, 사관학도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부러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리아는 줄곧 그 새끼손가락이 고된 군부대 생활 중 다쳐서 휘었다고 알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다.
‘패, 패싸움…….’
이리아는 약혼자의 과거 이야기를 들을수록, 심오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리아와는 상관없이 콘라드는 물을 만난 물고기보다도 더 신이 난 상태였으니. 그는 점점 기묘하게 변하는 이리아의 표정이 너무나도 흥겨운 듯했다.
그리하여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덱스터 하워드 그 새끼는 말보다 주먹이 빠른 놈이야. 사관학교 출신들은 다 재수 없게 생겼다며 언젠가 나와도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놈이 이 잘생긴 얼굴을 아주 피떡으로 만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콘라드의 문장은 급히 입을 틀어막은 손 때문에 끝을 맺지 못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성큼 다가온 덱스터가 한껏 창백해진 얼굴로 콘라드의 얼굴을 쥐고 있었다. 바람결에 엉망이 된 머리칼이 그가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손수 증명했다.
콘라드가 능글맞게 웃으며 덱스터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왜, 네 약혼자에게 흑역사가 까발려지니까 쫄리냐?”
“입 다물어.”
콘라드의 사악한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한 여자의 눈치를 살피는 덱스터 하워드라니, 살다 보니 이런 진귀한 구경도 다 한다.
새까맣게 탄 콘라드와 한자리에 있으니, 이리아의 창백한 피부가 도드라졌다. 덱스터는 다른 때보다 더 인형 같아 보이는 그녀를 조용히 흘끔거렸다.
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은 건지. 콘라드가 과거 이야기를 떠벌린 건 분명한데, 겪어 온 사건이 하도 많다 보니 대체 어느 부분을 떠벌렸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한껏 가늘어진 눈초리로 덱스터를 노려보며, 이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패싸움이 일상이셨나요?”
“10년도 더 된 과거야, 리리.”
“웃기고 있네. 20대 초반까지는 맨날 싸우고 다녔으면서.”
“그 입 다물라고 했어.”
“개과천선한 거니까 자랑스럽게 생각해, 새꺄. 개과천선 그거, 아무나 쉽게 못 하는 거란다?”
덱스터는 콘라드의 면전에 온갖 쌍욕을 뱉고 싶었으나, 이리아 때문에 애써 참는 듯했다.
그는 가져온 와인과 잔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선, 의자를 바짝 끌어와 앉았다. 술만 전해 주고 갈 것만 같았던 놈이 갑자기 궁둥이를 붙이니, 콘라드가 당황하여 손을 휘저었다.
“‘이리아 아델리어’ 씨와 이제야 슬슬 제대로 된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하니까, 불청객은 저리 썩 꺼져 주겠어?”
“네가 나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줄 알고? 절대 못 일어나.”
“미래 부인이 될 여자는 네 과거를 알 자격과 의무가 있단다, 이 양아치야. 옆에 있는 남자가 얼마나 불량했었는지는 확실하게 잡고 가야 하지 않겠냐?”
지금껏 하워드 공이 자신의 십 대 시절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은 이유가 다 있었구나. 이리아는 양껏 실눈을 지은 채로, 그를 새초롬하니 째려보았다.
“철없던 십 대 시절에 루퀼렘인의 목을 다 따 버리겠다고 했다더니…….”
“네 주먹이 죄다, 양아치 새꺄.”
덱스터가 한숨을 푹 내쉬며 와인을 땄다. 지금까지 응어리가 많이 쌓인 콘라드 메이필드의 고자질은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고자질쟁이는 콘라드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들어온 줄리에타도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과거 이야기에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리아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하워드 공의 과거에 대해서는 저도 꽤 많이 압니다.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가 많아서요.”
“이런 젠장…….”
덱스터의 두 귀는 어느덧 건들면 터질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이리아 아델리어 앞에서 흑역사가 까발려지는 경험은 두 번 다시 못 할 짓이며, 과거는 완벽하게 청산할 수 없다는 교훈을 몸소 깨닫는 중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하워드 공을 타고난 싸움꾼보다도, 지독한 흡연가로 더 잘 알고 계시더군요. 하도 담배를 자주 피워서, 한동안 별명이 ‘공장’이었다고…….”
“제발 그 정도만 해.”
“나중에 금연을 할 때는 너무 성격이 더러워져서, 모두가 ‘또라이’라고 부르면서 피해 다녔다는 이야기도…….”
“그 정도만 하라고 두 번째로 말하고 있어.”
“부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실종 신고가 들어와 군인들이 주변의 온 숲을 뒤졌더니, 만취한 상태로 지뢰밭 한가운데서 자고 있었다는 소문도…….”
덱스터는 끝끝내,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이리아는 뒤늦게 새까만 머리칼 아래 가려진 두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위아래로 울렁이는 목울대를 가만 바라보다가, 덱스터와 손을 포갰다.
“이리아…….”
천천히 드러난 덱스터의 눈가는 그의 귀만큼이나 새빨갰다. 너무나도 여린 소년 같은 모습에, 잠시 넋을 잃었던 이리아는 정신을 되잡고선 그의 손을 더욱 세게 감쌌다.
이윽고, 덱스터의 귓전에 와 닿은 목소리는 변함없이 곱고 아름다웠다.
“위험하니까 지뢰밭 한가운데서는 주무시지 마세요.”
“당신이 당부하지 않아도, 앞으로는 절대로 그럴 일 없어.”
“주먹도 함부로 쓰지 마시고요.”
“다 옛날이야기라니까, 이리아. 직위를 받기 전 시절에는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
새까만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덱스터는 한없이 처량한 얼굴을 하고선 어깨를 수그렸다.
“설마 나한테서 오만 정 다 떨어진 거야……?”
“그럴 리가요.”
이리아가 흉터들이 가득한 손등 위로 살포시 제 입술을 찍어 눌렀다.
옆에서 둘을 줄곧 지켜보고 있던 줄리에타와 콘라드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콘라드는 헛구역질을 하다가, 다급히 와인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병을 비워 낸 그가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남녀를 번갈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너희 둘은 나한테 평생 감사해야 해! 너희 사이에 껴서 내가 얼마나 맘고생을 했었는데, 이 나쁜 놈들아!”
이리아와 덱스터가 함께 콘라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콘라드와 덱스터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리아는 곧, 참지 못하고 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록 겉모습은 전과 조금 달랐지만, 다시 한자리에 모인 네 사람은 군부대에서의 과거를 회상했다. 회상 속에서 제일로 고통받은 이는 당연히 콘라드 메이필드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텅 빈 와인병도 하나둘씩 늘어 갔다. 콘라드가 새로운 병을 따며 덱스터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네 약혼녀가 루퀼렘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래.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대체 어떻게?”
이리아와 덱스터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선, 동시에 웃었다. 8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는 꽤 길었지만, 못 할 이유는 없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루퀼렘으로 향한 여정을 시작해야 하나, 방 안은 늦은 밤까지 시끌벅적했다.
거짓된 ‘씨시 힐데어’의 모습을 버리니, 이리아는 드디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