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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2/109)

91화

이게 바로 오랜 세월 성안에 갇혀 손 하나 까딱 안 한 마법사와 오랜 세월 몸을 굴린 군인의 차이인 건가. 이리아는 전보다 더 건강해 보이는 덱스터의 낯빛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한참 이리아의 머리를 빗어 내리던 그는 헛웃음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재차 고개를 푹 수그렸다.

“……결혼 후에 각방 쓴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 줘.”

“심각하게 고려 중이었어요.”

“각방만은 당신의 선택지에서 지워 주면 안 될까?”

“그럼 삼부제 도입에 찬성해 주실 건가요?”

“이리아…….”

덱스터가 한숨을 삼키며 이리아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껴안았다. 그는 낼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반쯤 토라진 이리아를 타일렀다.

“미안해. 당신이 이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

“세상 모든 인간의 체력이 하워드 공만큼 좋다고 생각하셨다면 큰 착각이에요.”

“정말 미안해. 화 풀어, 응……?”

이리아는 시답잖은 듯 흥 콧방귀를 뀌었지만, 뺨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 덱스터를 막지 않았다.

그는 이리아의 온 얼굴에 자잘한 키스를 남기다가, 간지러워진 이리아가 웃음을 터뜨리자마자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선, 그녀의 귓가에 영원히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이리아는 이 세상에 그녀를 잘 아는 이는 루 아휜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제 보니 덱스터도 루만큼이나 이리아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그녀의 화를 푸는 방법은 그 어떤 부분보다도 특출나게 잘 알았다.

거울 위로 비친 여인은 이리아의 눈에도 몹시 낯설었다. 하얀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샛노란 눈동자에는 지난날 이 저택에서 살았던 ‘씨시 힐데어’의 흔적조차도 없었다.

이리아는 제 목덜미에 망설임 없이 봉인석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내심 걱정하는 중이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비센티움인들이었고, 이리아는 ‘단언컨대’ 한 번도 루퀼렘에 호의적인 마음을 가진 비센티움인을 본 적이 없었다.

다시는 ‘씨시 힐데어’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다시 생각해 보니 참 무거운 돌덩이였다.

이리아의 착잡해진 낯빛을 알아챈 덱스터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겠지만, 하인들이 당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카즈웰 4세의 귀에도 분명 당신이 정체를 드러냈다는 소식이 들어갈 거야. 그는 이 제국 모든 곳에 자신의 눈을 심어 놓은 자거든.”

“제국민들 사이서도 하워드 공이 루퀼렘인 신부를 맞아들였다고 소문이 돌까요?”

“결혼식을 올린 후에는 당연히 그렇겠지. 귀족들도 전부 당신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지난날 루퀼렘의 대마법사로서 왕국민들 앞에 선 동안, 이리아도 꽤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었다. 그러나 비판은 익숙해질지언정, 비난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루퀼렘인의 모습으로 하워드 공과 결혼식을 올리면, 온 세간의 화살이 내게로 다 쏠릴 거다.

이리아가 용기를 얻기 위해 덱스터의 손을 있는 힘껏 부여잡았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으나, 거울 속 덱스터를 보자마자 입매를 다시 굳히고 말았다.

덱스터의 얼굴 속에는 그답지 않게 생경한 공포가 가득했다.

이리이가 다급히 뒤를 돌아 그의 양 뺨을 감쌌다. 혈색이 다 사라진 피부는 깜짝 놀랄 만큼 서늘했다.

“표, 표정이 왜 그래요……?”

“이리아, 나는 사람들의 추문 속에서 당신이 상처받는 게 제일 두려워.”

인제 보니 덱스터 또한, 이리아와 같은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똑같은 걱정을 함께 나눈다는 건 이리아에게 꽤 생소한 경험이었다. 말문이 턱 막혀 버린 그녀는 한동안 덱스터의 눈 속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잔잔히 미소 지었다.

“우리는 분명 잘 헤쳐 나갈 거예요, 공.”

없던 용기가 생겨나며, 덱스터 하워드와 함께라면 그 무엇이든 견뎌 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아는 흉터가 가득한 덱스터의 손등 위에 따뜻한 키스를 남겼다. 손등의 키스 한 번으로 덱스터도 그녀처럼 용기를 낼 수 있다면, 기꺼이 몇천 번이고 더 해 줄 수 있다.

이리아의 치장과 착의는 원래 하녀들의 업무이지만, 이날만큼은 덱스터가 손수 도맡아 했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그는 예상과 달리 세심했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여성의 옷을 잘 알았다. 이리아는 제 몸을 온전히 덱스터에게 맡긴 채, 점차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치장을 끝낸 덱스터는 다 괜찮을 거라는 말과 키스를 남기고선 방을 나섰다. 덱스터의 눈빛에 온전한 확신은 없었으나, 이리아는 다 괜찮을 거라는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하녀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이리아의 양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로샨이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이리아는 곧게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아가씨?”

너무나도 귀에 익은 이 목소리는 당연히 로샨의 것이었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이리아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굳어 버린 등허리를 억지로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루퀼렘인으로서의 모습을 발견한 하녀들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이전부터 수십 번 상상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리아가 상상했던 그 표정들은 전부 하녀들의 이목구비 안에 그대로 들어차 있었다.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침묵은 어김없이 방을 메웠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리아의 입 안은 쩍쩍 말라 갔다. 그녀는 문가에 옹기종기 모인 하녀들이 익숙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가장 먼저 깬 이는 로샨이었다.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 듯했으나, 그 속에 스며든 당혹스러움까지는 미처 감추지 못했다.

“머, 머리가 하얀색이시네요. 누…… 눈동자 색도 변했고요.”

“변한 게 아니에요. 제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원래 이 색이었거든요.”

“……네?”

로샨의 금색 눈썹은 끝내 처참히 일그러지고 말았다. 지금껏 모셔 왔던 주인의 약혼자가 전혀 다른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어린 그녀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이리아는 어디서부터, 그리고 어느 선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녀가 하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한창 쩔쩔매고 있을 때, 하녀들 사이서 루시어스 데이즈먼이 나타났다.

한마디의 설명조차 없었는데도, 그는 단번에 이리아의 정체를 알아챘다.

“루퀼렘인이셨군요.”

이리아는 차마 앞을 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고개를 수그리니 더 잘 드러난 정수리는 절대로 인공적으로 염색한 색이 아니라는 듯, 온통 새하얬다.

“루시어스 씨는 놀라지 않으시네요.”

“놀랐습니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죠. 아가씨께서 루 아휜과 친근해 보였던 이유가 따로 있었군요.”

“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니까요.”

“루퀼렘에서 도망쳐 수배자가 된 그 마법사도 사실은 아가씨셨나요?”

“제가 맞아요.”

“그럼 성기사들이 이 저택에 머물렀던 이유도 아가씨 때문이었겠군요.”

“네. 곤란하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충격과 공포가 가득한 하녀들 사이서, 루시어스는 놀라울 정도로 무덤덤했다. 그는 하워드 저택을 가꾸는 집사로서 자부심이 있었기에, 이리아보다도 지금껏 모든 사실을 숨겨 온 덱스터에게 더 짜증이 난 듯했다.

“주인님께서 갑자기 이유도 알려 주시지 않고서, 아가씨를 찾아가 보라 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네요…….”

루시어스는 20대라고 착각할 만큼이나 명실상부한 동안의 소유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딱 그의 나이대로 보였다. 해가 한창 오르고 있는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몹시도 피곤한 얼굴이었다.

이리아는 루시어스에게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멋쩍게 하하 웃어 버렸다. 루시어스는 골이 아픈지 이마를 짚고 있다가, 이내 하녀들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하워드 가(家)의 다른 사용인들은 분명 잠시 당황하고 말 겁니다.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 아가씨께서는 과도하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빨리 흩어지라는 의미로 하녀들을 쏘아보았다. 뿔뿔이 흩어진 하녀들은 분명 하얀 머리 이리아의 모습을 사방에 소문낼 테고, 그럼 해가 중천에 떴을 즈음에는 그녀의 정체가 저택의 모든 사용인에게 알려져 있을 터다.

‘……카즈웰 4세가 내가 정체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이제는 시간문제구나.’

이리아의 손톱이 더 세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하녀들이 떠난 후에도, 루시어스만은 계속해서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는 언제 빨간 머리칼을 가졌냐는 듯, 비센티움인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리아를 속속들이 뜯어보며 말했다.

“다른 이들은 어른이니 잠시 당황하고 만다고 쳐도, 루인은 완전히 달라진 아가씨를 보면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아이는 주변인의 변화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거든요.”

“루인은 제가 한번 잘 달래 볼게요…….”

루시어스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눈빛이었으나,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루시어스의 예상대로, 이리아는 전혀 루인을 달래지 못했다.

이리아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루인은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오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는 ‘아가씨가 도자기 인형처럼 변해 버렸다.’라며 엉엉 울었는데, 이리아가 열심히 달랬음에도 절대 진정하지 못했다.

한참을 대성통곡하던 루인은 덱스터의 품에 안긴 후에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덱스터가 최대한 쉬운 단어만 골라 전후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는 통 이해를 못 하는 듯했다.

그렇게 루인 웨스틴은 결국, 이리아와 덱스터를 거쳐 다섯 살 막내아들을 가진 루시어스에게로 넘겨졌다. 루인의 손을 잡은 루시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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