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3/109)

92화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하녀들이 전단을 만들어 복도에 뿌리기라도 했는지, 이리아가 루퀼렘인이라는 사실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이미 온 저택에 알려져 있었다.

이제 소문은 곧 카즈웰 4세의 귀에도 들어갈 거다. 그는 임신한 황태자비에게 신경이 쏠려 당장은 이리아를 어찌하지 않겠지만, 루 아휜이 언급했듯 문제는 10개월 후였다.

10개월짜리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덱스터와 이리아는 어떻게든 카즈웰 4세가 루퀼렘 영토 욕심을 버리고, 이리아를 신경 쓰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카즈웰 4세는 이리아가 인생을 살며 만나 온 장애물 중 가장 힘들고 벅찬 남자였다. 권력과 탐욕, 그리고 황위에 대한 갈망이 그를 무시무시한 적수로 빚어냈다.

루 아휜은 200년이 넘은 세월을 살아온 마법사인 만큼 지식이 풍부했고, 꾀가 많았다. 그는 카즈웰 4세를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의 두뇌를 가진 자였지만, 별다른 대책도 남기지 않은 상태로 비센티움을 떠났다.

이리아는 루 아휜이 마치 어릴 적의 그녀에게 숙제를 남겨 주었던 것처럼, 비센티움에 남은 그녀에게도 커다란 숙제를 남긴 기분이었다. 그는 이리아가 카즈웰 4세를 잘 상대하리라고 단단히 믿는 듯했다.

덱스터와 이리아는 집무실에 나란히 앉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머지않아, 덱스터가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생각해 둔 방도가 몇 있기는 한데…….”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소음이 두 남녀의 귓전을 울렸다.

깜짝 놀란 둘은 동시에 소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랗고 새하얀 독수리 한 마리가 집무실 바깥 창틀에 앉아 유리를 긁고 있었다.

독수리는 부리마저도 새하얬다. 흔치 않은 새의 외양에 덱스터가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와 달리 이리아는 독수리가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아는 모습이었다.

“루퀼렘 왕실에서 보낸 아이예요.”

이리아가 루퀼렘을 떠난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독수리는 그녀를 알아본 눈치였다. 그는 다리의 서신이 풀릴 때까지 잔뜩 어리광을 부리다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뱉어 내며 포르르 날아갔다.

루 아휜이 루퀼렘으로 돌아간 이래로 하루 만에 온 만큼, 서신의 내용은 간결했다.

<루 아휜에게 전부 들었다. 내 직접 약혼자의 얼굴을 좀 보아야겠구나.>

종이의 뒷면에도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회피할 생각은 말거라.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잖니.>

어느샌가 이리아의 옆에 와 서신을 함께 들여다본 덱스터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이리아는 새하얀 독수리가 남기고 간 깃털을 주운 후에,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에즈메릴다 여왕님의 필체예요. 여왕님께서도 끝내 모든 진실을 알고 말았네요.”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이 직접 약혼자의 얼굴을 보겠다는 말은 곧, 덱스터와 함께 루퀼렘으로 돌아오라는 의미였다. 펜을 세게 눌러쓴 것으로 보아, 여왕은 짧은 서신을 쓰면서도 올라오는 분노를 참은 듯했다.

‘루……에게 큰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설마 여왕이 루 아휜을 어떻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리아는 잔뜩 번진 잉크 자국들을 확인하자마자 속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아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궁둥이를 붙였다. 한때는 덱스터를 사랑하게 되면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그리 두질 않았다.

날이 좋아 집무실 천장 위로 창밖 나무들의 그림자가 졌다. 이리아는 산들바람에 가벼이 흔들리는 그림자를 구경하다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덱스터는 창틀에 걸터앉아 에즈메릴다 여왕이 보낸 서신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리아가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고 난 후에야 반응을 보였다.

이리아는 아주 잠시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워드 공, 저희의 결혼을 공공연하게 만들면 아무리 카즈웰 4세라도 쉽사리 전쟁을 일으킬 수 없지 않을까요?”

“공공연하게 만든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군.”

“제가 루퀼렘의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예요. 그럼 하워드 공작이 루퀼렘인과 결혼한다는 세간의 소식이, 하워드 공작이 대마법사와 결혼한다는 소식으로 바뀌겠죠.”

만일 루퀼렘의 군주가 제국에서 피살당한다면, 비센티움 황실은 비판의 여론과 나라 간의 갈등을 피할 수 없을 거다.

원래 이리아는 자신의 인종은 밝힐지언정, 신분을 밝힐 계획은 없었다. 대마법사와 외국인의 결혼 소식은 루퀼렘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데다가, 이제는 의미가 없는 신분을 결혼 후에도 사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즈웰 4세를 막기 위해서라면, 이제는 의미 없는 신분조차도 사용을 해야 한다.

카즈웰 4세는 황태자의 자리에 오른 이래로 계승권을 가진 제 혈육들을 은밀하게 처리해 왔으며, 국민 여론에 지극히 민감한 모습을 보였다. 국민의 여론 때문에 계획했던 전쟁을 뒤엎은 적도 적지 않았다.

카즈웰 4세가 영토 욕심이 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는 사실 영토보다도 안정적인 황위 계승을 더 중요시하는 자였다. 세계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국민과 결혼한 루퀼렘의 군주를 건들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내가 루퀼렘의 군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루퀼렘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해…….’

증명 없는 말을 비센티움인들이 믿을 리 없다. 대마법사라는 신분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리아는 그녀의 출생과 신분을 증명해 줄 루퀼렘의 마법사들이 필요했다.

루퀼렘은 이리아의 고향이었고, 그녀는 제 고향을 그리워했으나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추억만큼 악몽이 많은 그 땅에 발을 디디는 건 끔찍했다.

하지만, 루퀼렘에 돌아간다면 이리아가 얻는 건 많았다. 사실, 그녀가 노리는 건 출생과 신분을 증명해 줄 루퀼렘의 증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공식적인 결혼 허락을 노리고 있었다.

종교를 이끄는 군주와 정치를 하는 군주로서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와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위치는 동등했다. 하지만, 성법에 따라 이리아는 반려를 들이기 위해 반드시 여왕의 허락을 얻어 내야 했다.

에즈메릴다 여왕이 과연 결혼을 순순히 허락해 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만일 그녀가 결혼을 허락한다면 분명 비센티움과 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이다. 황제와의 정상회담 속에서, 여왕은 루퀼렘 대마법사와 비센티움 대공작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포할 테지.

카즈웰 4세가 반역을 일으켜 황위를 가지지 않는 이상, 그는 황제가 인정한 새신부를 절대로 건들 수 없었다. 에즈메릴다 여왕이 정상회담을 열어 황제와의 합의를 무사히 마친다면, 카즈웰 4세와 관련된 문제들은 단번에 해결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여왕님께서 이 결혼을 허락해 주셔야 할 텐데…….’

분노를 담아 꾹꾹 눌러쓴 서신을 보면 절대로 순순히 허락해 줄 것 같지가 않단 말이지.

이리아의 긴 설명을 모두 들은 덱스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아픈지 제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자근거리다가, 문장 하나를 툭 내뱉었다.

“당신, 루퀼렘에 가기로 이미 결심했구나.”

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루퀼렘에 가기를 별로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에즈메릴다 여왕은 둘의 결혼을 찬성하지 않을 게 분명한 데다가, 이리아가 성에 다시 감금당할 위험이 있었으니까.

덱스터의 마음을 알아챈 이리아가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는 함께 창틀에 걸터앉아 너른 어깨 위로 제 머리를 기대었다.

“루퀼렘인의 모습으로 공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에즈메릴다 여왕님 또한, 루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상대해야 할 분이셨어요. 저는 오히려 지금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요. 함께 가 주실 거죠?”

“난 당신이랑 떨어지면 하루도 제대로 못 살아, 이리아.”

“공께서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알아요.”

그러나 자신감 있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아는 제 목소리에 스며든 걱정을 온전히 숨길 수 없었다.

한때 도망쳐 나왔던 고향으로 돌아갈 용기가 필요했던 그녀는 덱스터의 손을 깍지 끼어 꼭 잡았다. 덱스터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이내 이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마주 감싸 쥐었다.

이리아가 새하얀 속눈썹을 지그시 내리깔며 속삭였다.

“성으로…… 정말 오랜만에 돌아가겠네요.”

“내가 항상 당신의 곁에 있을 거야. 그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절대로 멀어지지 않으리라 맹세할게.”

덱스터가 깍지 낀 손을 들어 금반지 위에 키스했다. 이리아는 이어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때까지, 숭고한 그의 모습에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입맞춤은 가볍지만 길었다. 이리아는 키스가 끝난 후에도 덱스터의 품에 안겨 창밖을 구경했다.

푸른 하늘을 조그마한 송골매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신을 들고 날아가는 송골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리아는 곧 콘라드 메이필드를 떠올렸다. 그가 가졌던 매와 상당히 비슷한 외형이었다.

콘라드는 청첩장이 도착하면 비센티움으로 돌아오겠다고 했었다. 아직 결혼식 날짜도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마당에 덱스터가 청첩장을 보낼 리 없었지만, 이리아는 혹시 모른 마음에 그의 어깨를 콩콩 두드렸다.

“하워드 공, 혹시 부단장님께 서신을 이미 부치셨나요?”

“아니. 조만간 보낼 생각인데, 왜?”

콘라드 메이필드를 떠올리면, 언제나 그와 함께 어른거리는 한 여인이 있었다.

덱스터가 무슨 일이냐는 듯 이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리아는 커다란 눈을 몇 차례 깜빡이다가, 새침데기 아가씨처럼 코를 찡긋거리며 답했다.

“그 사람에게 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신을 한 장만 더 부쳐 주시면 안 될까요?”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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