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4/109)

93화

18.

쿵-.

두꺼운 가죽으로 만든 여행 가방이 땅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여행 가방을 내려놓은 줄리에타는 나무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인상을 확 찌푸렸다.

“몹시 오랜만이군요.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건만, 이렇게 또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네요, 콘라드 메이필드.”

“단발이 더 잘 어울린다, 야. 지금이 훨씬 예뻐.”

“함부로 제 외모를 평가질하지 마시죠. 매우 불쾌합니다.”

“거참, 쌀쌀맞은 건 여전하네…….”

콘라드의 잇새서 매캐한 연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오랜 여행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피부는 햇볕에 타 전보다 까무잡잡했다.

여행하는 내내 이발도 하지 않았는지, 머리카락 길이는 단발로 잘라 낸 줄리에타의 것과 비슷했다. 콘라드는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줄리에타의 얼굴을 보며 낄낄 웃다가, 담뱃불을 짓이겼다.

그가 마지막 연기를 내뿜어내자마자, 멀리서부터 익숙한 인영이 등장했다.

“이야-, 우리 주인공께서 오셨구먼?”

인영의 정체는 덱스터 하워드였다.

덱스터가 오랜 여행으로 인해 상거지 꼴이 된 콘라드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상당히 하고픈 말이 많아 보였지만, 품 안에 냅다 거대한 도자기를 안겨 준 콘라드 때문에 인사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 콘라드의 곁에서는 독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덱스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일렀다.

“이건 저 아랫동네서 되게 유명한 장인이 만든 도자기란다? 되게 비싼 거니까 하루에 한 번씩 꼭 닦아 주고, 도둑놈 심보가 가득한 네 몸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도록 해.”

“아, 그래. 어머니의 방에 둘 화병으로 써야겠어.”

“뭐? 화…… 화병?! 야, 이건 겨우 화병으로 쓸 정도의 수준 낮은 도자기가 아니야, 새꺄!”

줄리에타는 콘라드의 어깨 뒤에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다지 정중한 인사는 아니었으나, 다짜고짜 도자기부터 안긴 콘라드 메이필드와 비교하면 예의가 철철 흘러넘치는 급이다.

담배를 다 피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콘라드가 새로운 장초를 꺼내 잇새에 물었다. 그는 불을 붙이기 전에 덱스터의 등 뒤에 숨어 우물쭈물하는 여인을 라이터로 가리켰다.

로브를 깊게 눌러쓴 그녀는 손끝조차 보이지 않도록 온몸을 꽁꽁 감싼 채였다.

“그런데 네가 도둑질한 약혼자는 나 없는 새에 수두라도 걸렸냐? 오랜만에 만났는데, 도통 얼굴을 안 보여 주는군.”

덱스터가 괜찮다는 듯 이리아의 정수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리아는 이후에도 한동안 덱스터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머뭇대다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콘라드는 잇새에 물었던 장초를 돌바닥에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리아의 진짜 모습을 본 콘라드와 줄리에타의 표정은 참 가관이었다. 이리아는 그토록 기묘한 인간의 표정은 난생처음이었으나, 둘을 향해 차마 웃어 보일 수는 없었다.

콘라드가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두 분 모두 오…… 오랜만이에요.”

원래의 머리칼 색으로 돌아온 이리아가 최근 깨달은 점 하나가 있다. 더도 덜도 말고 가만히 기다려 주기만 하면, 비센티움인들은 어떻게든 자기 혼자서 충격을 극복하고 평소대로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충격을 극복해 내는 속도는 줄리에타 엘로이스가 조금 더 빨랐다. 착각이겠지만, 그녀는 이리아의 출신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듯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리아가 숨겨 왔던 더 큰 진실은 따로 있었다.

“루퀼렘 왕국의 군주, 여신을 받드는 왕국민의 대마법사시니 욕설은 참아 주었으면 좋겠군.”

이번에는 줄리에타까지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투로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실은 진실이었고, 이리아는 급기야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 콘라드 때문에 두 눈을 꾹 감고야 말았다.

참 다행스럽게도, 콘라드는 루인과 같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두 손을 바들바들 떨다가도 담배를 태우며 찬찬히 진정해 갔다.

그저 먼 시골 출신인 줄 알았던 말괄량이 아가씨가 실은 수배지 속 마법사였다. 그런데 이도 모자라서, 루퀼렘인들 사이서 신처럼 받들어지는 대마법사라니.

콘라드 메이필드는 제자리서 세 장초를 한꺼번에 피우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전쟁터에서 ‘씨시 힐데어’인 줄 알았던 이리아에게 아무 생각 없이 내보였던 언행들이 스멀스멀 떠오르며, 오한이 서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희끄무레하지만, 분명 군인들과 함께 루퀼렘 왕실을 욕한 적도 있었다.

콘라드는 담배 석 대를 모두 깔끔하게 태우고 난 후에야 비틀비틀 저택 내부로 들어왔다.

저택에서도 아주 긴 시간 침묵을 지켰던 그가 이리아에게 한 첫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 나…… 난 이제 왕실 명예훼손죄로 구, 군 교도소 가는 건가? 외…… 외국인도 교도소 가?”

한데 옹기종기 모여 도자기를 구경하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콘라드의 질문에 대답한 이는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한 덱스터였다.

“그래. 넌 무조건 무기징역이야, 콘라드.”

“야, 무기징역이라니……. 그냥 농담하는 거지?”

“다, 당연히 농담이죠. 부단장님이 루퀼렘에서 교도소를 갈 리가 없잖아요.”

이후에도 이리아가 수차례 그럴 리 없다고 안심시켰지만, 콘라드는 쉽사리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덱스터가 장난으로 언급한 ‘무기징역’의 파장이 꽤 컸던 탓이다.

덱스터를 제외하고는, 콘라드 메이필드와 줄리에타 엘로이스가 이리아의 신분을 안 최초의 비센티움인들이었다. 둘은 이리아와 함께 비밀스레 루퀼렘 국경을 넘을 계획이었다.

이리아가 루퀼렘에 돌아가기로 한 이후, 덱스터는 곧장 콘라드에게 서신을 부쳤다. 그가 아는 인물 중에서는 콘라드 메이필드가 제일 입이 무겁고, 능력이 좋은 자이기에 동행자로서 딱 알맞았다.

덱스터는 문밖의 인기척을 다시 한번 더 살폈다. 그가 의자에 대충 걸터앉은 콘라드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너와 나, 둘 중 한 명은 항상 이리아와 함께 있어야 해. 그럴 일은 없길 바라지만…… 루퀼렘인들이 이리아를 성안에 다시 감금할 가능성이 있어.”

“대마법사를 일평생 성안에 감금했었다니, 그쪽 왕실도 이쪽만큼이나 문제가 참 많구먼?”

하지만 우리에게는 카즈웰 4세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 절대로 이쪽을 이길 수는 없지. 콘라드가 낄낄 웃으며 덧붙였다.

이제는 한배를 탄 이들이었기에, 이리아는 그녀가 루퀼렘을 빠져나온 대강의 경위를 이야기해 주었었다. 콘라드는 그제야 이리아가 왜 라이터를 알아보지 못했었는지 이해했고, 줄리에타는 비센티움의 도심 거리에서 처음으로 만난 그녀가 왜 갈 곳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줄리에타는 조만간 마법을 배우기 위해 아즈웬 독립 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이리아도 성을 버린 후 아즈웬의 국경을 넘으리라는 그녀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으나, 무리해서라도 함께 루퀼렘에 가고 싶었다. 루퀼렘이 집대성한 마법학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루퀼렘 국경으로 출발하는 날은 바로 내일 아침. 아무리 좋은 군마를 몬다고 해도, 국경까지 가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일찍이 출발하는 게 좋았다.

황태자비가 임신 상태였으나, 이리아는 여전히 카즈웰 4세의 관심사 안이었다. 넷은 카즈웰 4세의 성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센티움 황실 몰래 국경선을 넘기로 했다.

콘라드와 덱스터는 국경선 군인들과 친분이 있었고, 이리아는 원래 루퀼렘인이기에 국경선을 넘는 과정은 쉬웠다. 그러나 문제는 줄리에타였다.

줄리에타의 아버지는 루퀼렘 방면 국경 총사령관이다. 줄리에타는 현재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는데, 만일 국경선을 넘는다면 그녀의 행보가 아버지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안전하게 국경을 넘기 위해서, 줄리에타만은 따로 위장 신분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렇게 덱스터와 줄리에타가 신분을 위장하러 방을 떠난 사이, 이리아는 콘라드와 단둘이서 오도카니 남게 되었다.

이리아의 목덜미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이, 이럴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로, 분위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오랜만에 만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서로의 겉모습이 변해 콘라드가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콘라드는 어깨에 닿을 만큼 길어 버린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큰절이라도 올릴까?”

“저, 저는 절은 안 받아요.”

“그럼 기도를 할까? 아, 혹시 나는 비센티움인이라서 안 되나?”

“부탁이니 제발 하지 마세요. 부담스럽고 싫어요.”

그가 비센티움인이라는 사실을 떠나, 콘라드에게 기도를 받는 상상을 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절대로 받으면 안 되는 기도를 받는 느낌이랄까.

저택에 온 이래로 벌써 한 갑을 다 태웠으면서, 콘라드는 담배가 당기는 듯 라이터를 손안에서 굴렸다. 그가 답지 않게 짐짓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루퀼렘인스럽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정말로 루퀼렘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머리카락 색까지도 바꾸었는데, 알면 오히려 이상한 거죠.”

“그럼 이제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씨시 힐데어’는 가짜 이름일 거 아니냐.”

“진짜 이름은 이리아 아델리어예요.”

“……‘이리아 아델리어’님?”

“‘님’자는 빼고요.”

콘라드는 급기야 라이터를 위아래로 던지기를 반복하다가, 땅이 꺼지도록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이리아는 달군 쇠로 만든 가시방석에 궁둥이를 붙인 기분이었다.

존댓말을 쓰지 않은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이리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콘라드가 자신을 구경하도록 두었다.

원래 모습을 밝힌 이후로, 저택의 비센티움인들은 이리아를 자주 힐끔거렸다. 루 아휜이 저택에 왔을 때도 그들은 루퀼렘 성기사들을 신경 썼으나, 이리아만큼이나 오래도록 이목을 주진 않았었다.

이리아는 힐끔거리는 사용인들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구경하는 콘라드가 훨씬 나았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에 닿는 그의 시선이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혹시 부단장님도 예전의 하워드 공처럼 내 피부를 만져 보는 건 아닌지.’

이리아가 과거 루퀼렘 성 난간 아래서 담배를 피우던 덱스터를 기억하며 뺨을 붉혔다. 콘라드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한 그녀의 뺨을 신기한 듯 응시하다가, 은근슬쩍 다가가 속삭였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 대단한 루퀼렘의 대마법사가 대체 왜 덱스터 하워드 따위와 결혼하는 거냐……?”

“제가 하워드 공을 사랑하니까요.”

웩-.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콘라드는 그만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그가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세상이 망하려고 하는구나…….”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기에, 이리아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힘껏 아랫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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